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게 뭐지?
해리스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훅하고 몸에 닿아오는 온기에 붉은 입술이 저절로 벌려지며 막혀 있던 숨도 내쉬어졌다.
그제야 해리스는 자신의 세상을 인지했다.
‘아.’
제이드다.
나의 하나뿐인 제이드. 그녀가 자신의 몸을 내던지다시피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부를 법한 짓을 한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안겨들었다.
“…….”
어쩐지 이것이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입을 열기라도 하면 사라질 환상 같아, 해리스는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진짜, 진짜 무서웠어요. 으허헝-!”
그러나 제이드는 그렇지 않았다.
급박스러운 상황에 긴급 모드로 전환되며 억눌리던 감정이 해리스를 만나자마자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진짜 개 힘들었다……!’
애초에 카밀로를 만나 밤을 꼬박 새워버린 것만으로도 종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빈둥거려야 마땅할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디뮈아드가 납치당하는 걸 보고 너무 놀라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미친 짓을 해버리는 걸로 모자라 납치범들과 싸우기까지 했다!
‘아, 대체로 카밀로가 다 처리하긴 했지만…….’
그나저나 카밀로는 잘 착지했으려나?
‘추락하는 와중에 변신까지 할 정도로 여유 있었던 것 보면, 괜찮겠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괜찮은 인간으로 변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한 명이라도 주님께 보내버렸다는 사실은 충격이 컸다.
아무래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더더욱.
거기에 비행 괴수가 얻어터지고 추락하고, 말하는 나무, ‘다느렌 쿠세트’와 만나서 제이드는 사실 요정족 혼혈 같은 게 아니라 찐 요정이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알게 되었다.
‘……과로사하겠네, 진짜!’
심지어 그 모든 과정에서 해리스가 없었다.
비록 시작은 살해당할 뻔하긴 했었지만, 제이드는 해리스를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도 아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사람.
‘해리스.’
그와 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제이드는 혼자 말 안 통하는 외국에 떨어진 듯 불안했다.
라예르가 일로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다들 미쳤어.’
인간적으로 딱한 점도 있고 에이드리안 대용으로 부려 먹을 수도 있겠다 싶은 데다가, 제국의 3대 가문이니 이용 가치가 높아 계속 봐주었지만…….
‘이건 진짜 아니야. 이번에 라예르가가 불러온 일은 진짜 도를 넘었다고!’
일단 디뮈아드를 구하는 게 급해서 넘어갔지만, 사태가 얼추 마무리되니 빡침이 몰려왔다.
‘아이린 공녀, 진짜 가만 안 둬……!’
진짜 부모뻘 나이대라 참았는데, 더는 못 참아. 영혼까지 털어버리고 말겠다!
유교걸인 제이드는 결심했다. 그놈의 ‘번영의 반지’로도 회복 못 할 정도로 거덜 내버리겠다고!
‘으흐흑, 우리 해리스가 최고야.’
힐링이 필요했던 제이드는 오늘따라 너무나 안락한 해리스의 품에 더욱 안겨들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고드윈 공작 가문은 진짜 DNA부터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노먼 고드윈부터 아이린 공녀까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잖아!’
선대 공작이 자식 농사 말아먹은 게 확실하다.
아, 물론 우리 해리스도 그런 경향이 없냐면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래도 우리 해리스는 먼저 당한 게 많아서 그렇거든? 솔직히 우리 해리스 정도면 정당방위지!’
어릴 적 우리 해리스가 당한 학대 생각하면 이 정도로 자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무형의 안티를 향해 극성 실드를 치며 고개를 들던 제이드가 흠칫했다.
“어, 얼굴에 피가……!”
그제야 해리스의 하얀 얼굴에 묻은 검붉은 피를 발견한 것이다.
해리스를 발견하자마자 울먹거리던 제이드의 시야는 흐릿했고, 그의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충격으로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왕관처럼 갈라지고, 투명한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제이드.”
해리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우는 것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잘, 그리고 자주 우는 사람인지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해리스는 제이드의 빨개진 눈가에서 말랑한 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쿵, 쿵-
무기물 같던 심장에 열기가 치솟았다. 혀뿌리가 당겨오고 침이 말랐다.
저 아름다운,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그대로 핥아먹고 싶었다.
“다, 다치신 거예요?”
물기로 떨려오는 목소리를 입 안에 삼키고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싶었다.
갈증 나는 욕망에 손끝마저도 열감이 오르고 숨결이 뜨거워졌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다.
‘안 돼.’
적어도 지금은.
장소도 상황도,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드의 몸과 마음도 준비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억눌러야 하는데…….
해리스는 도무지 제이드에게서, 그녀의 젖은 눈가와 붉게 도톰한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욕구가 그를 점령하고 지배하여 이성을 마비시켰다.
쏴아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며, 특유의 달콤하고도 매혹적인 향이 그를 덮쳐왔다.
“……!”
해리스의 적안이 다시 혼탁해졌다. 이뿌리가 저릿하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강렬하고도 유혹적인 향은 마치 눈앞의 소녀를 취해. 살을 베어 물라고 명령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능력자로서의 본능은 도저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욕망을 억누르던 해리스의 제어 장치가 망가지려던 순간이었다.
“어느 미친 XX새끼야.”
이 가는 듯한 목소리가 제이드에게서 들려온 것은.
“……?”
익숙한 목소리의 낯선 말투. 해리스를 점령하던 열기가 일순 진정했다.
엉엉 우느라 온통 빨개지고 젖은 제이드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살벌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끼가, 감히 어떤 놈이 우리 해리스 다치게 했어어억-!”
이미 제이드는 눈 돌아간 뒤였다.
어느덧 손에 총을 소환한 제이드는 희번덕한 눈빛으로 사방을 노려보았다.
‘감히 우리 해리스를 해쳐? 그것도 국보급인 얼굴을?!’
내가 싸가지 바가지 디뮈아드 따위를 구하는 동안, 우리 해리스의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니!
용서할 수 없다.
‘주님, 제가 또 한 놈 올려보내겠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하던가? 제이드는 총을 든 채 사방을 노려보았다. 나오는 즉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쏴 갈길 생각이었다.
“…….”
좌중들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다치긴 누가 다쳐?’
‘여기 마수와 시체들 산 채로 다친 게 전부 저 괴물 놈이다!’
‘저것도 장담컨대 자기 피가 아니라 남의 피라고……!’
그러나 그렇게 반박하기엔 제이드의 얼굴에 번뜩이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고,
“제이, 제이드.”
더 무서운 놈이 먼저 입을 연 뒤였다.
“난 다치지 않았다. 내 피가 아니야.”
“아…….”
해리스의 차분한 다독임에 제이드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사방을 노려보는 눈길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마치 자신들이 그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누굴?!’
좌중은 경악했으나, 알 바 아닌 제이드는 해리스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진짜로 다친 거 아니에요?”
하얀 손이 해리스의 뺨을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혹시나 다치기라도 했나, 확인하려는 듯이.
제이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새삼 좌중을 돌아보니 부상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들 창백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어…….’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으면! 다시 치밀어 오른 걱정에 제이드는 울먹였다.
그렇게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들이 보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이드 자신이라는 사실은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응, 안 다쳤어.”
그리고 그 치열한 전투를 괴물처럼 한순간에 정리해 버린 것이, 제이드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는 해리스라는 것도.
“……허.”
선대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토했다.
여태껏 그는 돌아버린 것은 해리스고, 제이드는 그런 괴물같이 강한 해리스를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끙끙거리며 제어하는 자그마한 토끼 같은 소녀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보니 진짜 광기는 따로 있었다…….
‘저 둘의 조합, 정녕 괜찮은 것인가?’
선대 공작이 때늦은 고민을 할 무렵, 해리스는 가만히 제이드의 손길에 눈을 감고 뺨을 기울였다.
자신을 더러워하지도, 혐오하지도 않는 손길.
닿아오는 자그마한 손바닥 온기는 녹아내릴 듯 따뜻했다.
그러나.
“……!”
더 기대기도 전에 제이드의 손바닥이 움찔하고 움츠러들었다. 해리스가 귀신같이 붉은 눈을 치켜떴다.
“왜.”
“소, 손이 더러워서요.”
제이드는 민망해진 얼굴로 답했다.
해리스가 다친 줄 알고 패닉했을 때는 그런 것 생각할 틈도 없었지만, 이제 와 보니 숲을 구르던 손은 흙투성이였다!
‘젠장, 실례잖아.’
가뜩이나 피 묻은 얼굴, 더 불결한 게 닿으면 어쩐단 말인가.
“…….”
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 꼴 보면 모르냐고, 상관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제이드가 먼저 손을 뺐다.
그리고 얼른 소매에 자신의 손을 닦고 턴 다음 다시 착, 내밀었다.
“닦았어요!”
그래도 조금은 덜 더럽다! 제이드의 얼굴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반짝였다.
“……하.”
아하하, 해리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왜인지 웃고 있는데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참 그렇게 들썩이며 웃던 해리스는.
“정말이지, 제이드 너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듯 제이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차갑게 얼어 있던 손과 발에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크게 울려오는 심장 소리에 뜨거운 눈시울이 감겼다.
내가 이토록 엉망진창의 꼴인데도, 너는.
너는…….
“왜, 또 또라이 같아요?”
들려오는 제이드의 불퉁한 목소리.
해리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기다란 팔로 제이드를 꼭 끌어안았다.
물에 빠진 인간이 지푸라기를 움켜쥐듯 절박하게,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쓰러졌다.
“……해, 해리스 님?!”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