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76화 (76/119)

76화

“어머니.”

어둠 속, 조용히 도끼의 날을 닦던 아이린 공녀가 고개를 들었다.

“레니.”

라예르가의 주인답게 언제나 엄격하고 차갑던 얼굴이 사적인 공간, 딸 앞에서 부드러워졌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뭘요, 제가 당연히 할 일인데.”

그리고 레노르 또한 어머니 앞에서는 얼굴이 조금 더 장난스러워졌다.

언제나 태평하던 얼굴에 살짝 흥분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 가이드 때문인가.’

리안 남작.

사람은 가장 위급한 순간 본성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리안 남작, 해리스 고드윈의 가이드는 당장 위기가 찾아오자 반사적으로 디뮈아드를 등 뒤에 숨기고 앞서 싸웠다.

‘1초 전까지만 해도 그 아이가 막말을 퍼붓고 있었는데도 말이지.’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성품은 귀했다.

‘레노르가 왜 마음에 들어 한 건지 알겠어.’

그리고 그런 아이가 해리스 고드윈이 아껴 마지않는 가이드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이 어떻게 되건 간에 제이드는 해리스의 제어 장치가 되어주리라.

‘제아무리 난폭하다 한들, 그 아이 앞에서는 조심하겠지.’

아이린 공녀는 이능력자라는 족속들을, 특히 고등급일수록 믿지 않았다.

라예르가의 원수를 이용해 S급 이능력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확인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 게 분명한 해리스라면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아이린 공녀가 던전을 핑계로 해리스를 본성 바깥으로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는 해리스가 디뮈아드를 위협하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지만, 그 사태가 터진 직후에는 그 시기를 더더욱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위험한 상황, 적을 가까이 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그 눈빛.’

갑작스러운 던전행의 통보에도 해리스는 잠잠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잠시 마주친 새빨간 적안은 피처럼 섬뜩했고 무표정한 얼굴은 조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내야 했어.’

아이린 공녀는 흉흉한 도끼날 위로 깨끗하게 반사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해리스의 연회를 망치고, 함정을 놓은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후회하기엔 그는 너무 강력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를 자식들이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녀를 두렵게 했다.

“어머니.”

레노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안 남작, 제이드가 한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해리스 고드윈…… 외사촌이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건만, 두 사람은 이미 디뮈아드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말했다.

‘믿기 어려운 건 알겠지만…… 해리스 님은 강력한 아군이 되어주실 수 있어요. 제가 보증할게요.’

만약 해리스가 정말로 해치려 했다면 지금쯤이면 모두 끝난 뒤였을 거라, 이야기하면서.

“…….”

오만한 말이었지만, 아이린 공녀는 부정하지 못했다.

은밀히 밀반입한 측정기는 해리스의 등급이 최고 등급마저도 부족하다는 듯 부들거렸으니까.

“그래, 그렇구나.”

“네, 그러니 사촌이 돌아오면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저희가 먼저 무례를 끼쳤으니 그에 대해 사과하고, 대신 그만큼의 사례를…….”

“하지만 이미 늦었어.”

“네?”

어머니 앞이라 방심하던 레노르는 그대로 아이린 공녀에게 잡혀 비밀 통로로 내던져졌다.

“읏-?!”

레노르는 아이린 공녀 뒤로 나열한 라예르가의 무인들을 보며 깨달았다.

‘설마, 벌써 그들이 도착했다고?!’

언제, 어떻게? 분명 어머니는 선대 공작님도 외유 보내셨…….

‘……일부러?!’

비밀 통로의 문이 닫히기 전, 레노르는 다급히 외쳤다.

“저도 싸울 수 있-!”

“안 돼.”

아이린 공녀는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문을 완전히 봉쇄한 뒤, 아이린 공녀는 육중한 도끼를 쥐어 들었다. 그리고 동관 밖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스캉-!

날이 선연한 도끼가 어둠을 가르며 허공을 날아갔다.

동시에 ‘으헉!’ 하고 비명이 토해졌다. 아이린 공녀는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보며 고함쳤다.

“모두 죽여라!”

* * *

‘진동?!’

밖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당황한 제이드가 얼른 일어나자, 카밀로가 그녀를 부축하듯 손을 뻗었다.

“제이드 님.”

“아, 아뇨, 괜찮아요. 저한테 그렇게 말씀을 높이실 것까진 없…….”

“에이드리안 님께선 제 목숨을 구하시고, 제게 이름을 내리셨습니다.”

“……!”

제이드는 멈칫했다.

카밀로(Camilo).

자신의 색을 바꿔 숨는 도마뱀, 카멜레온(Chameleon)에서 따온 이름.

“그분께서 제게 새로운 삶과 이름을 주셨으니, 저는 마땅히 그분의 것입니다.”

<시천귀>의 세계에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일종의 주종 계약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 이사그 공작 가에서는 가문의 일원이 되어야 이름을 내려주었다. 두 번째 이름이 후계자의 상징인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러니 그분을 구하는 일로 제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비록 벗어났다 한들, 카밀로는이사그 공작 가문에서 자라난 이였다. 그러니 에이드리안에게 이렇게 충성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리어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써달라 청해야 옳습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밀로를 불러들인 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충성적인 거 아닌가.’

거의 발닦개 수준인데.

해리스의 발닦개를 자처하던 제이드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발닦개의 자세? 나 사실 엄청 글러 먹은 발닦개였나?

“특히 에이드리안 님의 누이동생께서 요청하신 일이라면.”

“……!”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낚였구나!’

은근슬쩍 에이드리안을 오빠로 불렀더니 진짜로 동생인 줄 착각하는군!

사실 이렇게 닮았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잖아. 당연히 교차 검증 들어갈 거라 예상했는데.’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곤란한 건 제이드였다. 사실 그녀도 에이드리안의 진짜 동생이긴 한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도 가짜, 가이드도 가짜…… 심지어 영혼도 진짜가 아니지.’

아무리 내가 되는대로 산다지만, 이렇게 가짜투성이여도 되나?

때아닌 걱정을 하며 제이드는 창문 밖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동관의 진동이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악, 마이 아이즈-!’

언제 밤을 새웠지? 제이드는 눈을 찡그렸다.

창문 바깥, 오늘따라 햇살이 밝고 새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푸른 하늘 위에는…….

“……디뮈아드?!”

* * *

‘젠장!’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디뮈아드 라예르가를 산 채로 잡아 올 것.

그것이 계획이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몇이나 죽어 나가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디뮈아드 라예르가를 사지 멀쩡히 납치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그 소년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법한 약점도 함께 확보해 두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디뮈아드 라예르가 납치 단에 합류한 마법사, 세브릭은 이를 악물었다.

‘위대한 마탑주 엘리시어스의 보좌인 내가, 이런 잡것들하고 이딴 저열한 짓이나 해야 한다니!’

여태껏 실험체란 죄다 인신매매단들을 통해 구해 온 세브릭으로서는 이토록 야만적인 납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황실의 요구라 해도, 평소라면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 아랫급 마법사들을 시켰겠지.

하지만,

‘내 아들이 탈출했다지.’

‘…….’

‘마탑주의 설계라 그리도 자부하더니, 결과가 이게 뭐요?’

노먼 고드윈의 추궁으로 책이 잡혀버렸고, 마탑주 엘리시어스는 항의가 성가시다는 듯이 이어진 요구에 그냥 세브릭을 보내 버렸다.

‘잡아 와. 연구할 가치가 있는 실험체 같으니.’

‘하, 하지만 디뮈아드 라예르가를 납치하는 것은 황실…….’

‘납치에 성공하면, 다 죽여 버려. 그리고 가져오면 되겠지.’

황실이 겉으로는 이능력자들을 우대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마법사들보다도 더 견제하고 있다는 걸 세브릭도 알고 있었다.

‘감히 마탑주님은 건드릴 수 없으니, 이능력자들이라도 초장에 싹을 밟아버리겠다는 거야.’

그리고 황실은 디뮈아드 라예르가가 이능력자와 같은 잡것들을 견제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판단했으리라.

그러니 이렇게까지 지랄을 떠는 거겠지.

하지만 세브릭은 의문스러웠다.

‘대체…… 디뮈아드 라예르가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길래?’

미지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마법사로서의 본능적인 호기심이었다.

‘세브릭.’

하지만 마탑주 엘리시어스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세브릭의 머릿속에는 마법사의 본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를 맞이하게 되면, 인간은 두 가지 방식을 취한다.

신으로 숭배하거나, 악마로 두려워하거나.

그리고 세브릭에게 마탑주 엘리시어스는 신이자 악마였다. 마땅히 복종하고 경배해야 할.

세브릭은 감히 반항할 여지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새로운 계획을 짜냈다.

‘황실은 디뮈아드 라예르가를 납치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수단을 써도 좋다고 했지.’

그리하여 세브릭은 황실의 가차 없는 인명 경시를 이용해 판을 조종했다.

“커헉!”

“으, 으아아-!!”

먼저 황실의 기밀 무력 집단을 아이린 공녀와 기사들과 맞붙인 것이다.

‘살아남기 힘들겠지.’

전력을 다해 정면 돌파하게 했으니, 아이린 공녀 측에서도 손속을 봐가며 싸울 수 없을 테다.

세브릭은 도끼로 적을 내리찍는 아이린 공녀를 보며 조소했다.

라예르가의 주인인 그녀라면 이 사태가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함정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밟을 수밖에 없지.’

조소하던 세브릭은 미리 받아온 고드윈의 피를 동관에 뿌렸다.

그리고 마탑주가 마법을 불어넣은 마력석으로 고드윈의 본성에 걸린 마법을 망가트리는 이중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우웅-!

새벽의 동관에 불길한 보랏빛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해가 떠오른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오전.

“안 돼!”

동관의 비밀 통로가 고대 수호 마법진의 파훼로 일그러지며, 그 안에 숨어 있던 라예르가의 공자를 내뱉었다.

“디뮈아드-!”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