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90화 (90/119)

90화

그게 진짜 가이드의 가이딩이라는 거겠지.

제이드는 이틀 전의 가이딩을 회상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가장 큰 문제는 마력 회로야.”

세계관 공식 최강 가이드님답게, 에이드리안은 해리스의 손목을 잠시 짚은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문제를 앓고 있는지, 어쩌다 그런 증상이 생겼는지 알아차렸다.

“막 이능을 발현하는, 1차 각성 시기에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던 이능력자들이 주로 앓는 문제지.”

오염도 많군,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거기다 해리스 고드윈은 오랜 시간 마력을 억제당하기까지 했으니, 마력 회로가 꼬이지 않을 수가 없어.”

“그렇구나…….”

나는 에이드리안의 기세에 압도당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회로가 이 모양 이 꼴이니, 제대로 마력 순환을 할 수도 없었겠지. 어지간한 가이드로선 해결이 안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야.”

그렇다. 해리스의 문제는 또 그놈의 만악의 근원(노먼 고드윈) 때문이었다!

“그럼 혹시……?”

너한테도 어려운 건 아니지?

슬그머니 올려다본 시선에 에이드리안이 기가 찬 듯 ‘장난하냐?’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기억을 잃었다고 사람을 모지리 취급하네.”

“아니, 오해십니다. 천재 만재 에이드리안 오라버니께서 못하실 가이딩은 없…….”

“입에 발린 아첨은 됐고.”

에이드리안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소매를 걷었다.

“오랜만에 이 오빠 실력 좀 보여주지.”

‘오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 세계관에서, 가이드는 ‘가이딩’이라는 힘을 통해 이능력자의 오염된 힘을 정화하고 치유하여 폭주하는 이능력자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주로 접촉이었지.’

물론 파장 가이딩도 있지만, 접촉 가이딩이 더 효과적인 것은 정설이다. 접촉 면적이 넓어지고 다양해질수록 더 강력해지는 것도.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XX, 그런 짓을 하느니 혀 깨물고 죽을래.”

“안 돼, 죽지 마!”

내 다급한 얼굴에 에이드리안은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죽겠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건 머쓱해하는 얼굴이야.

‘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에이드리안을 ‘오빠’라는 관계에 넣기 어색해하는 것처럼, 그 또한 ‘기억을 잃은’ 나를 동생으로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데도 내 부탁을 들어주고, 내 걱정에 동요한다.

“…….”

나는 습관적으로 가슴팍 주변의 무언가를 움켜쥐려다 흠칫했다.

내가 동요할 때마다 만지작거렸던 돌멩이는 없다. 그 돌멩이는 이제 사람, 에이드리안이 되었으니까.

새삼 나는 생각보다 더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 인간이 된 그는 물론, 돌멩이였던 에이드리안에게도.

‘……기분이 이상하네.’

사실, 나는 에이드리안이 한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내키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가 내게 전적으로 진실만을 이야기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하게 유도하는 느낌이었단 말이지.’

그 느낌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불신과 경계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이드리안이 진정으로 내게 애정을 품고 있고 나를 어느 정도 위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순 없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잖아.”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에이드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미친 살인마 놈처럼 죽는 게 취미인 것도 아니고.”

“……그거 혹시 듀크 아인델타?”

“그래, 거기까진 기억하고 있- 너 설마 그 새끼도 만났냐?!”

“아, 아니.”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비록 대놓고 찍히기도 했고 내 주변을 스토킹하며 관음했다지만, 일단 직접 면대면으로 만난 건 아니니까!

‘왠지 사실대로 다 말하면 무지 혼낼 거 같다.’

직감대로인지 에이드리안은 듀크 아인델타의 이름만 꺼냈는데도 얼굴을 마구 구겼다.

“그래, 그 새끼는 진짜……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야.”

이미 엮였으면 하책인가요.

하지만 질문하기도 전에 에이드리안은 해리스에게 가이딩을 시도했고, 나는 입 닥치고 얌전히 그 옆에 쭈그려 앉아 대기했다.

주로 파장 가이딩 위주로 진행된 치유와 정화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무려 이틀이라는 장시간의 가이딩이 끝난 뒤,

“……이제, 얼추 됐- 쿨럭, 쿨럭!”

“오, 오빠?!”

에이드리안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런 얼굴로 각혈했다.

“대충 마무리됐…… 커헉!”

“알겠으니 말하지 마!”

그제야 떠올랐다. 에이드리안은 <시한부 천재의 S급 회귀 생활> 주인공이라는 것을.

즉, 돌멩이에 갇혀 증상이 심화되지 않았을 뿐 시한부인 상태인 건 여전하다는 뜻이다.

‘아직 병이 치유되지 못한 상황일 텐데……!’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난 얼른 그를 받아주려 일어났지만, 너무 오랫동안 쭈그린 몸은 쥐가 나서-

“-악!”

그대로 넘어졌다.

바닥에서 고개를 들던 난 에이드리안의 발끝이 사라지듯 점차 투명해져 가는 것을 발견했다.

“어, 어떻게……!”

“……힘을 썼으니, 당연하지.”

쿨럭, 파리해진 얼굴로 피를 토하던 에이드리안이 쓰게 웃었다.

“설마, 그런 요행으로 마탑주의 마법을 해주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거야?”

“믿었으니까 시도했지!”

그 순간 내 머리에 스친 것은, 에이드리안이 시간의 돌을 으깨버리던 장면이었다.

“……설마, 시간의 돌이 불량품이었어?!”

에이드리안은 묘하게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을 뿐이었다.

“난 약속을 지켰어, 제이드.”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해.

벙긋거리는 입술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닿기도 전에 에이드리안은 사라졌다.

* * *

‘그리고 다시 돌멩이가 되었지.’

제이드는 에이드리안(돌멩이)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시간의 돌로 에이드리안을 잠시나마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가 가이딩으로 힘을 다 소모하자마자 다시 돌멩이로 돌아가 버린 걸 테고.

‘왜일까?’

물론 시간의 돌이 전능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시천귀>에 나왔으니까.

시간의 돌로 회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에이드리안은, 가족들이 살해당하고 자신이 납치당하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길 빌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에이드리안은 납치당한 후의 시점에서 깨어났지.’

훗날 에이드리안은 기나긴 조사 끝에 알게 되었다.

제아무리 엄청난 S급 회귀 아이템이라고 해도, 세계의 의지가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사건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일명, 불변점(不變点).’

유감스럽게도, 에이드리안의 불변점은 눈앞에서 가족들이 살해당하는데 자신은 무력하게 납치당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내 불변점은, 에이드리안이 돌멩이가 되어버리는 바로 그 시점인 걸까?’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가짜 진정제인 자신이 진짜 가이드로 사칭하게 된 시작점이기도 했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이 세계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 * *

아름다운 온실의 화원.

갈색 머리카락의 청초한 미청년이 싱그럽게 피어난 꽃들 사이 앉아 있었다.

“졌군요.”

달칵,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 체스 말을 넘어뜨리며 말했다.

패배를 선언하면서도 청아한 미남은 열패감 하나 없이 웃었다.

“고드윈에 보낸 전력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휘어지는 분홍빛 홍채는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정도로 사근사근했고, 목소리도 나긋나긋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담은 말은 그렇지 못했다.

“마탑에서도 보낸 마법사의 사망 소식을 알렸으니, 완벽한 패배군요.”

그토록 엄청난 사태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자의 이름은 엘워드 데마크라 람서스.

람서스 제국의 황태자였다.

또한 라예르가의 디뮈아드를 노려 몇 번이고 라예르가와 고드윈을 들쑤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시도하고 실패했으면서도, 엘워드 황태자의 얼굴에는 낭패감 따윈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예상하셨던 바 아닙니까?”

황태자의 건너편에 앉은, 사막 이민족처럼 어두운 피부의 여인이 말했다.

“그래요, 예상한 일이지요.”

엘워드 황태자는 가볍게 웃으며 긍정했다.

“다만 의문이 들더군요.”

“…….”

“그대께서 말씀하신 ‘예지’대로라면 라예르가 후작 부인은 지금쯤 죽고 시체가 되어야 할 테고, 디뮈아드 라예르가 또한 반폐인이 되어 자살만 앞두고 있어야 마땅할 텐데…….”

여인은 침묵했다. 그러든 말든 엘워드 황태자는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두 사람 모두 멀쩡히 살아 있다니.”

물론 아주 멀쩡한 처지는 아니었다.

일단 라예르가 후작 부인, 아이린 공녀는 실질적으로 고드윈에서 폐적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까.

라예르가 후작이 어떻게든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선대 고드윈 공작과 협상하고 있다지만, 본디 아이린 공녀라는 이름으로 고드윈에서 가지고 있던 위상과 영향력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아이린 공녀에겐 그 이상의 충격은 없겠지.’

전성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온 친정 세력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다니.

“이상한 일이네요, 그렇죠?”

물론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공녀의 가치는 노먼 고드윈에게 패한 시점부터 하락했고, 현재 남은 것은 라예르가와 고드윈의 오작교이자 디뮈아드 라예르가의 어미라는 것뿐이었으니.

‘정확히는, 디뮈아드 라예르가에게 정신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지만.’

디뮈아드 라예르가는 아이린 공녀의 사망 이후 무조건 자살한다.

그것이 디뮈아드 라예르가의 불변점이었다. 이는 그가 디뮈아드를 손에 넣지 않는 한 최선의 결과였다.

다른 세력에게 흘러 들어가게 둘 수 없는 지나치게 위험한 힘이었으니.

‘얻으려 애써봤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엘워드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실패 자체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생존했다니.”

아이린 공녀의 죽음으로 디뮈아드 라예르가를 자살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예언자는 고개 숙여 사죄했다. 테이블 아래 주름진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지요.”

황태자는 여전히 따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기사들은 예언자와 함께 잡혀 온, 사막의 이민족들을 무릎 꿇리고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아아악!”

“서, 성녀님! 제발 살려주-!”

비명은 피로 끝맺어졌다.

아름다운 화원이 붉게 물들어 갔다. 동족의 죽음에 더는 침착한 시늉조차 할 수 없었던 예언자는 피를 토하듯 외쳤다.

“……불변점이 바뀌었습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