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쿨럭, 커헉!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기침했다. 비눗물을 끼얹어진 듯 시야가 흐릿하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더듬더듬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고드윈…… 맞아, 고드윈 본성에서 출발했다. 수도의 건국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아, 그리고 선대 공작님 얼굴이 조금 이상했지.’
떠나기 전 반지를 자랑했더니, ‘기어코 그걸 끼웠구나’ 하고 눈살을 찡그리셨다. 나중엔 해리스를 노려보시기도 하셨지.
‘아무래도 선대 고드윈 공작님의 눈에는 지나치게 심플한 디자인이어서 그런가?’
왜인지 오다 주웠다던 해리스는 선대 공작의 시선을 끝까지 마주하지 않으며 출발을 외쳤다.
그리고…….
‘아, 그래. 레노르와 디뮈아드.’
라예르가와 고드윈의 혈통인 그들의 처벌은 사실 애매했다.
레노르는 라예르가의 후계자였으니 애초에 논외였고, 사건의 시발점인 디뮈아드는 아직 어렸다.
‘거기다 아이린 공녀, 아니, 라예르가 후작 부인이 모든 죄를 자청했고.’
결국 그녀는 혈통으로 물려받은 고드윈의 권리 대다수를 상실했다. 상속권과 후계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하지만 더 이상 공녀라고도 불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본성에 계속 두고 일을 시키신다고요?’
‘그래, 노역형.’
선대 공작이 맡긴 대로, 라예르가 후작 부인에 관한 모든 처벌을 담당하게 된 해리스는 무심히 말했다. 싸늘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구 고드윈 세력 내에서 그렇게 정치질을 잘했으니, 앞으로도 잘하는 일 시키면 되겠지.’
한때 해리스를 배척했던 구 고드윈 세력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사죄했으나, 깨어난 해리스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부조차 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고드윈에서 일어난 모든 사달 때문인지, 해리스는 그냥 전부 다 지긋지긋한 기색이었다.
‘지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살라고 해.’
선대 공작에게 후계자로서 인정받는다.
그 하나 때문에 본성에 붙어 있던 해리스는 목적이 달성되자마자 떠나려 했다.
‘자기 역할을 대신할 사람으로, 라예르가 후작 부인을 써먹으려는 거구나.’
경력자니까 인수인계도 할 필요 없고, 영원히 승진 못 하게 폐적된 거나 다름없는 상태니까 후계권을 빼앗길 위험도 없고.
‘거기다, 몇십 년간 고드윈에서 떠나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라예르가의 가족들과는 생이별하게 된 셈이지.’
물론 그쪽에서 찾아올 수야 있겠지만, 라예르가의 주인이 어디 한가하게 가문을 비우고 고드윈에 찾아올 수는 있겠는가.
라예르가 후작 부인은 그 모든 형벌을 담담히 받아들였지만,
‘그리고, 디뮈아드 라예르가는 우리와 함께 수도로 간다.’
‘안 돼!’
마지막 선고에는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것은, 다 나의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찌……!’
‘닥쳐.’
해리스의 말은 권고가 아닌 명령이었다. 발치에서 나온 검은 힘이 라예르가 후작 부인의 입을 막고 무릎 꿇렸으니까.
‘윽-!’
‘그 망할 라예르가의 애새끼가 살아남은 것은, 그들을 고드윈으로 끌어들여 방어하겠다는 당신의 계략이 성공해서가 아니야.’
해리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랭히 말했다.
‘나의 제이드가 베푼 호의 덕분이지.’
‘…….’
‘그렇지 않다면, 나 또한 당신들이 죽든 말든 내버려 두었을 테니.’
그 말에 라예르가 후작 부인은 멈칫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돌아서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았거나, 해리스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으면 디뮈아드는 그대로 끝이었을 테니.
‘그런데 우리가 떠나면, 그놈의 애새끼가 과연 무사할까?’
‘……!’
라예르가 후작 부인의 자주색 눈동자가 부릅떠지고, 악물린 턱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하나는 악으로, 다른 하나는 악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기묘하게도 닮아 있었다.
핏줄은 못 속인다는 걸까, 생각할 무렵 해리스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여정 동안은 내가 보호해 주도록 하지.’
‘해리스……!’
내가 봐도 못 믿을, 사기꾼처럼 사악한 미소였다. 하지만 선대 공작님은 감동하셨고, 라예르가 후작 부인도 더 반발하지 못했다.
‘뭐, 확실히 해리스 이상으로 디뮈아드에게 무관심하면서도 강력한 이능력자는 구하기 어렵겠지.’
그렇게 디뮈아드는 우리의 수도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레노르는 원래 라예르가의 후계자인 만큼 어차피 건국제에 참석해야 했고.
그래서 같이 이동하게 되었지만…….
‘응? 내 최애님은 이렇게 순순히 남을 도와줄 성정이 아닌데?’
의아했다.
의문을 품고서 마차 바깥의 창문으로 해리스를 보던 난, 그와 눈이 마주치자 헤헷 웃으며 반지 낀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해리스는 웃지 않았다.
‘제이드-!’
급격히 굳은 얼굴이 내게 달려와 무어라 외치며 손을 뻗었지만…….
“……아.”
나는 간신히 나온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추락했구나.”
기억났다.
마차가 으깨지듯 부서지던 소리.
멍하니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부서진 마차의 틈새로 보이는 유리처럼 깨져 조각조각 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갑작스러운 던전 발생! <무너진 신전에서 탈출하라>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조건: 던전에서 탈출할 때까지 생존할 것
-보상: 진실 확인
-페널티: 사망
어둠에 매달린 채 나는 멍하니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창을 보고 있었다.
‘미친.’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던전에 휩쓸려버렸다는 걸!
‘왜! 왜 하필 나야-!’
비명이 목까지 기어올랐지만 나는 억지로 눌러 삼켰다. 발밑에 훤히 보이는 어둠에 식은땀이 저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허억, 헉, 하아…….”
한참을 심호흡하고 나서야 겨우 심장이 진정되고 현실이 제대로 파악되었다.
나는 추락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툭 튀어나온 철근에 걸렸다.
‘빵빵한 속치마 만세!’
덕분에 나는 철근에 걸리고도 크게 다치지 않고 매달리게 된 것 같다.
“하,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찔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나는 치맛단을 철근에서 조심조심 빼고 잘라서 빠져나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철근은 바닥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그리고 조심조심 아래로 기어 내려오기도 어렵지 않았다.
“……이제 어쩌지.”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공간을 울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던전에 휩쓸리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이렇게 혼자 남는 건 처음이었다.
‘무섭다.’
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나는 가장 효과적이고 신뢰도 높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해리스 님! 해리스-!!”
나의 사랑하는 최애 님! 세계관 최강자라는 설정이 괜히 달린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
‘빨리 매지컬하고도 미라클한 방법으로 날 구해달란 말이다!’
목청이 터지도록 해리스를 불렀지만, 광활한 공간에 내 목소리는 메아리치며 멀어지기만 했다.
‘……끙, 이건 안 되겠다.’
나는 얼얼한 목을 붙잡고 포기했다.
‘일단 퀘스트가 <무너진 신전에서 탈출하라>인 만큼, 어떻게든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해.’
나는 찢어진 치맛단을 잡으며 열심히 걸었다.
“망할 던전, 왜 이렇게 넓어.”
각 잡고 던전을 준비했을 때보다 불편한 의상이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새로 산 여행용 신발은 걷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
던전이니 당연히 마수가 나올 거라 준비하고 총을 소환해 들고 있던 난, 의외의 것을 마주하고 굳어졌다.
무너진 신전이라는 이름답게, 대리석 바닥에는 추락한 돌덩이들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소름 돋았다.
물론 내가 시체를 목격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일단 빙의하자마자 해리스가 폭주해서 사람 여럿 죽어 나가고 있었고, 탈옥 후에는 아예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디뮈아드 납치당할 때도 장난이 아니었지.’
그렇지만 그때마다 상황이 급박하고 정신은 하나도 없어서, 이렇게 정면으로 사람이 죽은 모습을 마주하진 않았었다.
그리고 혼자도 아니었다!
‘무서워…….’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뻗어가 내 육신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나, 난 지금 영화 촬영장~ 촬영장 와 있다~”
나는 탈출해야 해. 움직여야 한다고.
이대로 공포에 얼어 있을 수만은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그 시체들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저건 모두 소품이다~ 진짜 시체 아니다~”
하지만 ‘안 보인다, 난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고 셀프 모자이크하는 것도 한계였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체의 잔해에 나는 셀프 세뇌의 방향을 바꾸려 노력했다.
“이건 모두 가짜~ 나는 영화 속 인물~!”
흐흑 언니, 여기 너무 무서워.
엄마, 이억 오만 리 이 세계에 빙의한 막내 딸내미 오늘도 별의별 생고생을 다 하고 있습니다.
“전부 진짜가 아니야, 전부…….”
애써 눈물을 삼키며 정줄을 반쯤 놓고 있던 차였다.
반짝, 어둠의 한구석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은.
“안녕.”
“……가짜아악?!”
갑작스러운 인사에 높은 소프라노 보이스가 목에서 쏟아졌다.
“뭐, 뭐야! 뭐예요!! 가짜 아니지?!”
“진짜입니다.”
“와악!”
놀라 경기를 일으키면서도, 나 외에 생존자를 보았다는 감격에 허겁지겁 그쪽으로 다가섰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 다치진 않으셨…….”
그리고 발견했다.
“……어?”
창백하게 흰 피부. 윤기 하나 없이 탁한 회색의 머리카락. 그와 똑같은 색의 눈동자까지.
누가 봐도 호감이 갈 정도로 준수한 얼굴이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제대로 인식할 수조차 없이 존재감이 옅은 사내.
‘자, 잠깐.’
설마 저 자식은…….
얼어붙은 내 모습을 보며 사내는 웃었다.
“제이드라고 했나?”
비죽, 미소 짓는 입술 끝에 나온 양 송곳니를 보고 나서야 나는 확신했다.
저 사람이다.
“안녕, 제이드.”
듀크 아인델타.
해리스와 알루카스를 이은 세 번째 S급 이능력자이자, 취미가 살인인 최강의 암살자.
그리고 나를 오랫동안 스토킹해 왔던 관음증 변태가 지금, 내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심장이 석상에 꿰뚫린 채.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