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불변점이 바뀌었다?”
황태자의 목소리에, 이민족을 난자하던 기사들의 칼날이 즉각적으로 멈추었다.
흐윽, 흡! 비명을 억누르는 신음과 흐느낌 사이로 섬뜩한 침묵이 돌았다.
“설명이 필요한데…….”
그 침묵을 깬 황태자는 정원의 잔혹한 학살과 어떠한 연관도 없다는 듯, 청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부드러운 얼굴에는 봄볕 같은 온화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말해보세요.”
그것이 더욱 두려웠다.
한때 사막 이민족의 성녀라 불리었던 여인은 이제 황태자의 광대로 전락해 있었다.
그녀는 동족들의 목숨을 구걸하듯 말했다.
“……전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예지몽은 제가 원하는 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이었다.
예언자는 자신이 보길 원해 미래를 보게 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녀의 꿈속으로 미래의 조각이 떨어진 것에 가까웠다.
그것도 자신이 속한 부족의 미래가 아닌, ‘에이드리안 터너’라는 사내의 미래가.
아름답지만 낯선 요정족 미인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당혹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당신은 누구이길래 이렇게 내 꿈에 나타나는가?’
그리고 왜 당신은, 항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가.
어떤 꿈에서 에이드리안은 비천한 노예였다. 이능력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가엾은 가이드였다.
다른 꿈에서 그는 지배자였다. 그를 착취했었던 이능력자들이 이번에는 그에게 가이딩을 받기 위해 구둣발이라도 핥으리만치 복종했다.
이토록 휙휙 바뀌는 꿈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건들이 있었다.
그것을 예언자는 불변점이라 여겼다.
디뮈아드 라예르가와 아이린 공녀의 죽음은 그 어떤 예지몽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바로 그 불변점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고드윈에서 일어난 소식을 들었을 때 예언자도 당황했다.
불변점이 바뀌었다니, 어떻게?
그 의문에 답하듯, 다음 날 그녀는 다시 꿈을 꾸었다.
“그건 사흘 전의 일일 텐데, 왜 이제 말하는 건가요?”
“수,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그녀가 꾼 꿈은, 미래가 아니었다.
“흐음?”
황태자는 손을 까딱여 시체와 이민족들을 치우게 했다.
피 냄새가 식물의 향기와 뒤엉키는 불길하고 아름다운 정원, 예언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꾼 꿈에서…….”
주인공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예민한 인상의 요정족 혼혈, 에이드리안 터너였다.
그러나 그 곁에는 무수한 예지몽 속,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벚꽃잎처럼 화사한 연분홍색 머리카락.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 요정족 혈통이 명백해 보이는 하얗고 자그마한 소녀.
‘누구지?’
소녀는 에이드리안과 친밀해 보이면서도 어색해 보였고, 본능적인 애정을 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을 쥐고 무어라 부탁하고 있었다.
예지몽은 기본적으로 꿈이다 보니, 어떠한 말은 들리고 어떤 말은 귀가 먹먹해진 듯 닿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부탁하는 건가, 의아해하던 예언자는 소녀 곁의 인영을 보고…….
‘윽!’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뒷걸음질 쳤다.
때로는 무의식이기에 더 잘 보이는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마음이나 이능, 선과 악 같은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것들.
그렇기에 예언자는 알 수 있었다.
소녀 곁에 있는 건 아주 확실한 악(惡)이라는 것을.
공간을 새까맣게 점령한, 불길하고 사악한 것. 차마 마주하기 두려운 재앙과도 같은 힘……!
‘해리스 고드윈!’
꿈이 깨진 것은 그때였다. 헐떡이며 깨어난 예언자는 깨달았다.
“제가 본 것은, 미래가 아닌 현재였어요.”
황태자가 계획한 고드윈 침략이 실패한 데에는 해리스 고드윈의 역할이 컸다.
그가 무리하게 힘을 쓰고 쓰러졌다는 소식은 예언자도 접한 뒤였다.
하지만,
‘미래를 보는 예언자가 현재를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알 수 없었던 예언자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엘워드는 분홍색 눈을 둥글게 휘었다. 부드럽고 호감이 가는 미소.
“저, 전 결코 고의로 이 일을 숨길 생각은…….”
그러나 정작 그 미소를 마주하는 예언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없었겠지요, 압니다.”
황태자는 자상한 태도로 겁먹은 예언자의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동자는 상대를 온화하게 응시했다.
“보고를 누락한 건 쉽사리 용서하기 힘들군요.”
“누락이, 아니……!”
예언자는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황태자는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술만 달싹였다.
“충고하지요. 꿈에 관하여, 그대는 생각하고 판단 내리지 마세요.”
그러나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예언자는 부들부들 떨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제게 보고하란 말입니다.”
“컥, 커억……!”
예언자의 눈에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맺혔다. 그 눈이 그대로 돌아가 버리기 직전,
“알겠습니까?”
황태자가 눈을 깜빡였다.
힘이 거두어졌다. 그러나 예언자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거칠게 헐떡이더니, 휘청이던 몸은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우당탕!
온실 바닥에 의자와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언자는 의식을 잃은 듯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알아들은 모양이군요.”
황태자는 굳이 그 추한 꼴을 내려다보지 않으며 답했다.
저 정도로 ‘교육’해 주었으니, 당분간은 반항할 생각도 안 하리라.
‘해리스 고드윈 곁, 요정족 혈통의 소녀라.’
당연하지만 엘워드 황태자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제이드 리안.
해리스 고드윈의 가이드이자 최근 리안 남작이 되었다는, 레디안 백작가에서 신분 세탁한 과거가 불분명한 소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해리스 고드윈은 ‘미래’의 주요한 인물이기에, 그를 둘러싼 변화와 주변 인물들은 주의 깊게 눈여겨보고 있었으니.
죽어야 하는 인물들은 살고, 나오지 말아야 하는 괴물은 탈옥했다.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이번 건국제는 즐겁겠어요.”
황태자는 꽃처럼 웃음을 틔웠다.
* * *
“그래서.”
해리스는 선대 공작이 가져온, 끔찍한 냄새가 풍기는 보양식을 비우며 말했다.
“진짜 왜 오셨습니까?”
“…….”
선대 공작은 말없이 해리스를 보았다. 새삼 그가 처음 저 인성 부족한 손자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드윈에 어떤 위험과 변수를 불러올지 몰라, 최대한 빨리 떠나주길 바랐었지.’
협상할 수 있는 부분까진 내어주고, 할 수 없는 부분은 싸워서라도 지키려 했다.
고드윈의 군주로서 이곳을 지켜야 했으니까.
선대 공작은 쓴웃음을 그렸다. 그래, 자신은 해리스를 손자가 아닌 천재지변이나 전염병처럼 대했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으니 지나가길 기다리기만 하는.
그러나 정작 고드윈을 몇 번이고 구해준 것은 빨리 떠나주기만을 바라던 친손주 해리스였고, 고드윈에다 재앙을 끌고 온 것은 신뢰하고 그리워하던 딸 아이린이었다.
모든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선대 공작은 그저 탄식했다.
갑작스러운 전투와 뒷수습까지 치르니 더는 분노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
한때 고드윈의 후계자였던, 그러나 이젠 고드윈의 죄인이 된 아이린에게.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
미리 말할 수도 있었다. 사정을 부탁할 수도 있었다.
딸로서 무릎 꿇고 빌어도, 라예르가 후작 가문의 주인으로서 협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그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그 일로 말이 새어 나갈까 봐 고드윈은 물론 자신에게까지 숨겼다.
‘너를 사랑하고 키워준, 그리하여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젖어 있던 고드윈의 모두를 어찌 이렇게 내팽개칠 수 있었느냔 말이다!’
그러나 선대 공작은 답을 듣기도 전에 알아차렸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애정도 부모에서 자식으로 내려가게 마련이다.
아이린은 더는 친아비를 포함한 고드윈 전체를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닌, 라예르가의 아이들을 더 귀하게 여겼을 뿐이다.
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그것이 설사 자신을 키워준 고드윈이라도 상관없었던 인면수심(人面獸心)한 인간이 되었을 뿐이다.
씁쓸한 슬픔과 뼈저린 비통함이 노인의 주름을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늙은 아버지의 통탄을 읽은 아이린은 고개를 들지도, 변명하지도 못했다.
그 모습에 선대 공작은 마음을 묶고 있던 끈 하나가 스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드윈의 군주였다. 그리고 하마터면 정에 눈이 멀어 고드윈을 끝장낼 뻔했다.
그리고 그 고드윈을, 다소 괴이하고 섬뜩한 방법이긴 하나 지켜준 것은…….
“뭡니까, 그 징그러운 눈빛은.”
“…….”
해리스였다.
젊은 손주는 여러 감정이 담긴 선대 공작의 눈빛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제이드까지 자리 비우게 하고선, 할 말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하라고.’
무언의 압박에 선대 공작은 솟아난 핏대를 짚었다.
하여간 저놈의 자식은 정말이지 고마움도 미안함도 오래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어!
“……라예르가 후작 부인의 일은 너도 대충 전해 들었겠지.”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등신도 아니고, 등장부터 개수작 부리는 게 뻔-”
“-그래서!”
큼, 기침으로 해리스의 말을 막으며 선대 공작은 말했다.
“그 일은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려 한다. 아무래도 네가 제일 큰 피해자니까 말이다.”
“…….”
피해자.
자신을 칭한다기엔 지나치게 낯선 단어였다.
해리스가 멈칫한 사이, 선대 공작이 화제를 옮겼다.
“자세한 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곧 수도에서 건국제가 열린다.”
“……!”
선대 공작과 해리스 모두, 이번 일의 사태가 근본적으로 누구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황실, 그리고 마탑.
그러나 그들은 고드윈의 항의와 증거에도 오리발을 내밀 뿐이었다.
현재 초토화된 구 고드윈 세력은 물론, 안주인과 후계자들이 묶인 라예르가도 그들을 정면 상대하지 못한다.
애초에 상대할 수 없어서 고드윈에 도망친 것이니까.
“고드윈의 후계자가 된 만큼, 너의 참석은 필수다. 황실에서도 네게 직접 초대장을 보냈더군.”
한마디로 이것은 적진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바라던 바야.’
해리스는 붉게 웃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