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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88화 (88/119)

88화

그러나 그의 흰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감긴 눈꺼풀은 멋대로 떨려왔다.

‘……해리스 고드윈은, 위험해.’

그것은 꿈속의 목소리.

의식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토막토막 잘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가짜 진정제, 2차 각성…….’

도리어 몇 가지 단어는 증폭되어 들리더니,

‘……가이드…… 도망쳐야 해.’

도망칠 거야.

그 마지막 말만큼은 노예의 낙인처럼 선명히 그의 뇌리에 박혀왔다. 그리고.

“……!”

훅, 의식이 깨어났다.

해리스의 육신은 경련하고 있었다. 막 깨어난 정신도 멀쩡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도망친다고?’

누가? 해리스의 머릿속은 하나의 생각만으로 가득했고, 답은 빠르게 나왔다.

‘제이드.’

본능적으로, 해리스는 인지했다. 꿈이 경고하는 대상은 제이드였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도망칠지도 모른다.

어떠한 사실적 뒷받침도 없는, 직감의 경고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 경고를 무시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되었던가.

“읏…….”

이젠 상흔도 희미해진 손목에서 억제구의 고통이 찌르듯 울려오는 것 같았다.

“쿨럭, 컥! 커헉-!”

해리스는 다시금 역류하는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끓어올랐다.

“소, 소공작님이 깨어나셨다!”

“소공작님?!”

문이 열리며 나타난 인간들로 공간이 어수선해졌다.

고드윈의 사용인들과 해리스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였다.

일주일째 깨어나지 않았던 해리스가 드디어 의식을 차렸다!

그동안 엉망진창이 된 고드윈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해리스를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고드윈에 쳐들어온 것이 마탑과 황실이라는 엄청난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턴, 그들조차 막아낸 해리스에게 존경심은 물론 자긍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역시 선대 공작님께선 옳으셨다!’

만약 각하께서 해리스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때 벌어질 사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 되든 구 고드윈 세력은 박살 나고 고드윈의 모든 것은 폐륜아 노먼이 차지하겠지. 그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해리스가 쓴 이능의 힘이 괴이하고 공포스럽긴 하지만…… 그건 구 고드윈 세력인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두렵진 않았다.

급격히 태세 전환을 한 구 고드윈 세력은 어서 해리스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싶어 안달 난 상태였다.

본래부터 해리스를 지지하던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는 가증스럽다고 여기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주인께는 좋은 일이었다.

‘다시는 연회 때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겠지.’

그렇게 침실 안의 깨어난 소리에 안도하며 다급히 들어선 이들은,

“소공작님, 드디어 깨어나셨다니 정말 다행-?!”

흠칫 굳어졌다.

핏기로 얼룩진 해리스의 붉은 입가와 핏발이 선 선홍빛 눈동자가 그들을 마주해 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피로 물든 손끝과 살이 터진 손목까지.

“……!”

악귀 같은 몰골에 좌중이 흠칫 굳었다. 아니, 어째서 기절했다 깨어난 사람이 저렇게 흉악한 모습이란 말인가!

섬뜩한 적안이 자신들 하나하나 훑어오자 무섭다 못해 영혼까지 오싹해졌다.

그러나 정작 그 악귀, 해리스는 좌중이 무어라 반응하든 관심 따위 없었다.

저 인영들 사이에도 제이드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 곁에 있던, 아픈 자신을 치유해 주던 가이드가 없었다!

“……제이드.”

나지막한 목소리는 무섭도록 침착했다.

슥-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는 해리스는 겉보기엔 정상적으로 보였다.

“제이드, 어디 있어?”

하지만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는 완전히 돌아 있었다.

제이드가 없다. 왜 없지? 왜 사라졌지? 왜, 자신에게서 도망친 거지……?

‘배신하면, 죽이겠다고 했는데.’

죽여서라도 자신 곁에 못 박아두겠다고 경고했는데. 그 협박도 경고도 무시하고 도망쳤다고?

‘왜?’

자신이 새삼 끔찍해서? 괴이한 이능이 두려워서?

‘하지만 그때는 안아줬잖아, 괜찮았던 거잖아. 나를 위해 화까지 내줬잖아……!’

배신감과 분노가 심장을 벌겋게 지졌다. 그 어떤 물리적 고통보다도 아파 숨이 가빴다.

그러나 희번덕하게 돌아간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손에 쥐면 부러질까 조심스레 제이드를 대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자신에게 감히 이런 행운이 찾아올 리 없다는 불안이.

언젠가 제이드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가 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죽이겠다는 협박은,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의 말로였다. 어린아이가 애정을 갈구하고 악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리석었다.

정말로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가둬 버려야 하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알려준 교훈이었다. 누군가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치지 않으려면, 세게 움켜쥐어야 한다는.

그렇게 움켜쥐이다 못해 억눌린 채 일생을 살아왔던 해리스로선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선택지이기도 했다.

‘그래, 선택.’

해리스는 피에 젖은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고 했지.

그렇게 보자면, 제이드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 건 그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제이드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충분히 자신의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

감금.

제이드를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오직 자신과 그녀만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에, 서로를 함께 가두고 서로가 서로의 간수이자 죄인이 되는 것이다……!

아, 해리스의 입꼬리는 더욱 짙게 휘어졌다. 달콤한 과실을 떠올린 듯 입안에 침이 고였고 혀가 당겼다.

그래, 제이드.

네가 나를 두고 떠났으니, 기어코 날 배신하고 도망쳤으니 서로가 서로의 감옥이 되도록 하자.

함께 나락에 떨어져 우리만의 낙원을 만드는 거야.

그렇게 해리스가 광기 어린 생각에 젖어가던 무렵,

“……소, 소공작님?”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는 약간 얼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지만, 제이드 님께선 바로 옆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뭐?”

순간 흉흉하던 기운이 일시에 정지했다.

야니스의 말에 정신 차린 해리스는 그의 떨리는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보았다.

대대로 고드윈의 소공작이 써왔다는 침실, 커다랗고 높은 침대에는 금과 은으로 자수를 놓은 비단 캐노피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으, 으으…….”

침대 옆 바닥에 다람쥐처럼 작게 웅크린 채, 캐노피를 이불인 양 몸에 돌돌 만 제이드가 있었다.

“추, 추워…….”

두 눈을 꼭 감은 채, 잘게 떠는 몸으로 웅얼웅얼 잠꼬대하면서.

“…….”

천 년의 배신감도 잠재워질 만큼 불쌍한 모습이었다. 아니, 대체 왜 저기에?

해리스는 말문이 막혀 그녀를 멍하니 보았다. 손끝까지 뻗어가던 광기 어린 분노가 일시에 사그라들며 살벌하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황당함과 당혹감이었다.

“아, 아마 소공작님을 내내 가이딩, 아니, 간병하시다 잠시 졸게 되신 모양입니다.”

야니스가 답했다.

해리스는 일주일 가까이 깨어나지 못했고, 그동안 그를 보살핀 것은 제이드였다.

해리스의 절대 안정을 주장하며 사람들이 얼씬도 못 하게 만들며 모든 것을 손수 했다.

‘기특하기도 하지!’

구 고드윈 세력은 선대 공작에 대한 충성심으로 아직도 노먼 고드윈을 패륜아라 배척하는 족속들이었다.

즉, 충성과 헌신은 그들의 근본이며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였다.

그러니 제이드처럼 말갛고 작은 아이가 그들의 새로운 주인, 해리스에게 저토록 열과 성을 다하다니! 기특하다 못해 마음이 찡했다.

“……래서, 어찌나 열심이시던지요. 소공작님께선 정말이지 훌륭한 가이드를 두셨습니다.”

이렇게 대신 그녀의 행적을 말하며 변호해 줄 정도로.

“…….”

해리스는 말없이 제이드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제이드가 가이딩했구나.’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몸이 이토록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제이드가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눈이 돌아가 버렸던 자신은,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날뛸 뻔했다.

이렇게 얌전히 자고 있던 제이드를 찾지도 못하고서.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짧게 한숨을 쉰 해리스는 피 묻지 않은 이불로 제이드를 돌돌 말아 자신 품에 안았다.

“으응…….”

그제야 잘게 떨던 몸이 진정했다.

그리고 그건, 미쳐 돌아가던 해리스의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옅게 다가오는 향.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연분홍색 곱슬머리.

제이드를 품에 꼭 끌어안자, 광기가 진정하듯 가라앉고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간병하고 가이딩하다가, 이렇게 지쳐서 제대로 눕지도 못한 꼴로 졸아버린 제이드.

그녀가 자신을 두고 도망치거나, 배신하고 떠날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이 품에 안긴 온기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럼, 꿈의 그 목소리는 대체…….’

“……안 돼.”

품에 안긴 제이드가 울먹인 건 그때였다.

“하지 마. 해리스, 그만……!”

필사적으로, 겁에 질려 자신을 말리는 목소리.

“뭐가 안 돼.”

그에 간신히 진정되었던 해리스의 집착에 불이 들어왔다.

붉은 눈동자가 다시 짙은 광기로 물들고 중저음의 목소리는 살 떨리듯 낮았다.

“뭘 하지 말라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거야. 네 꿈에서 나는 또 무슨 흉악한 존재인 건데!

진정이 빨랐던 만큼 들끓는 것도 빨랐다.

‘왜, 왜 갑자기 저런…….’

‘아니, 왜 날 보는 게요! 내가 이능력자 족속들을 알겠소?’

‘아직 안 멀쩡해진 모양이지! 어, 어서 도망갑시다!’

이를 가는 해리스의 살벌한 얼굴에 야니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때였다.

“……불러.”

“뭐? 또 누굴 불러?”

적안이 형형하게 떠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해리스는 제이드가 꿈나라로 떠난 의식불명 상태라는 것도 잊고 고함쳤다.

“네가 나 말고 부를 사람이 또 누가-!”

“배, 배불러……. 더는 못 먹어……. 그, 그만-!”

훌쩍이던 제이드가 버둥거리며 입을 막다가, 이내 억지로 먹게 된 모양인지 체념적으로 꿀꺽 소리를 내었다.

“…….”

제이드가 자신을 가지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깨달은 해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른 의미로 이가 갈렸다. 얘는 꿈에서도 대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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