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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97화 (97/119)

97화

“너한테서, 달콤한 향이 나.”

쿵- 심장에서 둔탁한 충격이 울려왔다.

혹시나 해서 돌아보았지만, 당장 침이라도 흘릴 듯 벌려진 빨간 입과 송곳니까지 보이니 확실했다.

‘아니, 이런 망할 S급 놈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다들 세계관 최강자급 인물들이라 그런지 후각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 정말. 알았어요, 알았어.”

나는 쓰린 속을 달래며 어쩔 수 없이 찢어진 치맛단을 뒤적거렸다.

‘크흑, 아끼고 아끼던 내 달다구리들…….’

내가 꺼내 든 것은 간식 주머니였다. 보존 마법이 걸린 이 비단 주머니는 무려 선대 공작님이 준비해 주신 것이었다.

‘큼, 제이드.’

‘네?’

‘……가는 길에 출출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거라.’

불쑥 내미신 주머니 안에 든 것은 설탕과 설탕으로 절인 과일을 듬뿍 넣은 디저트였다. 내 입맛에 딱 맞는!

‘각하……!’

‘먹기 싫으면 버리든가, 해리스 그놈 먹이든지 해라.’

‘버리긴요? 제가 다 와구와구 다 먹어치울 거예요!’

‘……그래, 앞으로도 굶지 말고 잘 먹어라.’

응? 나 굶은 적 없는데. 그렇게 말하려던 난 선대 공작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닫고 멍해졌다.

‘세상에, 그날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거야?’

처음, 본성에서 내가 뭣도 못 먹고 끌려다녔던 날.

한참 잊고 있었다. 그날 이후 동관에서는 내게 언제나 호화롭고 푸짐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배고픔을 인지하기도 전에 온갖 디저트가 입을 채워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대 공작님은 아직도 그날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인지 표정이 진지했다.

‘이게 할아버지라는 건가.’

묘한 기분이었다.

사실 난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생소했다. 내 친조부모도 외조부모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아주 어릴 적 가부장적이던 아버지와 친가는 불륜녀에게서 ‘대를 이을 아들을 보았다’며 엄마에게 이혼을 요구했었고, 외가는 처음부터 절연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봐도 별달리 떠오르는 추억은 없었다. ‘K-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 굶기는 건 못 참지!’ 같은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서 힘든 일 있으면, 혼자서 끙끙 참지 말고 해리스 그놈에게 다 말해라.’

‘……각하.’

‘네가 그놈의 약혼ㄴ…… 아니, 반려 가이드니 어떻게든 다 해줄 게다.’

이렇게 내 손을 잡고 걱정하시는 단단한 손길이, 잘 챙겨 먹으라고 당부하시는 얼굴이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처음, 인간 취급은커녕 인사도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푸대접해 분개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쓴 초콜릿을 먹은 듯 마음이 달콤 쌉싸름했다. 단순히 여정 동안 입 심심하지 않을 디저트를 받은 게 아닌, 마음을 받은 것 같아서.

‘아까워.’

내가 좋아하는 달달한 간식이 잔뜩 들어 있는데, 여정이 이어진 며칠 동안 하나도 안 먹고 아껴두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조난(?)까지 해버렸으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더더욱 식량을 아끼려 했지만…….

“……주면 될 거 아니에요.”

속이 쓰리다 못해 피눈물이 났다. 해리스에 이어 저 살인마 놈마저 내 비상 간식을 탐지해 버리다니!

“뭐?”

“자요.”

됐어, 이런 걸로 아까운 티 내면 없어 보여! 나는 호쾌한 척 듀크의 손에다 간식을 얹어주었다.

“자, 두 개. 두 개면 됐죠?”

두 개도 크게 인심 쓴 거였다.

이게 어떤 간식인데! 내 정든 상사이자 사랑하는 최애인 해리스면 몰라, 솔직히 듀크 아인델타는 생판 남이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구해줬으니 얻어먹는 사람은 바로 나여야지!’

그러나 성인 남성의 흰 손 위에 덩그러니 올라간 두 개의 휘낭시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

‘하, 하나하나 크기는 작아 보여도! 고열량이야! 괜찮다고!’

그런 눈빛으로 응시했지만, 듀크의 시선은 멍했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굳어진 얼굴이었다.

지금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겨우 두 개 주냐고 눈치라도 주는 건가?

“아, 알았어요. 더 주면 될 거 아니에요.”

압박감에 못 이겨 나는 주머니를 풀어, 하나씩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니, 이 망할 돼지 자식.’

나는 기가 막혀 듀크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뻔뻔스럽게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처구니없다는 듯 표정이었다,

거의 다 줬는데도 왜 저런 얼굴이라니!

“안 돼! 더 없어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껴놓던 무화과 휘낭시에를 쥐며 외쳤다.

‘이것만은 포기 못 해, 나도 배고프다고!’

선대 공작님은 애초에 나 먹으라고 챙겨주셨거든? 나도 최소한 하나는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혹시나 뺏길까 황급히 휘낭시에를 입에 털어 넣었다.

“……!”

갑자기 던전에 떨어졌다는 충격과 하필이면 듀크 아인델타를 마주쳤다는 공포로 몸이 온통 긴장하고 피로했기 때문일까?

“진짜, 너무 맛있다…….”

눈물 날 거 같아, 흐흑. 당충전 최고!

“……하,”

혼자서 당에 취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가 우스웠던 걸까? 듀크 아인델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래. 웃어라, 웃어. 이상한 표정 짓는 것보단 낫다.

확실히 간식 하나 가지고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는 게 웃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심각하거든?’

이건 그냥 디저트가 아니야. 선대 공작님이 챙겨주신 특별한 추억템이라고!

거기다 나는 듀크처럼 S급 이능력자가 아니다. 나중을 대비해 식량과 체력을 비축해 놔야 한다고.

그런데 저놈에게 다 주게 생겼다니, 이게 바로 아끼다 똥 된다는 건가.

“……이래서군.”

한창 미친 듯이 낄낄거리던 듀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러니까, 가둬둘 수가 없었던 거야.”

갑자기 저 자식은 또 무슨 소리람. 나는 행여나 주머니에 작은 초콜릿이라도 남은 거 없나 뒤적거리며 듀크가 움켜쥔 디저트를 응시했다.

“먹을 거예요, 말 거예요?”

아니면 내놔.

나는 손을 뻗었다.

정말로 다시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화제를 전환하고 싶었다.

‘가두다니.’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누가 보면 여기가 무슨 19금 피폐 감금물인 줄 알겠네. 여기 장르는 판무라고!

무슨 이유로 저런 장르 이탈하는 대사를 막 날리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나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화제는 다시 간식으로 돌아왔다.

“먹을 거야.”

“쳇…….”

막상 듀크가 그 많은 디저트를 순식간에 우적우적 씹어 삼키자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잘 먹었어. 맛있네.”

“당연하죠, 고드윈 본성의 요리사가 직접 만든 건데……가 아니라 잠깐, 심장이 뚫려 있으신데 음식 섭취는 어떻게 가능하신 건지?”

“그러니까 나도 도와줄게.”

이어진 말에 듀크 아인델타의 특별하고도 신묘한 인체의 신비는 뒷전이 되었다.

“너,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해리스 고드윈 옆에 붙어 있는 거잖아?”

* * *

듀크는 씩 웃었다. 미세하게 굳어진 제이드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에게도 이번 일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저 태평히 제이드를 구경하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균열이 나타나며 마수들이 쏟아지기도 전에 생겨난 던전이 제이드를 삼켜버렸다.

‘왜일까.’

흥미와 호기심이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무엇을 하기도 전에 공격당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성물에.’

복제된 자신에게 신성한 성물의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깔려 소멸했을지도 모르지.

분신이라 해서 고통이 경감되는 건 아니었다. 치명타에 반쯤 죽어가던 듀크는 끝장나는 고통 속에서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던전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마탑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던전은 균열로 부서진 세계의 틈새로 이계(異界)가 침입한 결과물이었다.

이계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목숨. 그리하여 던전은 보통 초반에는 도전할 수 있을 법한 정도의 난이도로 시작한다.

일명, 문지기 마수라 불리는 것들.

위협적이지만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닌, 자잘한 마수들을 통해 던전은 도전자들에게 성취감을 주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오도록 유혹해 왔다.

‘하지만, 이 던전은…….’

정반대로 작동한다.

듀크는 S급 이능력자였다. 제아무리 분신체라 한들, 시작부터 치명타를 입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즉, 언노운 던전.’

일반적인 던전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극강 난이도의 던전.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지.’

듀크는 발아래를 힐끗 보았다.

무너진 신전의 대리석 조각 아래 흩어진 시체들. 그들의 끝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같은 살인자니까.’

듀크는 히죽, 웃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족속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와 악의를.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공격할 줄은 몰랐지만.’

듀크는 무의식적으로 텅 빈 가슴을 더듬었다.

자신마저 이렇게 치명타를 입었는데, 마찬가지로 휩쓸린 그 새끼, 해리스 고드윈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대로 죽어주지는 않으려나?

회색의 홍채가 흥분과 기대로 반짝이던 순간이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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