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아뇨, 전혀요.”
생각하기도 전에 답한 거라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몰랐다.
“……전혀?”
해리스의 표정이 묘하게 저조해진 것만 같던 이유도.
내가 뭐 잘못 답했나? 난 반사적으로 변명을 덧붙였다.
“그, 그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래는 희귀병 환자였잖아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결혼 같은 일은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네?”
가벼운 손길이 턱을 쥐어 올린다. 반짝이는 보석들보다도 선명한 적안이 나를 응시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가 아닌 지금은, 어떤데.”
“…….”
나는 멍하니 그 아름다운 붉은빛에 홀린 듯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거 같진 않은데…….”
“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는 비슷하지 않나요? 해리스 님도 맨날 배신하면 죽인다고 하시면서.”
“…….”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업보라도 느낀 건지 내 턱을 쥔 해리스의 손가락이 멈칫 굳어졌다.
“그나저나 결혼은 갑자기 왜요?”
하지만 찔리는 게 많은 난 굳이 해리스의 반응을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화제가 나한테서 다른 것으로 옮겨갔어.’
즉, 내가 뭘 들킨 건 아니란 말이지. 그 사실에 안도하며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혹시 누가 결혼해요?”
* * *
“결혼?”
너무나 낯선 단어에 해리스는 순간 반응할 타이밍을 놓쳤다.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그런 관혼상례 같은 건 영원히 자신과 연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이제 슬슬 결혼할 때가 되었지 않으냐.”
선대 공작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내가 허락하지. 그 아이와 결혼하거라.”
당연하지만 선대 공작이 말하는 ‘그 아이’는 제이드였다.
‘한창 젊고 어린 나이의 아가씨가 저토록 헌신적인 순정을 보였는데,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제이드와 해리스의 거래를 모르는 선대 공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철저히 로맨스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가이드와 이능력자라는 존재들만의 특수한 관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착각이 심화되었다.
‘젊은 남녀가 가이딩이라는 이유로 온갖 스킨쉽을 하고 다녀? 그것도 혼전에?!’
보수적인 선대 공작으로선 목을 잡고 쓰러질 노릇이었다.
‘고얀 것들, 나 때에는 약혼 전에는 손도 안 잡았어!’
그런 선대 공작이 여태껏 둘의 관계에 입을 대지 않은 건, 두 사람을 언젠가 떠날 이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진심으로 해리스를 고드윈의 후계자이자 자신의 싹바가지 없는 손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선대 공작은 더는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출발 전에 간소하게라도 약혼식부터 하거라.”
첫째 며느리를 황녀로 들일 정도로 명성 높은 고드윈에서, 신분이 낮다 못해 아예 신분 자체가 없어 보이는 제이드를 손주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다 결심하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었다.
‘하지만 상대는 해리스지.’
성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괴팍한 자신의 손자.
그에게 다른 귀족들처럼 가문 대 가문의 뜻으로 행해지는 정상적이고 무난한 정략결혼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아니, 일단 상대라도 있는 게 어디야.’
여러 일을 겪은 선대 공작은 많은 걸 내려놓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해리스가 제이드처럼 비천한 신분의 아내를 맞이한다면 절연할 일이었다.
하지만 해리스는 보통의 경우가 아니었다. 아들이 학대하고 자신은 방치했던 아이.
유폐되어 있던 손자를 보살펴줄 기회는 수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훤칠한 청년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최소한, 혼인만큼은 도와줘야지.’
그것이 그나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선대 공작이 제이드의 신분 세탁에 레디안 백작 가문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이 아예 안 나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레디안의 방계에 단승 남작 작위까지 얻었으면 자격이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물밑에서 상황을 세팅해놓은 선대 공작은 이미 제이드를 예비 손주 며느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상대?”
그러나 선대 공작이 그러든 말든 정작 해리스는 청혼이라는 단어부터 결혼까지 한마디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상대를 정해놓았다니. 대체 누구-”
“누구?”
전혀 모르겠다는 해리스의 반응에 경악한 선대 공작은 쾅! 사이드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외쳤다.
“당연히 네가 죽고 못 사는 제이드를 말하는 게지!”
제이드.
그리고 결혼.
두 단어의 조합에 해리스의 머리가 정지했다.
“이 파렴치한 놈! 너 설마 그 아이를 버리고 다른 계집을 처로 들일 생각이었느냐?!”
“아니……!”
생각할 것도 없이 부인하던 해리스 멈칫했다.
버린다.
그 말에 버튼이 눌리듯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이드가 선택지를 운운하며, 자신이 그녀를 버리는 건 선택지라는 개소리를 하던 날.
그리고 제이드에겐, 자신을 버리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라는 것을 확신한 날.
“…….”
해리스의 표정이 싸하게 굳어졌다.
‘지금 제이드는 어디 있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지정한 영역은 그리 넓지 못해서, 제이드가 그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 탐지하기 어려웠다.
해리스 발밑의 그림자가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그딴 후진 가보 필요 없어.
해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 확인해야 했다. 제이드가 어디 있지? 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버린 거지?
“이놈의 자식이 그래도!”
뒤에서 선대 공작의 고함이 웅웅대듯 멀어졌다.
“일단 반지라도 챙기거라! 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느냐? 역대-”
“고드윈이 대대로 써온 반지라고, 저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필요 없어. 해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몇 명의 손을 거쳐 간 건지도 모르는 낡고 불결한 반지 따위가 뭐라고.”
“이, 이놈이……!!”
분개한 선대 공작은 다시 한번 테이블을 후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가엾은 테이블은 두 번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쩌저적 갈라져 부서졌지만, 선대 공작 자신은 물론 해리스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편하실 대로 머무시든지 하고, 저는 이만.”
문병 온 사람을 두고 가버리는 행패를 부릴 정도로.
“허!”
기가 막힌 선대 공작은 어릿어릿 당겨오는 목덜미를 눌렀다.
포기하면 편하다, 포기하면 편해…… 그리 중얼거리며 선대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필요 없다면 되었다.”
사실 해리스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상징성 때문에 대대로 고드윈의 청혼에 반드시 쓰이는 반지이긴 했지만, 그 반지가 가진 힘을 불쾌해하는 반려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위치 추적당하는 반지라니, 찝찝할 만도 하지.”
선대 공작의 중얼거림에 문 닫고 나서려던 해리스의 발이 멈칫했다.
* * *
“……아니.”
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
뭐, 왜? 제이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혹시 저 주시는 거예요?”
“……오다가 주웠어.”
오다가 이런 귀금속이 들어 있는 게 뻔해 보이는 상자를 주워?
제이드는 의아해졌으나, 문득 내 주변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보고 납득했다.
‘그래, 여긴 보물 창고잖아. 오다가 주울 법도 하지.’
상자를 받은 제이드가 달칵 열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빈티지한 느낌의 은색 반지였다. 그리고,
“오. 마력이 깃들어 있네요?”
“……!”
해리스는 흠칫했으나, 반지를 둘러싼 검붉은 마력을 흥미롭게 응시하던 제이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마법이 깃들어 있나 본데, 뭘까요?”
별 의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해리스는 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
“보통 반지에 걸릴 법한 마법은, 보호? 아니면 소환인가?”
“그 비슷하겠지.”
제이드의 위치를 추적한 자신이, 소환되듯 달려갈 테니까. 그럼 실질적으로 보호나 다름없지 않나.
“…….”
자신의 정신 나간 합리화에 해리스가 잠시 현타 느낄 무렵, 반지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던 제이드는 감탄했다.
‘와, 보석이 반지 안쪽에다 빈틈없이 좌르륵 박혀 있네.’
흑요석처럼 보이던 보석은 각도를 기울이자 얼핏 붉은색으로도 보였다.
“가넷인가?”
제이드의 중얼거림에 해리스는 말없이 피를 낸 검지를 혀로 닦았다.
반지의 계약에는 피가 필요했다. 검붉은 피를 내던 엄지의 상처는 이미 아문 지 오래였지만, 초조한 마음은 그 아문 상흔마저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귀해 보이는데, 진짜 제가 가져도 돼요?”
“됐으니까 빨리 껴.”
“그래도 사이즈 안 맞으면…… 어?”
제이드는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반지가 훅, 손가락 둘레에 맞게 줄어드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봤어요? 자동으로 사이즈 조절됐어요!”
“…….”
역시 마법의 반지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대박이다.
제이드는 눈을 빛내며 쫑알거리다, 왜인지 묘하게 경직된 해리스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어때요, 잘 어울리죠?”
쫙 펼쳐진 자그마한 손이 그 앞에 펼쳐진다. 우연인지 반지가 들어간 것은 약지였다.
해리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약지의 반지를 응시했다.
“아~ 이런 심플한 디자인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이 몸의 소화력이란~”
“계속 끼고 다녀.”
“네, 네. 저도 마음에 들어요.”
“절대 빼지 마. 아니, 그냥 뺄 생각 자체를 하지 마.”
“……?”
아니,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왜인지 모를 불길함에 제이드는 슬금슬금 반지를 빼보려 했지만.
‘응? 잘 안 빠지네.’
뭐지. 살살 빼려 해서 그런가?
제이드가 손가락에 힘을 주려던 순간, 해리스의 커다란 손이 제이드의 두 손을 통째로 덮어왔다.
“……??”
의문을 담고 고개를 들어 올린 제이드는 눈이 커다래졌다.
어느덧 이마가 닿을 듯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선홍빛 눈동자.
“잘 어울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낮게 울려오는 목소리는 가볍게 손가락의 반지에 닿았다 사라졌다.
“……!”
제이드는 반지 위를 스친 숨결에 움찔 떨었다. 자신의 손목을 쥔 채 고개 든 해리스는 웃고 있었다.
청혼에 성공한 사내처럼, 진정으로 기쁘다는 듯이.
의구심을 가졌던 것도 잊은 채, 제이드는 넋 놓고 해리스를 응시했다. 그의 미소와 손등에 닿은 숨결을. 반지에 입을 맞추던 우아한 몸짓까지도.
그 순간, 마음이 결정을 내렸다.
‘이야기하자.’
도망치지 말고, 해주석을 찾은 뒤 해리스에게 다 털어놓자.
‘내가 가짜라는 것도, 진짜는 내 오빠 에이드리안이라는 것도.’
시작은 기만이었을지도 몰라도, 당신을 위하는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다고도.
‘그러면 될 거야.’
근거 따윈 없지만,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의 무게에 기대어 제이드는 믿기로 했다.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 * *
불행히도 그 믿음은 수도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깨지게 되었다.
“……허억!”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