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쓰러지는 해리스를 다급히 받아낸 제이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악!’
최소 190은 넘어 보이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는 자그마한 제이드가 받아내긴 너무 벅차, 무릎이 땅바닥에 빡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내 무릎!’
물리적인 고통에 해리스를 만나 안심하고 방심하던 육체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고 나서야 제이드는 깨달았다. 쓰러진 해리스의 몸은 그야말로 불덩이였다!
‘갑자기?!’
……아니야. 제이드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해리스는 지금까지 어떻게든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을, 이 말도 안 되는 고열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왜?’
제이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해리스를 담지 않은 시야는 확장되어 황폐해진 고드윈 본성을 담았다.
검고 질척한 해리스의 힘이 곳곳에 남아 있고 사방에 사람과 마수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해리스구나.’
문양이 없는 적들과 달리, 라예르가와 고드윈의 문양을 단 아군들은 부상자는 있을지언정 사망자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해리스는 저들을 구해주다가 이렇게 너무 많이 힘을 써서 쓰러졌던 거야.
그러나.
“왜, 왜 갑자기 쓰러진 거지?”
“저것도 혹시 무슨 이상한 이능인가?!”
정작 구해진 이들은 해리스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양 두려워하고 있었다.
“…….”
그래, 무서울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뒤지는 것보단 낫잖아?’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한테 그런 얼굴을 해!
해리스를 만나 안도하고 기뻤던 마음은 급격히 추락하며 쓰라린 환멸감까지 느껴졌다.
“리안 남작.”
해리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린 공녀가 다가왔다.
“괜찮…….”
“가까이 오지 마!”
제이드는 아이린 공녀가 발을 떼기도 전에 고함쳤다.
현타와 분노로 얼룩진 눈이 아이린 공녀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해리스가 다쳤다고 착각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붉고 싸늘했다.
여태껏 제이드를 지켜보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 아이린 공녀는 물론 다른 사람들마저 주춤했다.
“리안 남작, 오해일세. 난 그저…….”
“……오해?”
하! 제이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높게 터뜨렸다.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모든 게 전부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
극도의 분노로 빡돈 제이드는 빙의자로서 최소한의 세계관 설정을 존중하며 존대하던 말투도 집어치웠다.
“네? 잠깐, 아이린 공녀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무슨……?”
닥친 상황에 힘을 합쳐 싸우느라 벅찼던 고드윈의 사람들은 서서히 굳은 얼굴로 아이린 공녀를 보았다.
“당신이 자식 지키겠다고 적들을 죄다 여기 끌고 와 놓고, 그래서 고드윈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고선 오해?”
“리안 남작!”
아이린 공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제이드에게 다가가며 부인함.
“그렇지 않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오. 우리는-”
“다가오지 마!”
제이드는 해리스를 지키겠다는 듯이 꼭 끌어안고서 다른 손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위협 사격을 경고한 행동이었다.
두 눈에 눈물을 흘리는 자그마한 분홍색 소녀가 총을 들어봤자 애처롭기만 할 뿐이었겠지만, 실제로 그녀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은 움찔했다.
“……리안 남작, 그대의 주인이 쓰러져 경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난 그저 당신을 도와주려는 거요.”
그래서 아이린 공녀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서 그를 감당하기도 어려울 테니 부축을…….”
“도움? 해리스 님이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아니, 아니다.
사실 진짜 악의 축은 디뮈아드를 납치하겠다고 온 황실과 마탑이고, 아이린 공녀와 디뮈아드는 피해자다. 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뿐이다…….
‘알고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큼은, 제이드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 자식이 황실과 마탑에 납치당하는 걸 막겠다고, 굳이 해리스 님의 후계권 연회를 분탕 쳤잖다는 걸 모를 줄 알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행각을 용서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고, 당장 원망스러운 것은 눈앞의 아이린 공녀였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누구보다 강하다고 믿고 의지하던 해리스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상대를 헤아려줄 마음의 여유 따윈 증발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리안 남작!”
자신에게만이 아닌 아들의 비밀까지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아이린 공녀는 안색이 돌변해 제이드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탕-!
아이린 공녀가 제이드를 막아서려 발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 커다란 총성이 울려왔다.
“……!”
아이린 공녀는 흠칫 굳어졌다.
정확하게, 그녀의 발 바로 앞에서 총격의 연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나?”
눈물로 젖은 커다란 눈동자가 아이린 공녀를 새파랗게 노려보며 말했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철컥, 재장전한 총구는 정확히 아이린 공녀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경고는 세 번까지야.”
다음에는 진짜로 쏜다.
* * *
“리안, 남작…….”
제이드가 얼마나 명사수인지 너무 잘 아는 아이린 공녀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저게 감히-!”
치열하던 전투는 진정되었으나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살기가 깃든 상태였다.
조금의 불똥으로도 크나큰 불씨가 일어날 정도로.
라예르가의 수족들은 자신들의 주인에게 말까고 악쓰는 제이드를 더는 용인하지 못하고 나섰다.
“주인께서 관대함을 베푸셨더니 아주 끝이 없구나!”
“네깟 것이 무어라고! 어딜 라예르가의 안주인께 그리 막말을 지껄이는 것이야!”
“다들 그만두거라! 리안 남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일은…….”
격해진 반응에 당황한 아이린 공녀가 수족들을 억누르려 했지만,
“무엇이긴.”
그러기도 전에 피로로 갈라진, 아주 낮은 목소리가 먼저 그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내가 친히 작위를 내린, 내 손자의 반려 가이드지.”
“……가, 각하?!”
선대 공작이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이길래 고드윈에 와서 고드윈의 주인이 치하한 종복에게 언성을 높이느냐.”
피칠갑이 된 노익장의 플레이트 아머과 커다란 창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네깟것들이 무엇이기에, 내 손자의 수족에게 감히 달려들고 고드윈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느냔 말이다!”
그런 선대 공작이 내뱉는 사자후만으로도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제이드는 그 널따란 그림자가 자신 위에 내려앉고 나서야 선대 공작이 앞에 섰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토록 온몸을 긴장하던 제이드는.
“제, 제이드 님. 부축을…….”
“……저리 가.”
“하지만…….”
“가까이 오지 마!”
도와주겠다고 다가오는 이들마저 모조리 경계하고 있었다.
“제이드 님.”
“다가오지-!”
그래서 무언의 손길이 가까이 오자 즉각적으로 뿌리치며 소리치려 했지만,
“저, 카밀로입니다.”
“…….”
제이드는 눈을 깜빡였다.
분노와 열기로 흐리던 시야에, 감청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보였다.
고드윈 성의 사용인으로 변신한 와중 자신을 안심시키고자 본신의 눈과 머리색을 잠시 보인 거였다.
“카밀로…….”
제이드는 그제야 몸에 빠짝 굳어지던 힘을 풀었다.
‘아이린 공녀와 라예르가는 선대 공작이 상대해 주겠지.’
해리스의 의식불명 사태로 사방을 경계하느라 지친 제이드는, 선대 공작을 방패로 내세우자마자 뒤돌아보지 않고 해리스를 동관으로 옮겼다.
카밀로는 슬쩍 뒤를 보았다.
삭막하게 굳은 선대 공작과 차마 아버지를 마주하지 못하는 아이린 공녀, 아니, 라예르가 후작 부인.
“아이린,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이유 없이 행동하는 아이는 아니니, 네 이해할 수 없는 행각도 이해해 보려고 해보았다.”
그래서 선대 공작은 아이린 공녀가 고의적으로 자신을 본성 바깥으로 빼돌렸을 때, 그에 속아 넘어가 자리를 비운 척하며 사실은 자신의 기사단을 무장시켰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는 내 믿음을, 고드윈을 이렇게 이용하는 것으로 보답하다니.”
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이린 공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라예르가 일족을 붙들어라.”
“아버지!”
“명을 받듭니다.”
“라예르가 후작 부인, 따라오십시오.”
“자네……!”
그리고 아이린 공녀를 더 이상 고드윈이 아닌, 라예르가로 적대시하는 고드윈 쪽 인사들의 경계 어린 시선들까지.
‘과연, 대단해.’
카밀로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보 길드의 수장으로서, 그녀는 제이드가 해리스 고드윈을 새로운 고드윈의 소공작으로 밀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린 공녀가 자신의 자식들을 데리고 와 소공작 등극 축하 연회를 망가뜨렸다는 것도.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드는 딱히 아이린 공녀 일행에 크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번에 아이린 공녀의 적자인 디뮈아드 라예르가를 목숨 걸고 구해주기까지 했다.
‘그러셨던 제이드 님께서 아이린 공녀의 진실을 까발렸으니, 설득력과 파급력이 저토록 대단할 수밖에 없지.’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던 선대 공작은 물론이요, 노먼 고드윈을 적대시하느라 그 아들을 주군으로 모시는 데 거부감을 가졌던 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린 공녀를 진정으로 따랐던 고드윈의 사람들까지.
그 모두 아이린 공녀를 더는 이전처럼 온정어린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해리스 고드윈은 다시는 누구에게도 끌어내리니 못할 고드윈의 주인이 되겠군.’
상황이 도운 것도 있지만, 결국 제이드의 세 치 혀로 일어난 일이다.
‘과연 제이드 님……!’
라예르가 일행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디뮈아드를 구한 것은 단순히 그의 능력을 손에 넣기 위함만이 아닌 이러한 큰 그림도 있었던 거구나!
“……어떻게 하지?”
카밀로가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는 제이드는 해리스를 안전한 거처 내 눕히자마자 털썩 주저앉아 덜덜 떨었다.
“해리스가, 아니, 해리스 님이 깨어나지 못하면…….”
“네? 그럴 리가요.”
카밀로는 의아하게 갸웃거렸다.
이능력자가 이능을 과도하게 사용하다 쓰러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잠시 주무시는 거겠죠. 제가 봐도 제법 무리하셨던 것 같은데, 단순히 휴식을 취하시는 거예요.”
“……그런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응…….”
하긴, 해리스도 과로했으니 기절하듯 잠들 수 있는 거지. 나도 자주 그랬잖아?
제이드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해리스의 얼굴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야. 잠시 잠든 것에 불과할 거야.
하루 푹 자고 나면 깨어날 거야…….
* * *
그러나 해리스는 사흘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