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수라장이 된 고드윈의 본성 위, 어두운 하늘에는 군데군데 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마법사가 동원된 적군의 공격은 사방에서 불을 일으켜, 동관 주변의 있는 돌과 땅, 그리고 나무를 태웠다.
엉망진창이었다.
고드윈과 라예르가를 향한 포위 공격으로 인해 더는 고드윈의 본성에서 평소의 위엄과 단정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본성 안팎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와 먼지가 묻어 있었고, 부상을 입어 쓰러지거나 다른 이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안색이 새파래진 것은, 피로가 극에 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그그극-
대지에서부터 울려오는 기묘한 소리. 새까맣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피처럼 붉던 노을이 저물며 어두워진 하늘 아래, 그것은 얼핏 보면 밤의 바다를 출렁이는 파도 같기도 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면 징그러운 마수의 촉수들이 꿀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욱!”
레노르는 입을 막았다.
라예르가의 후계자로서, 전장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살인도 낯설지 않았다.
이토록 많은 적을 상대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체와 죽음을 비롯한 온갖 끔찍한 것들에 일일이 헛구역질할 정도로 연약한 정신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분 나빠……!’
구역질이 났다. 본능적인 거부감을 참기가 어려웠다.
도망치고 싶다.
레노르의 본능이 경고했다. 저 불길하고 끔찍한 것에서 도망쳐야 해-!
직감이 발달한, 그리하여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게 꿰뚫어버린 레노르는 바들바들 떨면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인, 해리스에게서.
“해리스, 정신 차려라-!”
선대 공작이 몇 번이고 고함쳤지만, 해리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옥의 한복판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새까맸다.
해가 진 밤, 유독 해리스 주변과 발치는 달과 별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듯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온갖 그림자와 저 기분 나쁜 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 의복은 핏빛으로 물들지 않았지만, 한쪽 뺨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해리스는 기계처럼 감정 없이, 그러면서도 매우 냉혹하게 힘을 움직였다.
“크아아악!”
고드윈과 라예르가를 공격하기 위해 나타난, 천공의 마법진에서 꾸역꾸역 밀려오던 적들을 학살하기 위하여.
물론 그들이라 해서 가만히, 순순히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죽어, 죽어!”
“스크롤을 쓰라고!”
“마법사는 어디 있어?!”
탕! 탕탕탕-!
닿기만 해도 살갗을 태워 죽일 화염구가 쏟아져 나오고, 총과 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 이게 뭐야!”
검은 촉수와도 같은 힘은 칼로 베어져도 금방 다시 붙었고, 마법으로 공격해서 터뜨려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다시 그대로 고여 들었다.
“사, 살려줘! 제발……!”
결국 어떻게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투항하듯 무릎을 꿇었지만, 검은 힘은 파도치듯 그들을 삼켜 버리고야 말았다.
“이 괴물-!”
최후까지 저항하던 이들이라 해서 다른 결말을 맞이하진 못했다. 귓가에 참혹한 비명이 끊이지 않고 울려왔다.
아군조차도 겁에 질릴 법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실제로 도움받은 아이린 공녀마저도 감사의 마음이 들기보다는 충격과 공포만이 느껴졌다.
‘아무리 최고 등급의 이능력자라고 해도, 이건……!’
디뮈아드를 지키기 위해, 아이린 공녀는 라예르가에서 많은 이능력자를 시험해보았다.
개중 가장 강력하고 무자비했던 것이 용병왕 알루카스였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만든 미궁과 엄중한 경호를, 엄청난 파괴력의 화염으로 박살 내고 기어코 라예르가의 숙적을 가져온 사내.
그가 보여준 결과에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 내의 결과이기도 했었다.
S급이라 불리는 사내조차도 그 정도였다. 강력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상 내의 힘.
하지만 해리스는, 고대 마수 ‘공허’의 이능을 각성했다는 자신의 조카는.
“……인간이 아니야.”
같은 종으로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희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괴물……!”
* * *
“리, 리안 남작은-”
레노르는 제이드의 행각에 대해 낱낱이 다 말해주었다.
비행 괴수에 잡혀 납치당하던 디뮈아드. 그리고 그런 디뮈아드를 보자마자 동관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달려들어 비행 괴수 위로 올라갔다는 제이드.
‘무슨 일이 생겨도 안전하게 처박혀 있으라니까, 대체 왜!’
해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비행 괴수 위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제이드와 디뮈아드조차 떨어질 뻔했소! 다, 다행히 어떻게든 비행 괴수 위에 잘 매달려 버틴 모양이었는데…….’
하필이면, 비행 괴수가 저 사악한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니.
해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가뜩이나 해리스는 던전에서 본성까지의 머나먼 거리를 뛰어넘느라 무리한 상황이었다.
물론 공허의 이능은 공간 이동과는 크게 관계없었다.
다만 해리스는 고드윈 본성의 일부를 공허의 이능으로 영역화해 둔 상태였다.
그리하여 해리스는 공허를 열어 그 안에 자신을 집어넣고 ‘영역’으로 뛰어넘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자신이 지정한 ‘영역’ 내, 제이드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불길하다는 이유 하나로.
“……쿨럭.”
그리고 해리스는 미친 짓을 한 대가를 맞닥뜨렸다.
입안에 역류해 온 비릿한 피를 삼키며 해리스는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아직 해리스는 공허의 이능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 와중 던전 내에서 힘을 마음껏 발휘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허 내부에 들어갔다 나오는 짓거리를 하니 자연히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리스가 제이드를 찾아 북관 뒤의 사악한 숲으로 떠나기도 전,
“죽어, 죽어버리라고!”
날 것의 증오와 악의가 그를 덮쳐왔다.
퍽-!
해리스에게 던져진 무기는 그가 의식하기도 전에 일어난 검고 질척이는 힘에 삼켜졌다.
정확히는 해리스가 전장의 한복판에 멋대로 끼어든 것이었지만, 주인의 목숨을 최우선적으로 지키는 이능은 살기와 악기가 감도는 전장에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허억, 큭…….”
이것들부터 처리해야 제이드를 안전하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전장에 휩쓸린 해리스가, 정신 나간 듯 폭주하는 이능의 고삐를 움켜쥔 채 적들을 처리하던 순간이었다.
[끼에에에에……!]
머나먼 거리에서 비행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쿵-!!
그리고 이어진 대지의 울림.
“제이드!”
원래도 희던 해리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비행 괴수에 매달렸다는 제이드가 어디에 어떻게 추락했을지 모른다.
‘아니, 추락하고 무사한지조차 알 수 없어.’
어떻게든 고삐를 쥐던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었다. 검붉은 핏줄이 해리스의 흰 목덜미를 타고 얼굴로 뻗어왔다.
그렇게, 공허의 힘이 제한 없이 풀려나오며 모두를 겁에 질리게 하던 순간이었다.
“……해리스 님?”
제이드가 숲 밖으로 빠져나온 것은.
* * *
제이드.
해리스는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들었다. 붉은 홍채가 혼탁한 것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제이드의 실루엣이 눈동자에 비치자, 탁하던 적안에 이채가 돌았다.
황급히 힘을 거두어들였지만, 해리스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반쯤 폭주한 상태인 그의 감각은 둔화한 지 오래였다.
“괴, 괴물…….”
“인간이 아니야.”
“어떻게-!”
부정적인 감정에 누구보다 민감한 해리스가, 이제야 저 목소리와 시선들을 인지할 정도로.
상관없었다. 익숙한 일이다.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두렵고 역겨워하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이, 제이드의 앞이 아니었다면.
‘괴물 새끼!’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
이번에야말로, 제이드가 자신을 멀리할지 모른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해리스는 즉시 피로 물든 두 손을 몸 뒤에 감췄다.
네가 나를, 너마저 나를 그렇게 보게 된다면…….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해리스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한동안 잠잠하던, 사악한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려왔다.
[너 같은 건 아무 가치도 없어.]
[필요 없어. 사라져도 상관없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그 누구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비이성적인, 그러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저주의 목소리.
[너는 추악하니까.]
[역겹고 더럽고 악하고 비열하지.]
[너 같은 것을 누가 아낄 수 있겠어, 누가 너 같은 괴물을 사랑해 주겠냐고-!]
그 목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친다.
해리스는 몸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눈앞의 제이드가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해리스, 님……?”
겁에 질린 목소리를 내면서.
이는 과거, 그가 어리고 어리석었던 시절, 고드윈 공작저 사람들이 자주 보였던 모습이었다.
‘왜?’
해리스는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제이드가 그에게 저런 표정으로 저런 목소리를 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피.’
불현듯 얼굴에 더러운 피가 묻었다는 걸 떠올린 해리스는 황급히 손으로 얼굴 반쪽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려 했다.
‘피 때문에 무서운 거야.’
하지만 떨리는 손에도 피가 묻어 있었고, 얼굴의 핏자국은 아무리 닦아도 더욱 더럽게 번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숨이 멎었다. 심장이 토해질 것만 같았다.
‘너마저 나를 그렇게 보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아무 가치도 쓸모도 없는 존재라고 멸시하면.
그러면 나는.
나는…….
피로 범벅이 된 손이 덜덜 떨려왔다.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뇌가 정지했다.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었던 해리스는.
“으허엉-! 왜 이제야 나타나신 거예요!”
“……?!”
갑자기 몸통 박치기라도 하듯 달려든 제이드 때문에 휘청였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넘어지기도 전에 제이드의 두 팔이 그를 단단히 끌어안더니,
“무서웠단 말이야……!”
하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울먹였다. 정작 무서울 것은 괴물이라 불린 해리스일 텐데도,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뿐이라는 듯이.
“…….”
해리스는 붉은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못한 채 제이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