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왜-!”
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아니, 왕자님처럼 얌전하고 아름답게 잠든 해리스의 기다란 속눈썹을 바라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루는 피로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틀도 너무 과로한 이들은 내내 잠들기도 한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사흘은!’
아무리 그래도 사흘은 진짜 좀 아니잖아!
“으~ 음,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러나 같은 이능력자, 카밀로는 태연했다.
“걱정 마세요, 제이드 님. 제이드 님께서 가이딩을 안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저러다 깨어나실 겁니다.”
“…….”
카밀로의 심각한 이능력자 안전 불감증 발언에도 나는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고백하자면 난 가이딩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니까!
‘솔직히 진짜 해보긴 했는지도 모르겠어.’
과거를 복기해 봐도 흡성대법한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
그리고 무협에서 흡성대법은, 힐링 정화 치유 스킬이 아닌 공격 스킬이었다.
‘어쩌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해리스가 쓰러진 뒤, 극심한 경계심이 생긴 난 사람들이 해리스의 침실에 방문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바깥에서 무어라 하건, 난 최소한의 시중만 처리한 뒤에는 곧장 사용인들도 내보내고 혼자 남아 해리스의 곁을 지켰다.
카밀로 덕분이었다.
시기적절하게 그녀를 포섭한 덕분에, 나는 안에 처박혀 안전히 경호 받고 시중을 받으면서도 고드윈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선대 공작님이 드디어 라예르가와 아이린 공녀의 계획을 낱낱이 알아내셨구나.’
외유를 떠났다는 선대 공작이 어떻게 그리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돌아왔겠는가?
바로 나와 해리스가 미리 언질한 덕분이었다.
‘아이린이 그럴 리가……!’
당연하지만 선대 공작은 우리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아이린 공녀의 행각이 수상쩍어도, 선대 공작에겐 하나뿐인 딸이었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하고, 먼 곳에 시집보내 고생하게 만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으셨지.’
어쨌거나 선대 공작은 해리스를 자신의 후계로 받아들였다.
이 사태에 흙탕물을 튀기고, 어쩌면 고드윈 전체에 위협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아이린 공녀를 더는 말로만 경고하실 순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대 공작은 아이린 공녀를 믿는 척 함정을 파고, 실제론 극단적 아이린 공녀 파를 이끌고 돌아오셨다.
그 결과 아이린 공녀를 지지하던, 사실상 추억팔이에 미쳤던 구 고드윈 세력들은 대거 탈덕한 뒤 안티로 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안티들이 이젠 해리스를 추앙하며 주인으로 모시고 싶다고 태세 전환하고 있다고.
‘웃기고 있네.’
죽어도 노먼 고드윈의 자식은 주인으로 못 모신다고 악을 쓰던 게 누군데?
나는 조소했다.
사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해리스가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아이린 공녀가 옳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모두 뺨 맞고 후회하며 해리스에게 다시 받아달라 매달리게 되었으니까.
‘이게 바로 후회 가족…… 아니, 후회 가문물인가.’
대망의 후회 파트가 왔다지만,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다. 그냥 씁쓸하기만 했다.
‘이래서 해리스는 고드윈에 무감했던 걸까?’
과거, 언제든 가문도 나도 버리겠다던 해리스의 목소리가 떠올라 나는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우리 해리스에게 너무 가혹하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자 더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카밀로에게 바깥 상황의 정보를 수집하라 한 것은.
‘카밀로를 잠시라도 내보내야 했으니까.’
솔직히 찔리는 게 너무 많아 차마 카밀로 앞에선 흡성대법을 시전할 수가 없었다.
포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기 친 거 뽀록 나면 곤란하다. 특히 해리스가 이렇게 의식불명 상태일 때는 더!
‘일단 흡성대법 자체가 이능력자들이 적대할 스킬이기도 해.’
그걸 아니 더 무서웠다. 설사 해리스가 추궁한다고 해도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무협에서도 흡성대법 쓴다고 하면 모두가 극도로 경계했다고!
그래서 난 카밀로가 자리 비울 때에만 해리스의 손을 잡고 흡성대법을 시도했다.
일단 이게 가이딩이 맞긴 한지 나도 모르겠지만, 저번에 언노운 던전 때는 해리스를 어떻게든 진정시켰으니까 어떻게든 되…….
‘……지 않네?’
그때, 언노운 던전 때처럼 범람하던 검은 마력이 체내로 물 밀려오듯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아예 조금도 흡수해 내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것이 해리스를 깨어나게 할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믿습니다, 에이드리안!
나는 목에 걸린 돌멩이를 풀어 해리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에이드리안(돌멩이)에게 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리의 최강 S급 가이드 에이드리안 님은 파장 가이드만으로도 해리스를 구해주실 수 있을 거야!’
보여줘, 너의 강력한 가이딩 파워!
“……쿨럭!”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해리스의 침대 위에 쓰러졌다.
‘이…… 이건 아니야.’
있는 힘껏 마력을 돌멩이(에이드리안)에게 불어넣었지만, 그리고 에이드리안(돌멩이)도 호응하듯 상당량의 파장을 뿜어냈지만…… 해리스가 깨어나는 데에는 턱도 없었다.
‘안색이 좀 더 나아진 것 같긴 해.’
그뿐이라 문제지…….
나는 해리스 곁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마력을 헐떡인 채 흡수하며 생각했다.
‘기어코 에이드리안의 파장 가이딩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태가 오고야 말았구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싶더니, 하필이면 최악의 상황에 찾아와 버렸다.
‘더는 내 임기응변으로 어떻게 때울 수 없어.’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해결책도 보였다.
‘에이드리안을 해방해야 해.’
<시천귀> 설정상 해리스는 본래도 가이딩을 잘 받지 않는 특이 체질인데, 어린 시절의 각성부터 오랜 세월 억제구를 차고 감금당한 까닭에 에이드리안 말고는 가이딩이 가능한 가이드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사실 에이드리안 외엔 가능한 가이드가 안 나온 거 보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나는, 어쩌면 해주석까지 가지 않더라도 에이드리안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템을 지금 가지고 있다.
‘S급 아이템, 시간의 돌!’
이는 해리스가 언노운 던전을 파괴하며 획득한 보상품 중 하나로, 이상한 부분에서 물욕이 적은 해리스가 통째로 내게 넘겨주었다.
<시천귀>에서는 이 아이템은 본디 언노운 던전을 해결했을 용병왕 알루카스가 소유했으며, 나중엔 에이드리안의 손에 들어가 그가 회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엄청난 아이템이 있는데 왜 진작에 안 썼냐고 물으신다면!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라고요. 사용 조건이 복잡하다고!’
그렇게 쓰기 쉬웠으면 <시천귀>에서도 알루카스 그놈이 곧장 썼겠지, 에이드리안 손에 들어가도록 놔뒀겠습니까?
즉, 이 ‘시간의 돌’을 사용하려면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했다.
“후으…….”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였지만, 더는 미룰 수 없어.
“카밀로.”
난 길게 심호흡한 뒤 카밀로를 불러 자리에 앉혔다.
“할 이야기가 있어.”
* * *
카밀로의 눈과 입이 커다래졌다.
“그러니까-!”
“네, 맞습니다.”
“저 홍옥이 사실-!”
“짜잔, 에이드리안입니다.”
“어쩌다가-!”
“마탑주 엘리시어스 때문에……. 카밀로도 그놈 인성 알죠?”
“갸아악!”
아무래도 진실을 밝히다 보니 자동적으로 말이 존대로 바뀌었다.
“……그래요, 그런 거였군요.”
약간의 기겁과 조금의 식겁 이후, 카밀로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왜인지 파장이 너무 흡사하다 싶더니……. 아예 본인이었구나.”
다행히 카밀로는 ‘그럼 네 정체는 대체 뭐냐’, ‘너 가이드 맞긴 하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주석을 구하기 어려우니 일단 ‘시간의 돌’을 써서 어떻게든 에이드리안 님이 마법에 걸리기 전으로 돌리려는 거군요.”
대신 쿨하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멋지다. 최고야.’
선대 공작도 그렇고 해리스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 세계관에서는 이 정도로 쿨해야 대빵이 되는 모양이다.
“네, 하지만 ‘시간의 돌’은 사용 조건이 있다고…….”
“조건이 까다롭긴 합니다.”
역시 카밀로, 정보 길드의 수장답게 척하면 척이었다.
“붉은 달이 떠오른 새벽의 밤, 가장 순수한 마력. 고대 종족의 피를 이은 자의 피와…….”
그 외 이것저것 중얼거리던 카밀로는 ‘……천운이군요. 당장 오늘 밤 가능합니다’ 하고 말했다.
“정말요?!”
“네.”
카밀로는 씩 웃었다.
“마침 적월의 밤이니까요. 그 외 준비물이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제가 이래 봬도 정보 길드의 주인인지라.”
“와, 진짜 너무 멋있다…….”
그리고 밤.
나는 붉은 달 아래에 마법진 앞에 섰다.
마법진 위엔 카밀로가 말한 온갖 귀한 준비물이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이르노니, 그대 간절한 이의 응답을 따라 시간을 돌려…….”
카밀로는 마법진 위에 무릎 꿇고 서서 제물을 바치며 주문을 읊었다.
‘카밀로 혼자 다 하네.’
혹시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조별 과제 무임승차?
‘아니다, 내 몫이 있긴 하지.’
고대 종족의 피.
<시천귀> 세계관에서 고대 종족이라 일컫는 존재는 요정과 드래곤 둘뿐이다.
‘에이드리안은 요정족 혼혈이라서 자신의 피를 뽑아 썼어.’
그리고 말하는 나무, 다느렌 쿠세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순수 요정일 테니 더 잘 먹히겠지.
나는 단검으로 손끝을 베어 피가 난 손을 그대로 마법진 위에 얹었다.
“읏……!”
피와 마력이 급격히 빨려가는 감각. 눈꺼풀이 떨리며 숨이 가빠졌다. 손이 마법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시간의 돌과 에이드리안(돌멩이)을 감싸며 돌아갔다.
“……!”
나는 돌멩이를 감싼 실루엣이 변하는 것을 보고 눈을 홉떴다.
드디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