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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89화 (89/119)

89화

기가 막혔다.

제이드는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꿈을 꿔도 먹는 꿈을, 아니, 자신이 억지로 배 터질 때까지 먹이는 꿈이나 꾼단 말인가!

‘연회 때도 그랬지.’

잠시만 시선을 떼면 제이드는 어디선가 뭘 주워 먹는지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꿈에서 마저?

‘날 좋아한다며.’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해리스는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그런데 좋아한다는 남자가 꿈에 나오는데 기껏 꾸는 꿈이 그따위…….

“……?!”

해리스는 흠칫 굳었다.

졸면서도 안긴 자세가 불편했는지, 제이드는 부스럭부스럭 몸을 뒤척이다 로브만 걸친 해리스의 맨몸에 닿아왔다.

그것도 그냥 아무 신체 부위가 아닌 코어가 있는 복부였다. 살결 위로 제이드의 작고 말랑한 손이 느껴졌다.

“…….”

본래도 해리스는 타인의 접촉이나 스킨쉽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이드가, 가뜩이나 코어로 더욱 예민한 위치에 닿자 몸이 굳었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살짝 닿았다가, 나중엔 손바닥 전체가 도드라진 복근을 느릿하게 쓸어올리는 손길이…….

“……!!”

목덜미에서부터 귀 끝으로 열감이 서서히 올라왔다.

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힘이 틀어갔던 턱에 핏줄이 섰다.

이건, 오랜 수면에서 막 깨어난 사내에게 너무 지나친 자극이었다.

그러나 해리스는 밀어낼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못했다.

제이드가 자신에게 먼저 이렇게 스킨쉽한 적은 없었으니까.

물론 이전에도 뺨을 만져주거나 포옹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친애를 담은, 담백하고 건전한 스킨쉽이었다. 결코 이런 식으로는…….

“읏.”

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복근을 더듬던 부드러운 손길이 점차 위로 올라오더니,

“……우와.”

두툼해, 제이드는 웅얼거리며 해리스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다가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부비적거렸다.

고문이었다.

이 와중에 좋다는 듯 헤헷 웃기까지. 해리스는 열감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젠장.’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해리스는 어떻게든 이성을 차리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혀를 씹었다.

그러나 그것은 패착이었다.

시야가 차단되자 촉감이 더욱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상체 위로 닿아오는 따뜻하고 자극적인 무게, 도톰한 입술에서 내쉬는 숨결의 열기가 자신의 호흡에 얽혀든다.

한 사람은 새근새근 평화롭게 잠들어 있고, 다른 사람은 불온한 열기를 억지로 잠재우던 순간.

끼이익-!

문이 삐꺽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해리스는 즉각적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불쾌한 소음을 만든 새끼는,

“……죄, 죄송합니다!”

해리스가 빡쳐서 폭주할 줄 알고 도망치려던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와 사용인들이었다.

분명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는데, 제이드를 발견한 해리스의 감정 변화가 너무 빠르게 급락하여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숨 막히듯 긴장과 열감이 섞인 공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누, 눈 마주쳤어!’

‘끄아악! 우리 편 맞아? 사실은 적 아니야?!’

‘사, 사람 살려-!’

사람들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을 노려보는 해리스의 적안이 너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꺼져.”

다행히, 해리스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 순식간에 해리스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검은 힘이 구렁이처럼 그들의 다리 사이를 감아 죄다 문밖으로 내던졌다.

“으아아아-!”

그러나 비명이 메아리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쾅!

꾸벅꾸벅 졸던 제이드가 깬 것은 그 시점이었다.

“……으응?”

해리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다시피 잠든 그녀가 깨어나선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이전처럼, 자신을 보고 웃어줄까. 듣기만 해도 귀가 간지러워질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해리스 님’ 하고 부를까?

아니면, 또 엉뚱한 소리로 자신을 놀라게 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해리스는 기다렸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천천히 깜빡이며, 투명한 푸른 눈이 한가득 자신을 담을 때까지.

그렇게 깨어난 제이드는, 해리스를 인식하자마자…….

“으, 으아아아악?!”

비명을 내질렀다.

“…….”

여러모로 예상외의 기상이었다.

* * *

‘네가 왜 여기 있…… 아니,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제이드는 놀라 펄쩍 뛰었다. 당연했다. 두 손이 해리스의 가슴팍에 놓여 있었으니까!

왜, WHY, 어째서! 자신은 분명 멀쩡히 침대 바닥에서 졸고 있었을 텐데, 어쩌다 해리스 위로 올라와 이러고 있는 거란 말인가!

심지어 꿈도 해리스와 관련된 것이라 충격이 더했다.

꿈속 자신은 이상한 음식점에 들어와 있었는데, 고객은 그녀 하나뿐이었고 요리사는 해리스였다.

에이드리안의 ‘너 해리스 고드윈 마력 없이 못 살아’라는 폭로를 듣고 난 뒤에 꾼 꿈이라 그랬을까?

꿈속의 해리스는 자신의 마력을 백설기…… 아니, 흑설기로 만들어 회전 초밥집처럼 계속해서 대령했다.

끝없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흑설기 마력을 먹다 못해 토할 지경이었는데,

‘그, 그만-’

‘왜? 내 마력 먹고 싶어 했잖아.’

그러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잖아.

오싹하게 웃은 해리스가 기어코 흑설기를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사람 살려……!’

웃긴 건 그렇게 처먹고도 또 넣으니까 음냐음냐 소화해 낸 자신이었다. 돼진가?

“하.”

막 깨어나 정신이 없는 제이드와 달리, 해리스는 기가 막혀 입술을 비틀었다.

“날 보자마자 소리를 질러?”

“네? 네…… 아니, 제가 너무 놀라서!”

“꿈에서는 강제로 처먹이는 개새끼를 만들더니, 깨어나서는 무슨 파렴치한 대하듯 소리를 질러?!”

해리스는 벌게진 눈으로 고함쳤다.

“아, 아니, 파렴치한으로 대한 적 없……!”

“정작 실컷 더듬은 게 누군데!”

“네?! 아니, 전 해리스 님을 더듬으려 하지 않았어요!”

제이드는 기겁해서 변호했다. 그러자 해리스의 안색이 돌변했다.

“……날 더듬으려 했던 게 아니야?”

“네, 네! 제가 졸다가 정신이 없어서…….”

“그럼 어느 새끼야.”

“꿈을 꾸다가 그만…… 네?”

방금 뭐라고? 제이드는 멍하니 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나 말고, 어느 XX 새끼를 더듬으려 한 거냐고.”

처음에는 왈칵 화를 내던 해리스의 얼굴은 차분하다 못해 심해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고, 목소리마저도 목을 긁듯 낮아진 상태였다.

“왜 말이 없지?”

거기에 휘어진 입꼬리까지.

‘빠, 빡쳤다.’

우리 해리스, 엄청 빡쳤다!

왜인지 점점 나빠지는 것만 같은 상황에 제이드는 정신없이 변명했다.

“어, 어느 놈이라고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었는데…….”

그냥 비몽사몽한 와중에 ‘와, 몸 개좋다. 단단하고 두툼해~’ 하고 꿈인 줄 알고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그래?”

“네, 네. 결코! 해리스 님이 아닌 누군가를 특정한 게 아니라-!”

“나만 아니면 다 좋다?”

“…….”

제이드 얼굴이 하얘졌다. 아니, 그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거야!

이쯤 되니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 살려 주세요.”

그래서인지 본능에 충실한 말이 나왔다.

해리스는 하, 눈가를 찡그리며 웃음을 토했다.

“살려줘? 대체 어느 새끼를 생각했길래 내가 죽일 거라고까지 예상하지?”

“아니, 왜 말이 그렇게 해석되는……? 아뇨, 그냥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어버버 변명하던 제이드는 살벌한 해리스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항복했다.

“뭘 잘못했는데.”

“…….”

뭐지, 노답 커플들의 대화로 자주 들어본 것만 같은 이 레퍼토리는?

“뭘 잘못했냐고, 제이드.”

모르겠다.

그냥 정신 차리니까 몸은 해리스 더듬고 있고 해리스는 더듬으며 왜 자기 생각 안 했냐고 화낸다.

‘정신 차리고 생각해도 돌아버린 상황 같은데 여기서 뭘 어떻게 잘잘못을 가리라는 거지?’

제이드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나던 순간,

똑똑-

문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외부의 소리에 제이드는 소금 맞은 개구리처럼 펄떡 뛰었다.

해리스는 그런 개구리 제이드의 정수리를 턱으로 누르며 문밖의 방해꾼을 서늘히 응시했다.

‘또 어느 새끼야.’

왜 이렇게 제이드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는 새끼들이 많지? 곱게 꺼지게 해서는 말이 안 들리나.

그럼 거칠게 알려줘야겠지.

새빨간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뜩였다. 해리스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검은 힘이 우글우글 문가를 향해 뻗어 나가려던 찰나였다

“해리스, 깨어났다고 들었다.”

선대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노쇠한 공작의 목소리에는 옅은 걱정이 담겨 있어서일까, 촉수처럼 까만 이능의 힘이 잠시 멈칫했다.

“가, 각하께서 오셨네요!”

제이드도 쏙,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몰아내겠다는 듯 호들갑 떨었다.

“해리스 님이 나아지셨다는 걸 듣자마자 바로 오신 건가 봐요! 제가 얼른 가서…….”

“꺼지라고 전해.”

“…….”

* * *

물론 제이드는 선대 공작에게 꺼지라 하진 않았다.

“해리스!”

문병 선물(보양식)을 들고 온 선대 공작이 해리스에게 다가왔다.

요사이 여러 일이 있어서인지, 늘 강건하기만 하던 선대 공작은 훅 늙은 기색이었다.

“괜찮으냐? 아직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게야?”

선대 공작은 며칠 만에 보는 손자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의 진심 어린 염려에 해리스도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답했다.

“왜 오셨습니까.”

“…….”

선대 공작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성 나오는 거 보니 멀쩡해졌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쓰러져서 몹시 걱정했…….”

“왜 오셨냐고.”

“……지만, 이렇게 무사히 회복한 걸 보니 정말 마음이 놓이는군.”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대화지만, 왠지 제이드는 이가 부득 갈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뭐, 라예르가와 아이린 공녀의 일 생각하면 해리스가 저렇게 삐딱하게 나올 법도 하지.’

제이드는 서로 자기 말만 하는 집단적 독백의 현장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리고 닫힌 문에 기대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에이드리안은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이젠 자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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