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물론 제이드는 도망치지 않았다.
“뭐?”
도리어 혼미하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정보가 너무나 많이 밀려들어 와 혼란스럽던 머리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도망가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드는 황당했다.
자신이 요정이라는 건…… 말하는 나무 다느렌 쿠세트와 에이드리안 두 사람(?)의 교차 검증으로 그러려니 한다고 치자.
그리고 각인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아예 말이 안 되진 않았다.
‘난 항상, 묘하게 에이드리안한테 약해지고 관대해졌으니까.’
그가 자신을 폭주하는 해리스에게 던진 뒤에도 그가 죽길 바라지 않았고, 무너지는 고성에서 마법사에게 잡혔다가 돌멩이가 되자 눈물이 났으니.
‘흠, 왜지? 살짝 언니가 생각나는 인상이긴 한데.’
K장녀였던 언니는 엄격했고, 집안일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동생에겐 툭하면 일방적으로 무엇을 하라 통보하곤 했다.
어렸을 땐 제멋대로 구는 거 같아서 짜증 나고 미웠지만, 아프고 나서부턴 혼자서 책임을 다 맡으면서도 약한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언니에게 미안해지고 약해졌다.
‘어쩌면 정말로 에이드리안을 보호자로 각인한 걸지도 몰라.’
이상한 일이지만, 에이드리안이 남 같지 않았다. 언니가 겹쳐 보였다.
‘생각해 보면 빙의 초반, 그를 언니라 착각한 적도 있었지.’
어떻게든 에이드리안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도,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드리안이 죽길 바라지 않는 것도 그렇게 보면 납득이 된다.
또한 가이드가 아니라는 말도, 흡성대법을 맞췄으니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봐도 그게 가이드의 스킬 같진 않으니까…….’
하지만 기억을 ‘또’ 잃었다는 것. 그가 시간의 돌을 쓰레기처럼 부숴버렸다는 것, 그리고 갑자기 해리스에게서 도망치라고 한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다 보니 이젠 놀라운 차원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 에이드리안-”
“오빠.”
“…….”
저 오빠충……. 혼란스러워하던 제이드의 눈이 짜게 식었다.
생각해 보니 언니도 내가 ‘야, 안 제나!’ 하고 소리 지르면 ‘언니라고 안 불러?!’ 하고 이불에 말아 팼지.
병약해지기 전 자매 싸움이 훅 떠오른 제이드는 곧장 굽신거렸다.
“예에, 오빠님? 말씀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만.”
“그렇겠지. 뭐 기억 나는 게 없을 테니.”
“…….”
에이드리안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골적으로 바보 취급하는 얼굴에 약간 짜증이 밀려왔다.
“왜 도망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갑자기 왜…….”
“첫째로 넌 해리스의 가이드가 아니며, 도리어 그의 마력을 이용한 사기꾼이기 때문이지.”
“뭐, 뭐?”
“의심 많고 배신자에게 잔혹한 해리스 고드윈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제이드는 곧장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
자신이 해리스에게 해준 것들. 그와 자신이 함께한 시간과 신뢰, 어쩌면 애정일지도 모르는 우정…….
‘제이드.’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다정히 내려다보던 붉은 눈동자와 함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네가 그의 가이드라는 기본 전제에서 시작된 거지.”
“…….”
“과연 해리스 고드윈이, 네가 자신을 처음부터 기만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너를 이전처럼 대할 거 같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처음, 나는 해리스에게 분명 가이드가 아니라고 말했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만이 아니라 할 수 있나?’
자신은 에이드리안의 파장을 이용해 몇 번이고 가이딩했었다. 처음은 착각이었다지만, 자신이 그 착각을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
제이드는 반박할 수 없었다.
기억 속 해리스가 자신을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아니, 사실은 죽여 버리겠다고 한 말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고, 아예 인사말처럼 꾸준히 들었지.’
가장 최근에 들은 게 몇 주 전, 연회의 밤이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말대로, 자신은 결과적으로 정말 해리스를 배신해 버렸다. 현실을 깨달은 제이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해리스가 과연 진실을 알아도 나를 용서할까?’
제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의심 많은 해리스. 아무리 그를 위해 나섰어도, 끝내 자신에게 배신하면 죽이겠다고 말했던 해리스.
그런 해리스가 과연, 고의로 그를 기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까?
이전처럼 다감한 눈빛으로, 신뢰가 담긴 목소리로 나를 보아줄까.
‘……무서워.’
확신할 수 없어서, 무섭다.
너무나 자주 들은 살해 협박과 경고가, 지하 감옥에서 자신을 몇 번이고 죽이려 했던 잔혹하고 무심하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믿고 싶었다. 그가 ‘믿어보겠다’고 했던 것처럼.
하지만 마음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품었고, 확신할 수 없는 미래는 제이드에게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 그래도…….”
제이드는 떨리는 눈동자로 에이드리안을 보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말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감정적인 문제는 따로였다.
“도망치고 싶지 않아.”
어리석다고 해도, 해리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는 나날이 좋았다. 자신 앞에서 살짝 부드러워지던 중저음의 목소리가, 무심하던 적안이 가끔 휘어지는 모습이 기뻤다.
‘이대로 계속 함께 있고 싶어.’
철없는 아이의 꿈처럼, 제이드는 그렇게 소망했다.
그를 알아차린 에이드리안의 눈빛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또…….’
하지만 제이드는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떠나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든 희망을 잡고자 버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지금껏 해리스 곁에서…….”
“그의 도움이 되어주고, 가짜 가이드 노릇도 무난히 해왔다?”
에이드리안은 한숨과 함께 제이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제이드, 그건 내 힘을 이용해서 가능했던 거잖아.”
“…….”
다정한 손길과 상반되는 가차 없는 말투에 제이드는 숨이 멎었다.
딱하다는 듯 혀를 찬 에이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쩌면 네가 해리스 고드윈 곁에서 가짜 진정제 노릇을 하고 살 수도 있겠지.”
그가 내뱉은 것은 희망이었다.
“해리스 고드윈이 폭주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그가 보유한 마력량이 너무, 지나치다 못해 위험할 정도로 많다는 것도 있으니까.”
“…….”
“그러니, 네 흡성대법이 아주 도움 되지 않는 건 아닐 거야.”
그 말에 떠오른 것은 언노운 던전에서의 해리스와 했던 짙은 입맞춤. 그리고 접촉으로 검게 물들던 자신의 손이었다.
‘그래서 해리스가 진정되었던 거구나.’
과도하게 많은 마력을 내가 흡수해서. 그래서 이능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던 거야.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안도할 법한 이야기에도 제이드의 눈은 희망이 아닌 불안으로 흔들렸다.
에이드리안이 희망적인 진실을 말했기에, 더더욱 그의 말이 거짓이라 부정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가 정상적으로 각성한 이능력자일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알잖아.”
에이드리안은 제이드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해리스 고드윈의 각성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그래, 알고 있었다. <시천귀>로 보았으니.
막 각성한 어렸던 해리스가 어떠한 보살핌도 없이 고드윈 공작놈 때문에, 공작저 지하에 갇혀 버렸었던 것을.
“어렸던 그가 1차 각성 때 살아남은 건 천운에 가까운 일…… 아니, 천하의 불행한 일이겠지. 결국 고대 마수, 공허에게 걸려 버렸으니까.”
그 말대로, 공허의 이능을 타고나게 된 것은 결코 행운이라 볼 수 없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그 힘은 지나치게 위험했으니까.
“처음을 정상적으로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2차 각성 때의 위험은 더욱 커질 거야.”
말하지 마. 제이드는 입술을 떼지 못하며 외쳤다.
“그리고 그때는, 너 같은 가짜 진정제로는 해결할 수 없어.”
말하지 마-!
제이드의 소리 없는 비명을 들었으면서도, 에이드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해리스 고드윈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2차 각성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제대로 된 가이딩이 필요-”
“-그만해!”
제이드는 에이드리안을 밀쳐냈다.
“충분히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해…….”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가여워라.
에이드리안은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제이드는 그를 피하듯 고개 돌렸다.
“그래서.”
체념적으로 가라앉은, 현실을 받아들인 목소리.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당장은 떠날 수 없어.”
투명한 청안은 붉게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는 듯 명료히 빛냈다.
“해리스에겐 가이딩이 필요해, 에이드리안.”
“-오빠.”
“…….”
잠시 흔들렸지만.
“제이, 너 자꾸 말 깔래?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자, 잘못했습니다.”
엉겁결에 사과한 제이드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래. 오빠가 말한 대로라면, 더더욱 해리스를 저대로 두고 떠날 수 없어.”
지금의 해리스가 이토록 깨어나지 못하는 게, 에이드리안 말대로 2차 각성을 앞둔 징조라면 더더욱 그랬다.
“약속해 줘, 오빠.”
제이드는 본디 협상하려 했다.
어떻게든 에이드리안에게 해리스를 가이딩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그를 마법에서 꺼내고 시간의 돌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패는 모조리 박살 나버렸다.
‘그 대신,’
제이드는 허공에 뜬 에이드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
제이드의 자발적인 접촉에 에이드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커졌다.
“지금 해리스를 가이딩해 주겠다고.”
남은 하나, 자신이 정말로 에이드리안의 동생이라는 가능성에 모든 것을 베팅하듯 제이드는 호소했다.
“2차 각성은 물론, 앞으로도 그가 가이딩이 필요할 때마다 나서겠다고…….”
내가 왜, 하고 말하려던 에이드리안은 간절히 자신을 응시하는 제이드의 푸른 눈동자에 침묵했다.
“제발, 약속해 줘.”
부탁이야…….
한참 후,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알겠다’고 답했다.
“대신.”
* * *
해리스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