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내가 저걸 드래곤의 앞발이라 추측한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일단 이곳이 드래곤의 신전으로 추측되었고 둘째, 아무리 봐도 저 거대한 앞발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거대한 앞발이 거두어지며 나타난 모습에 내 머리는 정지했다.
‘이, 이게 뭐야……?’
듀크 님, 왜 1/2이 되셨습니까.
이 사태만으로도 벅찬데, 날아가 버린 듀크의 대가리가 내게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기까지 했다.
약속대로, 기다려.
‘뭘-?!’
무슨 약속을 했으며 누구를 기다리라는 건데!
하지만 더 생각하기도 전에 듀크의 머리는 잿빛의 모래로 부스러지며 먼지처럼 사라졌다. 남은 신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말끔하게.
“미, 미친…….”
욕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아넬라가 충격받고 멘붕한 이유를 알겠네, 진짜 돌았어!
‘지만 멀쩡히 사라지면 다야?’
지켜보는 사람의 정신 건강도 생각해 주면 안 돼? 완전 호러라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굳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요정 아이야.]
턱, 어깨를 잡아 오는 손길.
‘으갸갸갹-!’
속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함께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랐다.
눈앞에는, 정말이지 놀랍게도 아름다운 얼굴이 떠 있었으니까.
그래, ‘떠’ 있었다. 둥둥 떠 있었다고!
‘갸악! 갸악! 갸아악-!!’
사람, 아니, 요정 살려! 속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머리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런, 놀랐구나.]
허공에 둥둥 뜬 얼굴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딴 식으로 등장하면 누구나 놀라거든?’
저절로 반론이 튀어나왔지만, 딱 붙은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다 어깨를 잡은 손길- 이라고 생각했던, 질척이는 검은 점액질이 손가락을 올리듯 가느다란 줄기를 들어 뺨을 쓰다듬자 그야말로 몸이 꽁꽁 얼어버렸다.
[쉬- 괜찮다. 겁먹지 말렴, 요정 아이야.]
그 와중에 목소리가 제법 친절하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더럽고 추악한 인간은 내가 없앴으니, 무서워할 것 없어.]
“……그러니까 그게 무서운 거라고요!”
충격과 공포에 빠진 내 주둥이는 자아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였다.
“어떻게, 아무리 인간이라도 S급 이능력자를 그렇게 단숨에……!”
[이능력자?]
동동 뜬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갸웃거리는데, 진짜 괴기 그 자체였다.
‘서, 설명을 요구하는 건가?’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그게요-”
이능. 그 미지의 힘이 인간들에게 갑자기 발생했으며, 그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가이드라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까지도.
[……하.]
아름답던 얼굴이 흉악하게 비틀렸다. 조소하는 얼굴에는 증오가 선연히 떠올랐다.
[우리를 학살하여 힘을 빼앗아 가놓고선, 그것을 비천한 인간 따위에게 나뉘어주었구나.]
뭐? 누구의 힘을 나눠줘?
그러나 더 의문을 품기도 전, 격노한 얼굴에서 뻗어 나간 힘이 그렇지 않아도 엉망으로 부서진 신상을 내려쳤다.
쾅-!!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순환의 이치인가!]
쩌렁쩌렁 울려오는 소리와 함께 나는 깨달았다.
저 얼굴은 허공에 뜬 게 아니라, 산처럼 커다랗게 솟은 새까만 점액질에 붙어 있었다는 걸.
“…….”
빙의자 살려.
괴기 그 자체의 모습에 정신이 잠시 아득해졌다.
‘이날을 위해 내가 공포 영화를 자주 보았던가? 공포 저항 스탯은 오늘을 위해 준비되었던 건가?’
일단 뭐든 간에 내가 지금 기절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쾅, 콰쾅-!
악의를 담아 신상을 부수려던 흉포한 공격은, 놀랍게도 신상이 뿜어내는 신성한 기운에 막혀 흩어졌다.
‘와.’
듀크는 한 큐에 대가리 날아가던데, 엄청나다.
아 물론 그놈은 심장에 구멍 뚫린 상태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난 못한다고.’
놀란 나와 달리, 괴기스러운 마수는 이를 부득 악물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거기서 더 일으킬 수가 있어?!’
놀라 올려다본 내 입은 쩌억 벌어졌다.
일그러진 얼굴이 사라지더니, 질척이고 괴기스럽게 생겼던 무언가가 천천히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으니까!
‘저게 듀크를 박살 내버렸던 드래곤이 맞긴 하구나……!’
여러모로 충격적인 등장에 동일시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상을 공격하던 드래곤의 외형 일부가 다시 괴이하고 까만 점액질의 형태로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하자, 더는 부인할 수도 없었다.
[왜? 미약한 인간의 몸뚱이 따위, 우리의 힘을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할 텐데-!]
피를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에는 원한이 가득했다. 살의에 몸의 솜털이 거꾸로 서며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능의 힘이 본디 드래곤의 것이었다고?’
굳은 몸과 달리 머리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갔다. 드래곤이 뱉어낸 본심과 <시천귀>의 설정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이능력자와 가이드는 디스토피아를 맞이하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들이야.’
혹시 그건 사멸한 고대 종족의 힘을 나눠 받은 결과였던 걸까?
확실히 고대 종족들과 비교하자면 인간의 육신은 미약하기 그지없을 테니, 그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그래서 이능력자와 가이드로 분화되었던 걸지도 몰라.’
나는 그제야 납득했다. 솔직히 이능이라는 힘은 개사기였으니까.
마법사나 기사처럼 오래 수련하지 않았는데 그저 태생적으로 타고난 힘이 그토록 강력할 수 있다니.
‘캐스팅 없이 마법 쓰는 격이잖아.’
그렇게 쉽게 개꿀 빠는 게 이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허락될 리가 없는데.
하지만 사실은 이능이 본래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고, 그리하여 가이드라는 존재를 갈구하게 되었던 거라면…….
‘말이 되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리미트도 없었으면 이능력자는 최소한의 사회적 규칙마저도 지키지 않는 무법자가 되지 않았을까.
‘가이드가 존재했으니 조금이라도 인간 사회의 규율을 지키는 척이라도 하는 거겠지.’
대표적으로 듀크라든지, 알루카스라든지, 해리스 같은 분들이 계신다.
‘아무리 해리스가 내 최애라지만,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아니야.’
법을 없애고 살 인간이지. 준 범죄자인 용병과 쾌락 살인마 듀크는 말할 것도 없고.
“으으, 상상만 해도 싫다.”
가이드라는 리미트도 없이 막가는 그놈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러자 드래곤 근처를 떠돌던 알이 ‘괜찮다’고 위로하듯 돌아와 내게 부비적거렸다.
“고, 고마워…….”
나는 조심스럽게 알을 쓰다듬었다.
기분 탓일까, 갈라져 있던 금이 약간씩 아물어가는 느낌이었다.
쿵-!
연이은 공격은 못 당한 건지, 신성한 힘은 바스러지고 그렇지 않아도 온전하지 못하던 신상에 금이 가며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불완전한 요정 아이야.]
“네, 넷?!”
드래곤이 나를 부르자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자고로 요정은 용의 벗.]
허물어지던 외형이 점차 줄어들더니, 마침내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 내가 깜짝 놀랐으리만치 아름다운 여인의 외형으로.
“……!”
하지만 그래도 크기를 완전히 줄이진 못했는지, 키는 2미터에 가까웠고 눈은 유막이 끼인 듯 불투명했다.
[내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약속하마.]
차분한 목소리.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내려오던 손은 위치를 잡지 못한 듯 더듬거렸다.
‘이 사람, 아니, 이 용…… 눈이 먼 거야.’
눈뿐만이 아니다.
나는 인간에 가깝게 변한 외형을 보며 알아차렸다.
드래곤의 외형은 석고상으로 빚은 여신상처럼 위엄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사지 전체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다친 육신조차도 오래 유지하기 힘든지, 신체 일부가 다시 검게 질척이는 점액질로 허물어지길 반복했다.
‘이건 본체가 아니야.’
나는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죽은 드래곤의 원념, 정신체다.’
한낱 인간마저도 원한을 품고 죽으면 귀신으로 찾아온다는 말이 있는데, 상대는 이 판타지 세계에서 압도적 강자였던 드래곤이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과거까지 있잖아.’
요정도, 드래곤도 인간으로 인해 학살당해 멸족당했으니 이런 게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타까워졌다.
‘같은 고대 종족(?)이라 그런가.’
아직 내가 요정이라는 실감은 없지만, 어쨌거나.
드래곤의 알이 상처투성이인 원념체에게 다가가 애교 부리듯 비비적거렸다.
[아아…….]
드래곤 여인은 몹시도 조심스럽게 알을 만졌다.
더듬거리는 손은 떨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알을 더럽히지 않게 형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살아남았구나, 간신히 살아남았어.]
뚝뚝, 실명된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대가 생판 남이다 못해 무시무시한 괴물인데도 마음이 욱신거렸다.
[아이가 네 덕분에 생을 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구나. 고맙다.]
‘알하고 대화를 나눠?’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 요정은 드래곤의 신뢰할 수 있는 벗이니 당연한 일이지.]
“…….”
예의상 사양한 건데 그렇게 덥석 받으시니 약간 당혹스럽군요.
[크윽, 컥-!]
“……?!”
눈이 먼 드래곤은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더니, 고통스럽게 신음하다가 중얼거렸다.
[나, 나의 벗. 요정 엘시는 도망쳤나……?]
‘설마 이거 PTSD?’
트리거에 눌린 귀환 군인처럼, 갑자기 훼까닥 돌아버린 드래곤이 내게 으르렁거렸다.
갑자기 훼까닥 돌아버린 건지, 앓는 소리를 내며 덜덜 떨던 드래곤이 내게 핏발 선 얼굴로 포효했다.
[내가 너의 동족을 도왔으니, 너도 알을 끝까지 보호해야 해-!]
귀청을 찢을 듯한 고함. 정신없이 옮겨가는 주제.
‘PTSD로 제정신이 아니야!’
듀크의 대가리를 날리면서 등장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멀쩡한 건 잠시였는지 드래곤의 육신은 무너지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너, 요정이잖아.]
그러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드래곤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왜 인간 냄새가 나지?]
“……!”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어깨가 잡혔다. 검고 역한 점액질이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왜, 그 추악하고 더러운 것의 냄새가 나는 거냐!]
미친 드래곤이 내게 살기를 뿜어내던 순간이었다.
푸슉-!
드래곤이 세로로 갈라진 것은.
나는 갈라진 인영 사이 보이는 인영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해리스?’
안도하여 그를 부르던 나는 멈칫했다.
해리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