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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80화 (80/119)

80화

[키엑-!]

레노르 뒤에 숨어 있던 마수가 그녀를 공격하려는 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레노르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해리스의 발치에서 뻗어 나온 검은 힘이 마수를 에워쌌다.

[끼에에……!]

레노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오만하지 않았지만, 비굴하지도 않았다.

가문을 지키고 기사단을 이끌 정도의 실력을 쌓고 존귀한 라예르가의 후계자로서 자라왔으니, 스스로를 약하다고도 모자란다고도 여겨온 적 없었다.

저 압도적인 힘을 목도하기 전까진.

으드득-! 레노르는 시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허억, 헉……!”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시야를 장악한다. 도무지 인간을 마주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분명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용모인데도, 무언가 불길하고 섬뜩한- 인간이 아닌 것에 인간의 껍질을 씌워놓은 것만 같아 신경이 저절로 곤두섰다.

그제야 레노르는 깨달았다.

저건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야.

제이드 곁,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 가끔 입꼬리를 휘던 그의 모습은, 이 사내에겐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하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용될 뿐인!

해리스는 자신이 처리한 마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입을 열었다.

“나의 제이드는 어디 있지?”

* * *

그리고, 제이드는.

[요정의 아이를 보다니.]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무가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쏴아아- 머리 위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듯 푸른 그늘을 드리웠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미친.’

아, 물론 이곳이 판타지 세계인 것은 아~ 주 잘 알고 있다.

마법도 있고 이능력자도 있고 가이드라는 것도 직업도 있는데, 심지어 사람 먹는 식물 괴수도 있으니 말하는 나무 정도는 평범한 걸지도 모르지.

안다. 알지만…….

‘지, 지금 내 뇌리로 말을 꽂아 넣고 있어?’

이거 진짜 이상한 기분인데. 낯선 감각에 제이드는 어버버 굳어버렸지만,

[이런, 어린 요정 아이는 내가 낯선가 보구나.]

다행히 나무는 친절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 늙은 묘목(墓木), 다느렌 쿠세트는 모든 요정의 벗이니.]

다느렌 쿠세트?

멍하니 그 이름을 속으로 되새기던 제이드는 언노운 던전에서 만났던 식인 식물 괴수, 다넬쿠스를 떠올렸다.

[가엾게도, 그 사악하고 뒤틀린 것과 마주쳤느냐?]

천만다행으로 같은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식물 살인…… 아니, 살괴마라고 화내시진 않겠구나, 제이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괜찮다. 부정하게 태어난 존재, 본래의 순리대로 소멸되는 것이 옳아. 네가 그것들의 숨을 거두었다니, 차라리 다행인 일이겠지.]

머릿속이 죄다 읽히고 있다는 자각은 나중에나 떠올랐다.

[하하, 이토록 순수한 요정이라니.]

뇌리에 꽂혀오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점잖아,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말하는 나무, 다느렌 쿠세트에겐 어떠한 적의도 없이, 오직 다정한 선심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 순수한 요정이라니.’

내 성격이 순수하다는 건가? 제이드는 속으로 갸웃거렸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에 제이드는 멈칫했다.

설마 제이드, 찐으로 요정이었던 거야?

‘그런……!’

말도 안 돼. <시천귀>에서 순혈 요정은 아주 오래전에 멸종되었던 걸로 나오는데!

‘그래서 <시천귀> 본편에서도 에이드리안과 같은 요정족 혼혈들만 나왔었지.’

앞서 말했듯 요정들은 옛 왕국 시절, 그러니 아주 오래전에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 학살당한 존재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혼혈이 남아있을 수 있느냐?

특이하게도 요정족 혼혈들은 얼마나 요정족의 혈통이 짙은지로 구별하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이능 각성과 비슷한 거였지.’

아주 먼 조상님 중 하나가 요정족 혼혈이었다 해도, 그 직계 자식들은 그냥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그 후대에서 갑자기 요정족의 특성이 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것은 설정상 요정족은 물질의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말을 들으니 많은 게 납득된다.

제이드 체내에서 느껴지던, 엄청나게 순수하던 마력 농도, 언제나 깨끗하던 마나 회로, 그리고…….

[하지만 아주 불안정해.]

“……!”

놀라 눈이 커다래지자, 다느렌 쿠세트는 가지를 드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쳐오는 나뭇잎과 가지가 놀랍게도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아기 요정은 제대로 된 보호자에게 보살핌받고 자라오지 못한 모양이구나.]

가엾게도.

다느렌 쿠세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한가득 깃들어 있었다.

‘보호자?’

혹시 부모를 말하는 건가. 하긴 이 세계로 떨어지고 나서부터 제대로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지.

툭하면 찾아오는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삶…….

이제 와 눈물이 난다. 흑흑, 왜 나한테는 빙의하자마자 마주치는 설명충 하녀가 없었던 게야!

제이드는 나무 잎사귀에 얼굴을 묻으며 훌쩍였다.

[우리 어린 요정, 각인 보호자가 부재해서 많이 서러웠니?]

“네에, 흐엉-!”

심지어 받아주는 사람, 아니 나무가 있으니 더 눈물이 났…… 잠깐?

‘각인? 부재?’

나한테 그런 설정도 붙는 거였어? 제이드는 입을 쩍 벌렸다.

[이런, 각인에 대해 제대로 인지도 못 했어?]

다느렌 쿠세트가 내 이마 위로 손을…… 아니, 손처럼 느껴지는 나뭇가지를 뻗었다.

마치 판타지 세계에서 초월적 존재가 주인공의 숨겨진 비밀을 읽는 듯한 분위기.

나는 고인물답게 반항 없이 눈을 감았다.

[……세 개의 각인이 있구나.]

WHAT? 제이드의 각인 상대가 셋이나 된단 말임?!

‘이런 욕심꾸러기…… 가 아니라!’

이 셋이나 되는 각인 대상자들은 제이드 안 보살펴주고 뭘 한 거야?

대체 왜 눈 뜨자마자 나 혼자 지옥도에 빠져있던 상황인 거냐고!

[모두 불안정해.]

……이래선가 보다.

[하나는 너에게 일방적으로 각인하고, 다른 하나는 네가 일방적으로 각인했으며, 마지막은 각인 상대가 각인을 인지하지도 못했구나.]

쯧쯔, 다느렌 쿠세트가 혀(나무한테 그런 게 있어?) 차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된 쌍방 각인이 없어. 그래서 우리 아기 요정이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인가…….]

심지어 의문문이다.

초월적 존재로 느껴지는 말하는 나무, 다느렌 쿠세트도 잘 모르겠는 모양이다.

‘간신히 제이드에 대해 알아볼 기회가 생겼나 했더니.’

또 미궁이다. 한숨 나오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제이드가 순혈 요정이라는 것, 그러나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 각인 상대가 무려 셋이나 된다는 것까지…….

‘각인 보호자라고 했지. 그렇다면 최소한 하나는 에이드리안인가?’

자신을 오빠라 칭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둘은 누구지?

제이드가 눈을 가늘게 뜰 무렵.

[기적같이 만난 요정 아이야. 정말로 반갑지만 나는 이제 다시 잠들어야 할 것 같구나.]

다느렌 쿠세트가 추방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왜인지 몹시 섭섭했다.

[언젠가 다시 또 만나길 바라며, 벗의 징표로서 선물을 하나 남기마.]

선물! 언제나 땡큐지!

제이드가 기쁜 얼굴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빛이 전신에 쏟아졌다.

* * *

“……안 남작, 제이드 리안!”

디뮈아드는 제이드를 흔들었다. 정신없이 추락한 뒤, 먼저 정신을 차린 디뮈아드는 자신이 숲속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꼭 끌어안고 추락한 제이드가 의식을 잃었다는 것도.

‘……나 때문에?’

계속해서 깨우려 애썼지만, 제이드는 반응이 없었다.

‘나 때문에, 나를 구하느라 이 작은 몸을 혹사해서, 그래서…….’

죽어가는 거야?

대지를 움켜쥐는 소년의 주먹이 덜덜 떨려왔다.

자신을 구하다 죽은, 시체가 되어 푸르고 창백해진 자들을 떠올린 디뮈아드의 얼굴에 고통이 스쳤다.

“으, 으흑……!”

소년은 죽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너까지 내 운명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너만큼은 아니길 바랐는데!

털썩, 절망하며 주저앉은 디뮈아드는 숲의 곳곳에서 울려오는 고함을 들었다.

“……기 있어! 저기 있다!”

“잡아!”

“어떻게든 잡아가야 해-!”

“윽, XX! 이 미친 숲 새끼가!”

어떻게든 디뮈아드를 납치하고자, 인간을 증오하는 숲까지 기어들어 온 적들이었다.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죽어가고,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인간을 증오하는 숲. 아무렇게나 자라오는 풀조차 억세고 스쳐오는 바람마저도 날카로웠다.

왜 죽지 않았느냐고, 이토록 보잘것없고 무력한 네가 무슨 이유로 지금껏 살아 있냐고 묻듯이…….

“……나도, 몰라.”

디뮈아드는 악을 썼다.

“나도 모른다고!”

자신이라 해서 살고 싶었던 게 아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모멸적으로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소년의 자줏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사과빛 뺨은 온통 젖어 있었다.

디뮈아드는 울 듯이 웃었다. 비참하고 비통한 미소였다.

그리고,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소년이 입을 열었다. 천상의 은혜처럼 황홀한 목소리였다.

죽는 그 날까지 쓰지 않겠다 봉인한 힘.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소년을 거부하던 어둡고 푸르던 숲이 흔들리고, 숲 곳곳에서 그에게 달려오던 적들이 굳어졌다.

“으헉, 컥……!”

“사, 살려-!”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소년이 영원토록 쓰지 않겠다, 차라리 죽겠다 고집한 힘이 그들의 숨을 앗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그만……!”

소년을 잡으러 온 사내들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쏟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형상마저도 잃고 쓰러졌다.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절대적이고 잔혹한 힘과 반대로, 소년의 장미꽃 같은 입술이 노래를 불렀다.

작은 소년의 육체 주변으로 빛이 깃들었다. 바람에 춤을 추듯 흔들리며 축복을 쏟아냈다.

‘제이드.’

리안 남작. 첫눈에 내 시선을 앗아간 사람.

디뮈아드에게 깃든 축복과도 같은 빛이 서서히 제이드에게 쏟아졌다.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소년의 자줏빛 눈동자가 온통 젖은 채 소녀를 응시했다.

빛이 깃들고, 깃들며 감겨 있던 제이드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뜰 때까지.

깨어났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금제를 깬 디뮈아드는, 황홀한 슬픔이 깃든 얼굴로 웃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하늘의 천>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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