100화
사실 해리스는 수도로 떠나기 전부터 신경이 날카로웠다.
‘사태가 난처하게 되었구나.’
선대 공작이 전해준 정보 때문이었다.
마탑과 황실의 습격으로 고드윈이 난리 난 와중 아이반 레토스 자작 탈옥한 것이다.
그리고 기어코 아르투 백작 가문을 계승한 개새끼가 고드윈 공작에게 기어들어 갔다는 소식까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제이드에게.
해리스는 저들의 비열한 습성을 알았다. 직접 상대할 수 없으니 자신의 약점을 공격하겠다는 졸렬한 태도도.
거기다 제이드가 디뮈아드를 구하며 보였던 활약을 생각하면, 마탑과 황실까지도 제이드에게 관심을 둘 게 뻔했다.
그가 굳이 디뮈아드를 끌고 온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디뮈아드 라예르가라는 뜨거운 감자를 동행시켜, 제이드에게 향할지도 모르는 시선을 돌릴 방패로 이용하기 위해.
‘제이드는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지.’
혼란과 낭패의 얼굴을 하던 사람들 사이, 디뮈아드의 자줏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했다.
직감적으로 해리스는 깨달았다. 저 소년은 자신의 본의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좋습니다.’
소년은 순순히 동의했다. 그것이 도리어 불쾌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디뮈아드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제이드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치워버려야겠어.’
해리스의 적안이 가라앉았다.
약속대로 수도까지는 보호해 주겠지만, 그것만 끝나면 제이드의 시야에 닿지도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제이드를 돌아보던 순간,
“-제이드!”
해리스는 경악했다.
게이트에 도착하기도 전, 갑작스럽게 발생한 균열. 조각난 천공에 마차가 부서지며 제이드가 끌려 들어갔다.
해리스는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를 잡으러 손을 뻗었고,
“……!”
던전에 빠져들었다.
“윽.”
해리스는 고통을 참듯 이를 악물었다. 듀크와 마찬가지로, 해리스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공격당했다.
다만 듀크와 같은 물리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절망의 목소리가 귀에 닿아온다.
욱신-
더는 억제구에 갇혀 있지 않은 손목에 환상통이 느껴졌다. 새까맣던 시야가 뒤틀리며 절규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변했다.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그분께선 죽지 않았을 텐데!’
틈 없이 겹쳐진 보랏빛 나비는 어둠으로, 어둠은 컴컴한 감옥으로 바뀌었다. 그의 손목과 발목에는 낯설지 않은 무게가 달라붙었다.
고개를 숙이자 억제구가 보였다. 마석의 보랏빛이 반짝이는.
‘이건 환상이야.’
뇌의 착각이라고.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환시라고.
해리스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너는 영원히 여기서 탈출하지 못할 게다.’
아버지의 저주 어린 목소리는 너무나 생생했다. 진심 어린 기쁨으로 휘어진 입술도.
쇠창살에 갇혀 그를 응시하던 해리스는 깨달았다. 어느덧 자신은 작고 어리고 보잘것없는 꼬마로 돌아가 있다는 걸.
탁-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아버지.’
고드윈 공작이 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소리였다.
탁, 탁-
지팡이가, 발걸음이, 아버지가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어린 해리스에게 오직 억제구와 마법으로 이루어진 감옥만을 남겨두고서.
‘가지 마.’
정신이 혼몽해지고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다.
‘제발, 가지 마.’
어려진 해리스의 작고 무력한 손이 감옥 밖을 향해 뻗어진다.
나를 두고 가지 마. 돌아와. 혼자 두자 마. 내 손을…….
‘괜찮아.’
절박하게 뻗어진 손에,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닿았다.
투명하고 새파란 눈동자. 분홍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어린 얼굴이 속삭였다.
‘괜찮아, 해리스.’
사라락-
그의 얼굴 위로 연분홍색 곱슬머리가 물결치듯 흘러내린다.
‘결국, 다 괜찮아질 거야.’
맑게 울려오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멀게 들리는 목소리.
‘제이드.’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고 나서야 해리스는 정신을 차렸다.
‘이건, 진짜 과거가 아니야.’
던전이 만든 환각이다.
부드득-
이성을 되찾은 해리스는 순식간에 착시의 장막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제이드!”
해리스는 환각을 깨뜨리고 나오며 외쳤다. 온통 땀으로 젖은 옷감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방금, 뭐였지?’
아니,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궁금하지 않았다.
이 섬뜩한 공간에 제이드가 떨어졌다는 사실 말고는 중요한 것은 없었다.
너도 이런 끔찍한 환각을 보았을까. 으득, 해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어서 제이드를 구해야…….
[아니, 아니야.]
깔깔깔- 기분 나쁘게 웃는 목소리가 막막한 공간 전체로 울려왔다.
[그건 진짜 네 과거가 맞아. 정 믿을 수 없다면…….]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닿으며, 찢겨 나간 환각이 꽃잎으로 흐트러졌다.
[미래는 어때?]
무수한 꽃잎은 눈 깜빡할 사이 날아오르는 보랏빛 나비로 뒤바뀌며, 나비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낯선 풍경이 나타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금으로 세운 기둥.
기둥 옆에는 꽃과 술이 어지러울 정도로 가득 늘어져 있고, 구불거리는 무늬가 선명한 대리석 바닥이 그 위를 밟고 선 사람들을 반사했다.
신과 영웅들이 그려진 천장화 아래에 선 해리스는 깨달았다.
‘황궁.’
자신이 현재 자리한 곳은 황궁의 연회장이었다.
그를 깨닫자마자 현악기의 연주와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웅웅 울렸다.
머리 위에는 수천 개의 크리스털이 박힌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흔들렸고, 그 아래에는…….
‘……해리스, 님.’
제이드가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벌려져 있었고, 기다란 연분홍색 곱슬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찬란한 빛 아래 그녀는 전설 속 요정처럼 아름다웠지만,
‘죄송해요.’
울고 있었다.
제이드는 젖은 눈으로 총을 들었다.
탕-!
귀청을 때려 박는 격발음.
천장이 흔들리며, 수천 가지의 빛을 쏟아내던 샹들리에가 추락했다.
깨진 수정이 사방으로 터져 오르며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가득 울렸다.
아비규환. 어느덧 화려하던 연회장은 피와 죽음으로 망가져 있었지만, 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제이드.”
그녀가 도망쳤다.
사라졌다.
‘이건, 악몽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해리스는 손톱을 세워 손목의 피부를 긁었다.
오랜 세월 억제구에 고문당한 상흔으로 가득하던 손목 위로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진짜가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과 반대로 해리스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악몽이 아니라, 닥쳐올지도 모르는 미래라는 것을.
‘왜?’
왜, 네가 나를 떠나는 거야. 왜 나를 버리는 건데?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해리스는 길 잃은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손목을 긁던 손가락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지만, 정작 해리스는 고통도 피도 인지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과거의 환상은 제이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래의 환시는 그녀로 인해 갇혀 버렸다. 그렇게 해리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순간,
“쿨럭……!”
공격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해리스의 빨간 입술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졌다.
하지만,
“큭.”
고통에 일그러져야 할 얼굴은 도리어 붉게 웃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도리어 환시를 깨뜨린 듯, 해리스는 꿰뚫은 공격을 붙들어 역공했다.
“죽어.”
그의 그림자에서, 쏟아진 피에서, 그에 닿은 모든 어둠에서 촉수와 같은 힘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버리라고-!!”
악을 쓰는 목소리.
눈 돌아간 해리스는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적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흉포하게 쏟아지는 공격이 사방을 난자하고 공간을 으스러뜨렸다.
마침내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남지 않을 때까지.
“허억, 헉, 허억…….”
해리스는 피투성이가 되어 헐떡였다.
그의 힘, 이능이 그의 발끝에서부터 사지로 달라붙으며 우글거렸다.
그 모습은 너무나 기괴하고 불길하여, 인간이라기보다는 마수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해리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드.”
눈깔 뒤집힌 해리스의 머릿속에는, 그녀 한 사람만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디 있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적안이 희번덕하게 빛났다.
거기 있구나.
공간이 칼에 베이듯 갈라지며, 새까만 괴물의 인영이 사라졌다.
* * *
“해, 해리스 님?”
상태가 왜 저래. 제이드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멍해지게 만들 수 있는, 해리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보통이라면 끔찍해서 비명을 지를 법한 꼴이었지만, 상대는 해리스였다.
거칠게 닦아낸 것이 분명한 검붉은 핏자국은 퇴폐미가 넘치다 못해 뇌쇄적이기까지 했다.
“어쩌다 그런……. 어디 다치셨어요?”
하지만 뇌쇄적인 건 뇌쇄적인 거고, 피범벅이 된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거기다 미친 드래곤이랑 비슷하게, 훤칠한 육신에는 검고 기괴한 힘이 달라붙어 우글거리고 있었다.
‘설마 진짜 다친 건 아니겠지.’
다 남의 피일 확률 99.9%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이드는 손을 내밀었다.
아, 나의 제이드.
폭주 직전의 이능력자는 발갛게 웃었다.
그것이 눈 돌아간 자의 미소라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제이드의 허리가 낚아채 졌다.
“……!”
제 몸뚱이의 두 배는 거뜬히 넘을 법한 몸이 빈틈없이 붙어오며, 두꺼운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뜨거웠다.
닿아오는 무게도, 그의 피부도.
“해리스 님, 설마- 읍?!”
달싹이던 입술은 뒤통수가 당겨지는 것과 동시에 삼켜졌다.
“……!”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