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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86화 (86/119)

86화

너무나 순조로운 진행에 심장이 크게 쿵쿵 뛰었다.

해주석 찾겠다고 개고생하며 계획을 세운 것에 비해, 이 ‘시간의 돌’로 인한 꼼수는 너무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떻게든 에이드리안을 구했다는 안도감이나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더 크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불안하게 한 것은, <시천귀>에서 묘사되는 ‘시간의 돌’과 내가 본 실물이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겉은 거무튀튀하지만,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선홍빛으로 붉게 번뜩인다고 했지.’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하지만 내가 본 ‘시간의 돌’은 거무튀튀함이 압도적으로 많고 붉은 색상은 한참 찾아야 겨우 보였다.

순간 그냥 아무 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가짜는 아닐 거야.’

카밀로가 보증한 것도 있지만, 가짜라면 마법진이 이렇게 반응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왜…….’

저렇게, 너무 많이 써버려서 닳아빠진 것처럼 되었을까.

“……됐습니다!”

카밀로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끊으며, 돌멩이를 감싼 마법진의 시간이 역행하는 게 보였다.

붉고 투명하던 홍옥이 점차 아기 고양이처럼 말랑한 실루엣으로, 고양이는 마침내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길게 늘어뜨린 짙은 분홍빛 머리카락. 희면서도 중성적으로 아름다운 얼굴. 푸르게도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떠지며 나를 응시하던 입술이 달싹인다.

“제이.”

마법진의 빛이 일시에 가라앉으며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보자 실감이 났다.

“……에이드리안!”

맙소사, 정말 그다.

에이드리안이 저 빌어먹을 돌멩이에서 정말로 벗어났다!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을 드디어 해주해 냈다는 사실에 압도되어서인지, 아니면 피와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 기력이 빨려서인지 우두커니 그를 응시했다.

“너.”

성큼, 다가온 에이드리안이 섬섬옥수와 같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오빠라 부르랬지.’

또 그거로 뭐라 하려나, 생각하며 눈을 깜빡이던 난 에이드리안의 이어진 말에 흠칫 굳었다.

“제정신이야? 해리스 고드윈의 마력을 흡수했으면 도망쳐야지, 왜 아직까지 여기서 뭉개고 있는 건데!”

……뭐?

내가 들은 타박이 믿기지 않아 입이 벌어졌다. 너 방금 뭐라고?

‘설마 에이드리안이 내 흡성대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야?’

해리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그 비밀을?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너무 충격적인 발언에 내가 굳어진 찰나,

“에이드리안 님……?”

카밀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제야 에이드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내게서 거둬졌다.

“카밀로.”

“저, 정말로 에이드리안 님이셨군요!”

하아, 에이드리안의 신경과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숨이 내쉬어졌다.

“역시, 카밀로 너였구나. 네가 제이드를 도왔던 거였어.”

“네? 네, 그렇습니다.”

놀라고 충격받은 카밀로와 달리, 에이드리안은 침착했다.

카밀로가 어쩌다 여기 있고 내게 합류한 건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지긋지긋한 마법에서 풀려났다는 기쁨조차도 엿보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안 님, 그동안 대체 어떻게 지내셨길래 그렇게……!”

“하지만 아무리 네가 있어도 벌써 해주석을 구하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나를 그 돌에서 꺼낸 거지?”

도리어 에이드리안은 냉담한 기색으로 곧장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네? 그건……,”

카밀로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곧장 답했다.

“제이드 님께서 ‘시간의 돌’이 가진 힘을 한정적으로 사용해 에이드리안 님을 그 마법에 걸리기 전 시간대로 돌려보자고…….”

“……시간의 돌?”

“네, 여기.”

카밀로는 에이드리안에게 이미 사용한 ‘시간의 돌’을 내밀었고, 에이드리안은 묘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회귀의 비밀을 응시했다.

‘과연.’

나는 에이드리안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시천귀>를 시작하게 해준 거나 다름없는 S급 아이템, 그가 복수귀로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원천이나 다름없는 ‘시간의 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이깟 것.”

“……!”

에이드리안은 차게 웃으며 시간의 돌을 으스러뜨릴 듯 꽉 쥐었다.

파사삭-

피아니스트처럼 유려한 손가락에 쥐어졌던 거무튀튀한 돌이 순식간에 먼지로 부스러졌다.

‘자, 잠깐!’

나는 믿기지 않아 눈을 부릅떴다.

주인공님, 회귀 아이템을 그렇게 개박살 내도 돼? 아니, 그보다 돌이 저렇게 쉽게 부숴 버릴 수 있는 거였어?!

내가 경악하든 말든 에이드리안은 아예 확인 사살을 하듯 손을 탁탁 털었다.

한때는 ‘시간의 돌’이라 불리던 S급 아이템이 먼지 부스러기가 되어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흔적만 남아 있던 <시천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암시하듯이…….

‘내 원작-!’

나는 허망함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에이드리안을 해주해 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해리스.’

최강의 가이드인 그가 부디 쓰러진 해리스를 가이딩해 주길 원해서.

이능력자를 혐오하는 에이드리안이 맨입으로 해주진 않을 테니, 나는 두 가지 패로 그와 협상하려 했었다.

첫째, 내가 그를 구했다는 것.

하지만 그건 에이드리안이 내 비밀, 흡성대법을 언급한 이상 그 사실을 물고 늘어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구해준 대가를 운운하기도 전에, 그가 내 비밀인 흡성대법을 폭로하겠다 협박하면 끝이니까.

‘그 대신 두 번째로는 시간의 돌을 주려고 했는데……!’

하하하, 그러기도 전에 먼지로 만들어버렸군요, 나의 주인공님……. 아무리 필요없다고 해도 너무하지 않으신가요?

‘이젠 어떻게 하지?’

주요한 패 두 가지를 모두 잃어버렸다.

어떻게든 해리스를 구해야 하는데. 잠든 나의 왕자님을 깨워야 하는데, 그를 가이딩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왜.”

그러나 정작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넌 왜, 나를 폭주하는 해리스한테 던진 거야?”

알고 싶었다.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더욱더.

‘정말 에이드리안은 ‘제이드’의 오빠인가?’

우리의 유사한 외형을 보면 그런 것 같은데,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탈출할 때 보인 모습은 정말로 가족 같은데…… 그런데도 납득가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그렇게 가차 없이 죽음으로 내던진 거지?’

결과적으로 살아남긴 했다.

하지만 그때의 해리스가 조금만 더 난폭했다면, 혹은 상대가 해리스가 아닌 다른 잔혹한 이능력자였다면 나는 그대로 폭주하는 이능의 힘에 휩쓸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남매가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를 죽이기 위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애증의 관계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뭐?”

에이드리안의 동공이 확장되고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난 순간이나마 에이드리안을 흔든 건가 기대했지만.

“너, 또 기억을 잃었구나.”

이어진 에이드리안의 말이 내 뒤통수를 갈겼다.

‘뭐라고?’

또, 기억을, 잃어?

세 가지 단어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인데 이해 가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남매가 맞나 확인하려 물었는데, 왜 또 다른 핵폭탄이 투하되어 버린 거죠?!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에이드리안 또한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통해 깨달았다.

놀랍게도, 에이드리안은 지금까지는 내게 제법 애정을 담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애정을 접어둔 에이드리안의 눈은 차마 마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조하다는 것도.

‘기억을 잃었다고 판단해서?’

기억을 잃은 나는, 에이드리안이 생각하는 동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얼굴로 보지 마, 제이드.”

짧은 한숨과 함께 에이드리안은 내 눈꺼풀을 손으로 덮었다.

마른 손바닥이 닿아오고 나서야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나 방금 진심으로 겁먹고 있었어.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내가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보길 바라지 않아.’

비록 기억을 잃은 동생이라지만, 그래도 애정의 편린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해리스를 구해줘.”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절박해진 난 그 사실에 매달려 에이드리안에게 구걸했다.

“해리, 해리스가 깨어나질 않아. 가이딩이 필요한 거 같은데, 나도 어떻게든 해보려 했는데, 도무지…….”

패닉하여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나와 시선을 맞추듯 쭈그려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작은 배려 때문일까, 나는 울먹거렸다.

사실은 무서웠다. 이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없어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리고…….

“그야 당연하지, 제이드.”

내 눈물을 닦아주는 에이드리안의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넌 가이드가 아니라 요정이잖아.”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내게 확인 사살을 갈기듯 말했다.

“그런 네가, 어떻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능력자 따위를 구하겠어?”

그것들을 이용하면 몰라.

* * *

에이드리안은 마탑의 실험체였고, ‘제이드’는 마탑의 실험으로 태어난 불완전한 요정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렸던 넌 나를 네 보호자로 각인했어.”

각인.

그것은 고대의 종족들에겐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의식이며, 주로 보호자나 피보호자, 그리고 반려에게 각인하게 된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태생적으로 근원에 가까운, 고대의 마력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마력을 줄 수 있는, 본래 각인 대상이자 보호자가 될 고대의 종족들은 멸족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다행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마력을 타고난 자가 하나 있었지.”

“……해리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고대 마수 ‘공허’의 주인. 해리스 말고는 누가 또 있을까.

“그래서 나를, 폭주하는 해리스한테 던졌던 거라고……?”

각인자인 자신이 줄 수 없는, 고대의 마력을 내가 섭취할 수 있도록?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타인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으니까.”

흡성대법.

에이드리안은 내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차원을 떠나 아예 이용하기까지 했다.

‘나를 위해?’

“그러니, 제이드,”

에이드리안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해리스를 보며 말했다.

“넌 최대한 빨리 저자에게서 도망쳐야 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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