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소년의 미성에는 이전과 같은 신기하고 기이한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와 함께 빛이 사라지고 바람도 멈추었다.
그렇다고 해서 디뮈아드가 풀어낸 기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음침하게 어둡던 숲은 금빛 가루가 뿌려진 듯 반짝였고 꽃향기가 바람결에 퍼졌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은빛 머리카락과 자줏빛 눈동자를 지닌 소년의 매혹적인 미형은 더욱 선명히 도드라졌다.
신성하고 위대한 힘.
‘……맙소사.’
서서히 깨어난, 그리하여 모든 것을 목격한 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기지 않았다.
‘이게 라예르가에서, 아이린 공녀와 레노르가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디뮈아드의 힘이라고……?’
세상에. 충격과 경탄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나, 난 디뮈아드가 가이드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에이드리안처럼 레전드 최강 S급 가이드 말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능력자들을 진정시키고 정화하면서 동시에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제이드로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디뮈아드가 겪고 있는 일은, 정확히 <시천귀>에서 1회차 에이드리안이 겪었던 일이니까.
너무나 강력한 가이드로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자기 자신을 보호할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에이드리안.
그를 노린 각종 세력이 에이드리안의 가족도 친구도 모두 학살하고 납치하길 반복했다.
‘처음은 마탑주 엘리시어스, 그다음은 황실, 나중엔 이능력자들까지…….’
삶은 에이드리안에게 가혹했다.
<시천귀>를 달리는 몇몇 독자는 아무리 그래도 에이드리안이 너무 잔인하게 복수하는 게 아니냐고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가 과거에 겪은 일들이 짤막하게라도 나오면, ‘에이드리안 무죄’, ‘저쯤 해야 사이다지’, ‘나 같아도 저 정도로 보복한다’ 같은 반응이 압도적으로 쏟아졌다.
제이드는 후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디뮈아드에게서 에이드리안을 겹쳐보고 있었다.
‘<시천귀> 본편에 잘 나오지 않는, 모든 비극과 절망을 겪기 전의 어린 에이드리안은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몰라.’
-하고.
디뮈아드가 온갖 혐성과 막말과 싸가지를 부려도, 아르투 백작 영애 때와 달리 계속 봐주고 넘어간 것은 그래서였다.
이번처럼 납치된 것을 보자마자 구하겠다고 몸을 내던지다시피 한 것도.
또한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구해줬으니…… 에이드리안과 2교대로 뛰어주지 않을까!’
에이드리안의 문제는 그가 너무나 강력한 가이드라는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강력한 가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다.
‘한 명이라도 늘면 그만큼 부담이 줄겠지!’
나중에라도 에이드리안의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그러니까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하지만.
‘가이드가 아니라 버퍼였다니-!’
버퍼(Buffer). 굳이 분류하자면 탱딜힐 중에 ‘힐’에 속하는, 보조 강화 계열 능력자.
예상치도 못한 사태에 제이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시 정신을 잃은 동안 말하는 나무 다느렌 쿠세트와의 교분을 쌓은 덕분일까, 제이드는 일시적으로 이 인간혐오숲의 나무들과 신경이 연결된 상태였다.
그래서 제이드는 디뮈아드가 노래를 부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디뮈아드의 목소리에서 쏟아진 이능의 힘이 사방을 휩쓸며 이 숲에까지 쳐들어온 적들을 약화하는 것과 동시에 그 적들을 공격하는 숲을 강화했다는 것을.
‘맙소사, 버프(Buff:강화)와 디퍼프(Debuff:약화)를 동시에 거네.’
심지어 광역기였다.
이 인간혐오의 숲은 대단히 넓어 정확히 적들이 어디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이능을 시전했던 걸 테니까.
‘……미쳤다.’
예상도 못 한 너무 강력한 힘에 제이드는 오싹해졌다.
‘이런 능력이니, 황실에서도 마탑에서도 대가리 총 맞은 것처럼 굴었던 거구나.’
라예르가와 척지는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다 싶었겠지.
광역으로 아군을 강화하고 적군을 약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텐데, 겨우 제국의 3대 공신 가문 따위가 무어란 말인가.
이건 아예 대륙의 판도를 바꾸는 힘이다.
‘심지어 이능력자에게도 영향 줄 정도야.’
그제야 제이드는 아이린 공녀가 왜 연회에서 그렇게 행동했던 건지 파악했다.
단순히 후계권 다툼을 입에 담아 고드윈에 머무는 명분을 만든 것뿐만이 아니라, 연회의 참석자였던 알루카스를 자연스럽게 내보내려 한 것이었다!
‘처음엔 디뮈아드가 가이드라는 걸 들킬까 봐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용병왕 알루카스와 아르카이 용병단은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으로 올라가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준범죄자 집단이었다.
‘그놈들이라면, 디뮈아드의 능력을 인지하는 즉시 디뮈아드를 납치해가 버프/디퍼프 셔틀로 써먹겠지.’
이건 어떤 의미로 에이드리안보다도 더 이용해 먹기 좋은 힘이다. 에이드리안은 ‘고작’ 이능력자들에게만 영향을 끼칠 뿐이니까.
‘아이린 공녀가 미친 스파르타 교육을 시킨 게 슬슬 이해되려 하네.’
이걸 이해해도 괜찮은가 싶긴 하다만……, 제이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시천귀>에서 디뮈아드가 왜 자살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키다 자살한 이후, 디뮈아드는 뼛속 깊이 절감했을 것이다.
이젠 누구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으며, 누이와 아버지, 그리고 라예르가 전체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인질로 잡혀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자살했던 거야.’
단순히 절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이토록 어린 소년 나름의 가족을 지키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체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겠지.’
순식간에 라예르가 일행의 모든 수상쩍은 행동 양식이 짜 맞춰지며 이해되었지만, 의문을 해소하여 후련하긴커녕 씁쓸해졌다.
‘……또 다른 에이드리안이 여기 있구나.’
그나마 에이드리안은 회귀해서 복수라도 했지. 디뮈아드 애는 참…….
속으로 한숨을 쉬던 제이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일으켰다.
“…….”
디뮈아드의 와인색 눈동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기억했다. 제이드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추락한 것을.
덕분에 그는 한 점의 상처도 없었다.
하지만 제이드의 얼굴과 살갗에는 흉악한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인한 붉은 상처가 가득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았어.’
아무리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육신에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패닉한 디뮈아드는 알지 못했다.
그 높이에서 추락하면 제이드가 아무리 대신 충격을 받았어도 디뮈아드는 그토록 멀쩡할 수 없으며, 제이드 또한 척추뼈가 부러지고 사망한 게 아니라 피부가 긁힌 상처들만 생긴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러나 납치당하고 자살하려 했다가 은밀히 짝사랑하던 상대에게서 구해졌는데, 그 상대가 자신을 끌어안고 추락해 의식불명에 빠지기까지 했던 디뮈아드로선 정상적인 사고 회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제이드를 구하기 위해 차라리 죽더라도 쓰지 않으려 했던 이능을 개방했기에, 더더욱.
“…….”
너무 많은 사건과 충격으로 격렬한 내적 변화를 겪은 디뮈아드였지만……,
‘애 버프 진짜 쩐다.’
정작 디뮈아드를 그렇게 만든 제이드는 별생각이 없었다.
‘추락할 때 여기저기 긁히고 좀 다친 거 같던데, 상처 하나도 없다.’
마력 쓴 것도 충전된 기분이야.
빛이 쏟아진다 싶긴 했는데, 육체적 피로가 싹 씻겨 나간 것 같네. 이거 거의 힐러급 아닌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감탄하던 제이드는 흠칫 놀랐다.
“디, 디뮈아드?!”
곁에 앉아 빤히 자신을 보던 디뮈아드가, 언제부터인지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니까!
‘애가 왜 울어?!’
아니, 생각해 보면 울 법도 하지. 납치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비행 괴수의 발광으로 이상한 숲에 떨어지기까지.
울 일이 너무 많다! 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디뮈아드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울지 마, 응? 이제 괜찮아. 괜찮…….”
“으허헝-!”
그 말에 소리 없이 울던 디뮈아드가 더욱 격렬하게 자신의 품에 안겨 엉엉 소리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왜?!’
자신이 추락할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무슨 스위치를 눌러버렸는지도 모르는 제이드는 당황했다.
‘마, 많이 무서웠나? 하긴 무섭긴 했겠지. 납치에 마수에 인간혐오숲까지 아주 난리난리 개난리였으니까…….’
하지만 너 나 안 좋아하지 않았니? 보기만 해도 온갖 막말을 쏟아냈으면서!
갑자기 급격히 몸과 마음의 거리를 좁혀오는 디뮈아드가 몹시도 낯설었다.
왠지 레노르 때도 이런 생각했던 거 같은데 뭔가 이상하게 겹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인가?
‘……혹시 목숨을 구해줘서?’
그래, 그렇다면야 갑자기 태세 전환할 만하지.
‘역시 사람 마음 얻는 데에는 구명만 한 게 없구나……!’
이 앙칼진 아기 고양이마저도 길들이게 해주다니! 디뮈아드의 속마음을 모르는 제이드는 혼자서 감탄하고 납득했다.
“쉬- 괜찮아. 이젠 괜찮아…….”
그렇게 디뮈아드를 안고 다독이며, 제이드는 숲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숲의 밖, 고드윈의 본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 * *
“……해리스!”
고드윈의 본성, 선대 공작이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질렀다.
마수의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중장기로 무장한 선대 공작에게선 온갖 전장을 헤쳐나온 노익장다운 풍모가 느껴졌다.
하지만 투구 아래 그의 얼굴은 겁에 질린 듯 창백해져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게냐!”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