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해리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
“일단, 당장 도망칠 준비를 하시는 것보단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게 끌려온 카밀로가 침착하게 답했다.
“우선 해주석을 구하려면 황제가 참석하는 건국제의 황실 연회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고드윈 소공작의 가이드라는 자격을 유지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역시 그렇지?”
당연하지만 그녀도 에이드리안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서 해주석을 구하라’는 당부를 들은 뒤였다.
‘이래저래 설명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서 편하네.’
우리는 황제가 나타나면 어떻게 접근할 건지, 접근한 뒤에는 어찌 훔칠 것인지에 대해 빠르게 논의했다.
“훔치기 전에 시선을 교란할 것이 필요해요.”
“아주 정교한 가품을 미리 준비해 둬야겠지.”
그래 봤자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최소한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가품’이라는 단어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듀크 아인델타.
‘그 미친 쾌락 살인마를 여기 끌어들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의 ‘복제’ 기술은 사실상 육안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 마법 탐지도 일시적으로 회피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현장에서 바로 만들 수 있잖아.’
접촉만 하면 되니까.
이능부터 스킬까지 그야말로 훌륭한 도둑의 자질이거늘, 어쩌다 괴악한 취미를 가져서 암살자가 된 것일까.
약간 도긴개긴 같긴 하지만 그래도 도둑이 살인마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나는 에이드리안(돌멩이)을 만지작거렸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사실.”
내 중얼거림 때문일까. 카밀로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이드 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방법 외, 해주를 할 수 있는 네 번째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뭐? 그게 뭔데!”
“물론 그 방법도 상당히 시도하기 어렵습니다만…….”
“어려워 봤자 황제 대가리에서 제관(帝冠) 훔치는 것만 하겠어? 얼른 말해봐!”
그럼 이 개고생을 근본부터 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카밀로는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말한 네 번째 방법은,
“해주술사(解呪術師)?”
“네. 세간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륙을 유랑하는 소수 부족 중 대대로 해주술(解呪術)을 계승해 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사그 공작 가문과 마찬가지로, 혈족 위주가 아닌 고아들을 거둬 키운 부족이었다고 카밀로가 덧붙였다.
‘정말 괜찮은 부족이네.’
하지만 과거형이잖아. 그렇다는 건…….
“불행히도 부족 전체가 몰살당해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습니다.”
“뭐? 왜! 누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마탑주 엘리시어스.”
“…….”
마탑주라는 거물의 등장에 ‘그래도 생존자가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같은 희망이 한순간에 꺾였다.
“그자 말고는 해주술사 일족을 멸족시킬 악한이 또 누가 있을까요.”
카밀로는 몰살당한 일족을 애도하듯 한숨을 내쉬었고, 나도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마법사의 정점에 선 자로서 마법을 풀 수 있는 주술사 종족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마음으로 못마땅해하는 것을 넘어 정말로 제거하다니.
‘진짜 무섭다.’
이쯤 되면 재앙 아닌가.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에이드리안은 저 마탑주에게서 대체 어떻게 도망친 거야?
“그러니까, 어렵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카밀로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 이건 어렵다는 수준 같은 게 아니잖아.
‘왜 지금껏 네 번째 방법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나 싶더니, 아예 불가능한 일이어서 그랬군.’
해주술사라는 새로운 희망이 몇 초 가지도 않고 터지다니, 충격에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에이드리안도 알고 있어서, 해주석을 가져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던 걸까?”
내 중얼거림에 카밀로는 침묵했다.
해리스를 가이딩하는 대가로 에이드리안이 요구한 것은 총 세 가지다.
‘첫째, 해주석을 구해줄 것.’
그야 당연하지. 여기까진 별생각 없이 고개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째, 기한은 3개월 이내.’
3개월이라니!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냥 구하는 것만으로도 빡신 데 3개월?!
‘정확히 3개월 이내에 건국제가 열릴 거야. 거기에 참석하면 되겠지.’
그때 황제가 나타날 테니, 그 머리 위의 관을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람서스의 황제들은 건국제 같은 거창한 공식 행사가 아닌 이상 해주석이 박힌 제관을 굳이 쓰고 나오지 않았다.
‘사실상 그때 말고는 기회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막연히 ‘해주석을 구하자!’고 생각했던 때와 달리 구체적인 기한까지 정해진 퀘스트가 떨어지니 중압감이 엄청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주석을 빼돌리자마자 해리스 고드윈에게서 도망쳐.’
“…….”
제가 마지막은 조금 동의하기 힘든데요.
에이드리안은 한결같이 주장했다.
의심병자 해리스는 진실을 알게 되면 나를 죽일 거라고.
그러니 들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고.
당시 에이드리안이라는 존재감에 압도당한 난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 남아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그래도 해리스가 날 죽일 것 같진 같은데?’
아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해리스한테 해준 게 얼만데 겨우 가짜라는 게 들통났다고 진짜 죽이겠어?
‘배신하면, 죽인다.’
……진짜 죽이려나?
과거 해리스가 했던 말이 왜인지 확대해석되면서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긍정 회로를 돌렸다.
정말로 죽을 뻔했을 때도 어떻게 안 죽고 살아남았잖아? 그리고 그때보다 해리스와의 관계가 나아졌잖아? 그러니까…….
‘……더 배신감을 느끼려나?’
원래 생판 남보다 친구가 배신하면 더 개빡치고 치가 떨리게 마련이지.
그래서 커뮤니티에도 썰 올리고 박제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잠깐, 이 루트는 아니야. 불길한 생각은 그만!
‘젠장, 왜 점점 에이드리안이 맞말한다는 결론만 나오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냉철한 이성은 해리스와의 관계가 여기서 더 복잡해지기 전에 여기서 슬슬 선을 그어놓으라고 경고했다.
매일같이 문병 와주던 친구들이 점점 드문드문 오게 되고, 몇 명씩 빠지다 나중엔 아예 연락조차 되지 않게 되었던 때처럼.
‘이보다 더 바라면 다치게 될 거야.’
몸이든 마음이든, 어쩌면 둘 다.
“……요정.”
“네?”
“요정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 질문이 튀어나온 건 현실 도피였다. 크게 어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단 말이다.
“뭐라도 좋으니까…….”
“많아요.”
“아무거나 말해…… 응?”
“구전 설화부터 최신 마탑의 연구 결과까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뒤죽박죽인 머리를 식히기 위한 아무 가벼운 TMI를 듣고 싶었을 뿐인데, 뜻밖에 카밀로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조만간 제가 보기 좋게 보고서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응? 아니, 그렇게까지 전문적으로 할 필요는 없…….”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해리스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온, 온갖 금은보화가 번쩍이는 동관의 수장고(收藏庫). 방금만 해도 내가 도망칠 것을 대비해 이것저것 챙기던 카밀로는,
“……는데?”
어느덧 사라졌다.
‘과, 과연. 이게 정보 길드의 수장이 가진 은닉 스킬……?’
놀라워요. 놀라운데, 왜 이렇게 갑자기?
“제이드.”
아, 뒤에서 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깨달았다. 이래서구나!
‘어라, 나는 왜 못 알아차렸지?’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도 해리스는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고, 나는 힘을 숨겼던 카밀로도 본능적으로 잡아챌 정도로 예민한 편인데.
“해리스 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매가 흐물흐물해진다. 추위에 시달리던 몸이 따뜻한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긴장하던 신경이 느슨해졌…….
“방금 너 이외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다가 말았다. 아니, 그건 또 어떻게 들은 거야? 이 귀신 같은 놈!
카밀로의 정체나 그녀와 나의 꿍꿍이가 들키면 망한다는 직감에 나는 황급히 둘러댔다.
“호, 혼잣말이었어요.”
“혼잣말?”
“네. 제가 혼잣말을 워낙 많이 하잖아요, 아하하…….”
“흐음.”
해리스가 붉은 눈을 곱게 접었다.
분명 넋이 빠질 듯 매혹적인 얼굴인데도, 나는 왠지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가 읽히는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쳐.”
그렇다고 쳐줘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혼잣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지?”
“고, 곧 건국제도 있으니 여길 떠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챙길 것도 챙기고 구경도 할 겸 어쩌다…….”
“어쩌다 보니 도주할 때 처리하기 좋은, 환금성 높은 보석들 위주로 주워 담아버렸어?”
“…….”
해리스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말투도 침착한데, 왜인지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그냥 네 귀에 소리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다가 여기까지 발길이 닿은 것뿐이었거든!’
그러나 변호가 나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해리스 입에서 ‘도주’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설마 들킨 건가?’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산다고, 찔리는 게 있으니 괜히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숨 쉬는 것도 긴장되었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꺼내면서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우, 우연, 진짜 우연입…….”
“그래, 우연이라.”
해리스는 싱긋 웃었다.
“알겠어.”
“…….”
숨이 멎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듯 아름다운 웃음인데, 왜 내겐 죽기 직전 마지막 식사처럼 치명적으로 위험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불안했다. 대체 어디서 뭘 들킨 거니? 차라리 말해줘!
심장이 너무 세게 날뛰다 못해 입 밖으로 토해질 것 같다.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은 머리는 과부화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드.”
등 뒤에 벽이 닿아왔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해리스의 길쭉한 팔이 내가 곁눈질하던 경로를 막아버렸으니까.
‘이, 이것이 바로 전설의 벽치기?’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해리스 님…….”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려줘!
해리스는 혼이 빼앗길 정도로 유혹적인, 그래서 더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 결혼할 생각 있어?”
뇌 기능이 정지한 난 즉각적으로 답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