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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75화 (75/119)

75화

“…….”

한때는 이오게나 시온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자, 그러나 이제는 카밀로라는 이름으로 성별마저 속이고 살아가는 이가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제이드.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녀가 해리스 고드윈의 가이드이자, 레디안 백작가의 방계라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유폐당한 해리스 고드윈을 잘 보필한 공로로 단승 작위를 얻어, 이젠 리안 남작이라 불린다는 것도.

‘웃기지도 않아.’

카밀로는 이미 제이드에게 도착하기 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죄다 섭렵한 상태였다.

실제로는 레디안 백작 가문의 방계는커녕 평민조차 되지 못하는 노예.

그것도 노예 경매로 오르지도 못하는 최하급의 노예로 고드윈 령의 방치된 고성에 떼로 팔려 갔다…….

‘……이상하네?’

아무리 가이드인 것을 몰랐다 해도, 어린 요정족 혼혈이 최하급의 노예로 팔리다니.

‘그, 그러게요? 말씀하신 걸 들어 보니 이상하네요……. 감옥에 가기 전까지는 그런 애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리고 고성이 무너지기 전 탈출한 노예들의 말도 의미심장했다.

‘떼로 우리에 갇혀, 최소한의 간격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노예들이 인지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다.

탈주한 노예들 말로는, 당시 요정족 혼혈의 미인이 그들 사이에 끼어있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팔려 갈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노예 우리 사이에 끼어있었다고.

그리고 그들이 기억하는 요정족 혼혈의 미인은 한 명뿐이며…….

‘사내였다고 했어.’

약간 긴가민가할 정도로 중성적인 미모의.

머릿속 정보를 조율하던 카밀로는 확신했다.

‘……탈주 실험체.’

시기적으로 그게 맞았다.

마탑주 엘리시어스가 자리를 비우고, 용병왕 알루카스가 마탑을 파괴하며 갇혀 있던 실험체들이 죽거나 도주했었으니.

‘인신매매범들은 독자적인 루트를 뚫고 있어. 요정족 미인이라는 사내는 그 루트를 노려 노예 우리에 슬쩍 끼어들어 마탑의 영역 밖으로 도망친 거겠지.’

악질적인 인신매매범들은 그냥 길을 가던 사람도 잡아 올 수 있겠다 싶으면 잡기 때문에 그 하나 끼었다고 받을 일도 없었을 거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 소녀가 뿅! 하고 튀어나오며 그 동시에 요정족 미인은 자취를 감추었다.

‘어째서……?’

사실, 처음 카밀로가 찾았던 것은 그 요정족 미인의 사내였다.

‘……일어나.’

길게 늘어뜨린 짙은 분홍빛 머리카락. 희고 갸름한 얼굴은 수려했고 몸의 선은 가늘었다.

순간 여자라 착각할 정도의 미인이었지만…….

‘너는 죽지 못해. 그러니 이제 포기하고 깨어나.’

다감한 목소리와 다른 냉혹한 말. 올려다본 보랏빛 눈동자는 기묘한 안광을 띄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너무나 아름다워,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여 줬으면 하는 고통 속에서, 카밀로는 두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리 생각했었다.

그것이 가이딩을 받은 이능력자로서의 본능적인 경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몸이 회복된 뒤였다.

‘……에이드리안 님.’

하지만 그분은 사라졌다.

그 뒤 카밀로는 암흑가의 정보 길드에 들어갔고, 수장이 된 지금까지도 에이드리안을 찾고 있었다.

처음 제이드의 쪽지를 받았을 때, 카밀로는 고민했다.

‘죽여야 하나?’

해리스 고드윈이 고등급 이능력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이드를 총애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기예르 가이젠’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고등급 이능력자로 추정되는, 새로운 고드윈의 주인으로 등극한 해리스 고드윈을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충동을 누른 것은 정보 길드 수장으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과연 무엇을 얼마나 더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 모든 비밀을 함께한 이에게 도착할 방법일지도 모른다. 수족을 보낼 수 있었음에도 카밀로가 직접 찾아온 건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

조사 결과보다도 아름다운 용모에 카밀로는 속으로 매우 놀랐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에이드리안을 몹시 닮았기 때문이었다.

카밀로는 외형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는데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외형이었다.

‘심지어 특유의 기운마저도 묘하게 비슷하군……. 거기다 곧장 나를 알아보기까지 하다니.’

카밀로가 가진 변신의 이능은 S급 이능력자들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그런데도 제이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알아보기까지 했다는 건…….

“……변신의 이능을 각성한 뒤, 제일 먼저 생각한 건 하나였어.”

생각을 정리한 카밀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오게나 시온’을 죽여야겠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나 코어가 파괴된 이후, 이사그 공작 가문에서는 이오게나 시온이 죽었을 거라 짐작했으니까.

“실제로 죽기 직전이었지. 가이딩을 받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나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는 오직 자신과 에이드리안만이 아는 일이었다.

“……뒤는 너도 알고 있겠지?”

카밀로는 떡밥을 던졌다.

“네.”

그리고 제이드는 떡밥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아니기만 하면 되는 용병왕 알루카스나, 적의건 호감이건 둘 다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는 쾌락 살인마 듀크와 달리 카밀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패였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안을 구하려면 카밀로가 없어선 안 돼.’

솔직히 카밀로는 해리스보다 더 필요했다.

사실 해리스는 ‘황제의 관 가까이 가기에 편리한 권력자’에 불과하다.

그 이상으로 유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해리스의 힘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이드는 그가 이 일에 엮이는 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이길 바랐다.

‘해리스는 결국 내 억지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야.’

물론 본인도 동의한 거지만, 제이드에겐 자책감이 있었다.

에이드리안처럼 제대로 설득해 낸 게 아니라 상황과 요령을 이용해 밀어붙인 것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카밀로는 사정이 달랐다.

‘이러쿵저러쿵 단계가 많아지긴 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도둑질이지.’

그냥 은행을 털려고 해도 은행의 경비 시스템과 금고 상태 등의 기밀 정보가 필요할 텐데, 제국의 주인에게서 머리 위의 금관을 훔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구하려면?

‘정보 길드의 수장 정도는 확보해 놔야 해.’

그리고 카밀로는 아군이 되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카밀로는 <시천귀>에서 공인된 에이드리안의 아군이었으니까!

‘문제는 어디까지나 에이드리안의 아군이라는 거지.’

갑툭튀한 정체 모를 ‘제이드’에게도 아군이 되어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카밀로를 자극했다.

카밀로가 죽여서라도 감추려 했던 비밀과 정체를 까발렸고, 그리고 그것을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는 사람의 이름을 쪽지에 써서 보냈다.

카밀로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내가 에이드리안의 사람이며, 카밀로에게도 아군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에이드리안…… 오빠가 알려주었으니까요.”

정확히는 <시천귀>로 알게 된 거지만, 주인공인 에이드리안 시점으로 나왔으니 그가 알려준 거나 다름없지 뭐.

죽어가던 에이드리안의 가이딩과 보살핌으로 목숨을 구한 카밀로는, 그와 함께 가짜 시체를 구해 ‘이오게나 시온’을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한다.

그렇게 카밀로는 공식적으로 이사그 공작 가의 추적에서도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점에 에이드리안은 다시 납치당한다.

‘거기다, 기예르 가이젠이 깨어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어.’

왜인지 그는 이오게나 시온의 죽음을 믿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것조차 부정했다.

‘그리고 찾으려 했지.’

그를 피해 숨어든 암흑가에서 카밀로는 적성을 찾아 정보 길드의 수장까지 접수해버리게 되지만…….

“…….”

제이드의 말을 듣는 내내 카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 길드의 수장으로서, 카밀로는 숨 쉬듯 사람의 반응과 행동에서 정보를 읽어냈으니까.

‘……진짜다.’

이 소녀는 정말로 에이드리안 님과 관련이 있다.

제이드의 외형과 태도, 해리스 고드윈의 가이드로서 그녀가 여태껏 보여준 놀라운 행보…….

그 모든 것에 마음이 기울었지만, 그래도 카밀로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따르게 하기엔 부족했다.

적당히 정보만 제공해줄까, 카밀로가 마음의 저울을 움직이던 순간…….

‘흐음, 어디까지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고민하던 제이드는 무심코 목걸이의 돌멩이(에이드리안)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밀로가 결코 잊지 못한 강렬한 파장이 제이드의 심장께로부터 퍼져갔다.

‘……!!’

카밀로는 숨을 삼켰다. 이미 한 번 맛보았던, 그리하여 더욱 황홀한 안식.

그 순간 완전하지 못하던 마음이 확신으로 돌변했다.

“-래서, 지금 해주석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두루뭉술하게 에이드리안이 현재 처한 상황을 설명하던 제이드는 흠칫했다.

‘어, 언제 얼굴을 깠지?’

카밀로는 절대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수족들에게조차 계속 다른 사람의 외형으로 대해 왔다.

물론 제이드는 카밀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시천귀>에서 자주 나온 묘사에 따르면, 감청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처연한 느낌의 미인으로, 눈가 바로 아래에 점이 박혀 있다고 했으니까.

어디까지나 ‘알고만’ 있었다.

‘이렇게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정체를 숨기던 로브의 사내가 어느덧 수려한 미녀로 변해 있자, 제이드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그 때문에 카밀로 님을 부른 거고요. 물론 안 믿기시겠지만…….”

“아뇨, 믿습니다.”

“……대신 제가 증거로써, 네?”

제이드는 멈칫한 순간, 카밀로는 눈매를 곱게 접어 황홀할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무엇이든 분부만 하세요.

홀린 듯 멍하니 고개 끄덕이던 제이드는 뒤늦게 흠칫했다.

‘응? 잠깐.’

나 방금 몇 단계 건너뛴 거 같은데……?

제이드가 의문을 품은 순간이었다.

쿠궁-!

건물에 충격이 가해진 것처럼 동관 전체에 진동이 울려왔다.

“……?!”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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