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드디어 오랜 기다림이 보답받는 날이 왔다.
친아버지, 고드윈 공작이 자신을 아들은커녕 인간 취급도 하지 않은 채 지하 감옥에 가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실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거기다 마탑까지.’
죄다 찢어 죽여버려도 모자랄 것들에게 더는 인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해리스가 무슨 흉악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선대 공작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 이것을 주마.”
흔히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선대 공작도 고드윈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이나 정작 나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이기로 했다.
“이젠 네 것이다.”
“……?”
해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은빛 반지였다.
상당히 심플해 보이는 외관이었으나, 겉보기와 달리 그 은반지는 고드윈에서도 손에 꼽는 보물이었다.
‘초대 고드윈과 혼인한 흑마법사가 직접 만들어 반려에게 선물했다는, 그리고 죽는 그날까지도 빼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귀물.’
일명, 속박의 반지.
‘딱 저놈 취향이지.’
그뿐만 아니라 이 반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해리스의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 귀물의 이름은 ‘속박의 반지’로,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가보다. 더할 나위 없이-”
“볼품없군요.”
전설이고 나발이고 모르는 해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보석도 금도 아니고, 심지어 얇아?”
“…….”
어릴 적부터 고드윈으로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해리스로선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그렇지 못한 선대 공작은 마음에 금이 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주, 중요한 건 마음이다. 그리고 은이 아니라 백금-”
“저 얇은 은반지로나 표현될 마음이면 별 볼 일 없어 보입니다만.”
“백금이라고.”
“그래 봤자 제대로 된 보석 하나 없는 건 똑같잖습니까.”
“있다! 안쪽에 촘촘히 박혀 있어서 안 보일 뿐이지……!”
“반지 안에나 박힐 보석? 얼마나 자잘한 보석을 쓴 겁니까?”
“…….”
이딴 게 가보냐고 되묻는 얼굴을 보며 선대 공작은 다시 한번 이마의 핏대를 눌렀다. 하여간 저놈은……!
‘대체 누구 때문이지.’
배반자 아이린과 폐륜아 노먼을 생각하니 뒷골마저 당겨왔다. 설마 내 핏줄에서부터 문제가?
“……각하, 설마 선대 공작 부인께도 이딴 걸 끼워드렸습니까?”
“이건 가드링(Guard ring)이다!”
마침내 남자의 자존심까지 건드려지자 선대 공작은 버럭 고함쳤다.
“청혼 반지는 당연히 그녀의 의사에 맞춰 새로 제작했지!”
“아. 그 정도 상식은 있으셨군요.”
저놈에게 상식을 지적받다니.
선대 공작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자식놈들부터 손주들까지 하나같이 자신을 늙게 만들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건국제에 참석해야 한다고.”
그냥 빨리 보내버리는 게 최선이겠군. 선대 공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 너도 적절한 반지를 준비해야지.”
“……?”
건국제와 반지의 연결점을 찾지 못한 해리스가 눈썹을 올릴 무렵, 선대 공작은 마음 정리를 마친 듯 차분히 말했다.
“결혼하거라, 해리스.”
상대는 정해두었다.
선대 공작의 통보에 해리스는 드물게 할 말을 잃고 물었다.
“예?”
* * *
“뭐?”
황녀, 엘티로사는 기겁한 얼굴로 외쳤다.
“누가 어디를 온다고?”
“……고드윈 공작의 아들, 해리스 고드윈이 이번 건국제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엘티로사 황녀의 시녀이자 뉴리엔 백작의 딸, 하로아는 황녀가 던진 찻물을 닦으며 답했다.
“말도 안 돼!”
정작 엘티로사 황녀의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해리스가 사악한 이능을 각성했으며 고드윈에서 쉬쉬하기 위해 유폐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다니!’
심지어 태자 오라버니가 직접 초대장을 보냈다니!
“고모님께서 일찍 작고하신 게 누구 때문인데, 고드윈 공작이 직접 유폐까지 한 그 괴물 새끼를 왜?!”
기가 막혀 소리치는 황녀에게 뉴리엔 백작 영애가 바른말을 했다.
“황녀님, 아무리 고드윈 소공작이 그런 처지였다 해도 이젠 선대 고드윈 공작이 직접 임명한 후계자입니다. 이제 그런 말은 삼가셔야…….”
“닥쳐!”
황녀는 뉴리엔 백작 영애에게 손찌검하며 고함쳤다.
“누가 착한 척하래? 내 개인 공간에서 이런 말 하나 못해?!”
개인 공간 아니잖아…….
하로아 뉴리엔은 화끈거리는 뺨을 움켜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재 엘티로사 황녀와 시녀들이 위치한 장소는 황실이 투자한 가이드 길드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최상류층만 머무는 공간이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지나가는 가이드가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큰 소리에 고개 돌려 수군거리는 인영들이 몇 보였다.
“엘티로사 황녀 아냐?”
“가이드도 아니면서 왜 또 여기서 패악을…….”
하지만 엘티로사 황녀는 태생부터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짧은 사람이었고,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을 맞닥뜨리면 폭력적으로 반응하곤 했다.
씩씩 흥분한 황녀의 손이 부들거렸다.
당장 저년의 머리채를 쥐고 뺨을 내려치며 마구 구타하고 싶었다.
‘안 돼.’
황녀에겐 불행히도, 상대는 뉴리엔 백작 가문의 딸이었다. 아무리 황녀라 해도 귀족을 대상으로 분풀이할 수는 없었다.
‘내가 황녀인데 왜!’
난 제국의 지고무상하신 폐하의 딸이야! 그런데 왜 내가 귀족놈들 따위의 눈치를 보아야 해-!
엘티로사 황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황실의 존엄이 드높아 귀족들 위에 압도적으로 군림했다던 과거라면. 황실에 이렇게 불손한 것들은 바로 목을 쳐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현재 황실의 권력은 그렇게 안정적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황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급의 신분 자체가 안전하지 않았다.
이능력자라는 집단이 출현했으니까.
본디 상류 계급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마탑뿐이었다. 자신의 연구와 힘에 미친 자들은 권력자들에게 쉽게 회유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고, 서로 나름대로 경계선을 그으며 상호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능력자가 나타나 버렸지.’
그리고 그들을 치유하고 정화하며, 진정시킬 수 있다는 ‘가이드’라는 존재도.
오랜 기간 수련하고 공부해야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마법사와 달리, 이능력자들은 ‘각성’이라는 형태로 즉각적인 힘을 얻는 자들이었다.
문명과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주어지는 힘, ‘이능’.
쉽사리 통제되지도, 어떠한 원리로 나타나는지도 알 수 없다. 인성도 지위도 부와 명예도 각성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저 신의 계시처럼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이며 절대적일 뿐.
기존의 공고하던 권력 구도와 질서는 이 압도적인 힘 앞에서 서서히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왜, 왜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거야-!’
엘티로사 황녀는 뿌리 깊은 이능 혐오자였다. 최상류 계급으로 태어난 그녀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혐오는 관심의 또 다른 말이라고, 그토록 이능력자를 멸시한다던 엘티로사 황녀는 누구보다 이능력자에 관심이 많았다.
“……알루카스는 어디 있지?”
특히, 한때 자신을 구했던 붉은 머리의 야성적인 용병왕에게.
그녀가 매일같이 가이드 길드에 쳐들어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 오늘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뉴리엔 백작 영애가 손찌검당한 것에 겁먹은 시녀들은 더듬더듬 근황을 가져다 바쳤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정보에 엘티로사 황녀는 분노를 터뜨렸다.
“……너지, 이번엔 너잖아!”
“꺄악!”
눈 뒤집힌 황녀는 지나가던, 가이드로 추정되는 인영를 잡고 발길질했다.
“화, 황녀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티, 티르안?!”
앞뒤 없는 패악질에 경악한 시녀들은 피해자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손톱으로 얼굴이 긁히기까지 한 상대는 현재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 티르안이었다.
이능력자와 가이드의 관계를 용사와 요정에 빗대어 낭만적으로 묘사한 오페라는, 대대적으로 성공했을 뿐만이 아니라 황실의 총애마저도 가져다주었다.
그로서 황도 소식지에서 ‘제일 호감 가는 가수 1위’로 손꼽히게 된 티르안이었지만,
“하! 너 잘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
“네가 우리 오라버니의 발바닥을 핥아 황궁 연회까지 기어들어 왔다는 그 벌레구나!”
“화, 황녀님!”
엘티로사 황녀가 화병을 휘두르려던 순간, 얻어맞던 티르안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 저도 용병왕 알루카스 님을 뵙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과연, 그 이름은 황녀의 폭행을 주춤하게 했다.
“……왜.”
“최근 들어선 이 가이드 길드에도 자주 오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네가 여기 죽치고 앉았으니까 그렇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했지만, 티르안의 입 밖으로 나온 건 예상외의 이야기였다.
“소문에 의하면, 고드윈 영지에서 어떤 가이드를 보았는데 마음을 빼앗기셨다고…….”
“누구! 그 개잡것은 대체 누구야?!”
황녀가 말한다기엔 믿을 수 없이 천박한 말투였으나, 그녀의 친모가 누군지 아는 이들은 그저 입 다물고 불안히 시선을 피했다.
티르안은 뺨이 얻어맞아 온통 벌겋고 가엾기 짝이 없는 꼴로 말했다.
“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귀한 분의 가이드라 알루카스 님께서도 차마 건드리지 못하셨다고…….”
“……!”
황녀의 얼굴이 차갑게 돌변했다.
고드윈에 갔다는 알루카스가 만날 법한, 그러면서도 신분의 한계로 손대지 못할 이능력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해리스 고드윈!
“감히, 그 더러운 괴물의 가이드가 내 알루카스에게 꼬리 쳤다고?”
쾅-!!
격분한 황녀는 구둣발 채 테이블을 걷어차며 난동을 피웠다.
그 틈을 타 슬며시 뒤로 빠진 티르안은, 역시나 손찌검당해 물러나 있던 뉴리엔 백작 영애를 지나치며 속삭였다.
“임무는 잘 이행했다고 태자 전하께 전해주십시오.”
뉴리엔 백작 영애는 그를 보지도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모든 건 계획대로다. 그녀는 다시 미친개 같은 황녀를 조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화, 황녀님! 제발 진정하세요. 제가 고드윈 소공작의 가이드가 누군지 알아 오겠습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