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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74화 (74/119)

74화

오싹했다.

정이 든 메이의 얼굴이 너무나 이질적인 미소를 짓는 모습은 공포 영화가 떠오를 정도였다.

“어디서부터 들킨 걸까?”

슥, 메이드복을 입은 여인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깐의 움직임에 가려졌던 얼굴은 다른 외형으로 뒤바뀌며, 새까만 잉크를 부은 듯 어두운 로브의 사내가 그곳에 자리했다.

이번에는 로브의 깊숙한 후드 속 얼굴이 얼핏 미형으로 보인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았다.

사내, 카밀로는 내 건너편에 앉으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궁금해……. 하긴,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지.”

툭, 카밀로가 내 앞의 탁자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우선, 내게 왜 이 쪽지를 보냈는지부터 설명을 듣고 싶군.”

곱게 접혀 있던 쪽지 위에는 내가 알루카스를 통해 정보 길드의 수장에게 전해 달라 부탁한, 그리고 반드시 답이 올 거라 확신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예르 가이젠.]

그건 최근 이사그 공작 가문에서 배출한 후계자의 이름이었다.

앞서 말했듯, 북부의 이사그 공작 가문은 혈족 계승이 아니다.

초대 공작이었던 성기사 이사그는 고드윈이나 라예르가와 달리, 부유한 봉토를 거절하고 척박한 북부로 가겠노라 자처했다.

당시 북부는 멸망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지역 중 하나였다.

공허가 봉인된 이후에도 나타나는 괴수들과 얼어붙은 대지, 그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인한 인간 불신과 슬럼화…….

‘거의 무법지대에 가까운 곳이었지.’

갓 건국된 제국 따위야 당연히 그런 지역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사그 공작에겐 있었다.

그는 황폐해진 북부에 찾아오는 마수들을 본인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물리쳤으며, 세상을 구한 공로로 얻은 부와 명예로 곡물을 사 굶주린 영지민들에게 베풀었다.

또한 북부를 슬럼화시키는 범죄자들을 단호히 처벌하는 등 엄격한 리더십으로 분산되어 있던 북부민들을 통합했다…….

‘그래그래, 엄청나게 위대하고도 지루하시지.’

이 세계 사람들에게나 대단한 인물이지만 독자로서는 이토록 모범적인 위인은 재미없게 마련이다.

심지어 주요 인물도 아닌 설정상 존재하는 엑스트라!

당연히 기억할 수 없다. 기억할 수 없는 게 당연한데, 어째서 기억하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이사그 공작은 <시천귀> 피셜 동정남이었으니까!’

용사이면서 순결을 지킨 성기사다? 이런 설정은 못 잊지.

이사그 공작은 본디 성녀를 모시겠노라 맹세한 성기사였다.

그는 일생 자신의 맹세를 지켜, 죽는 그 날까지 혼인하지 않고 자식도 보지 않으며 고아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렇게 이사그 공작에게서 손수 무예를 시사 받은 고아들은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기사들로 성장하며, 괴수들로부터 북부를 수도하는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제자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제자를 뽑아 가문을 물려주었지.’

여기까지만 보면, 삐딱한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냥 미화 아니야?

-공식적으로는 결혼 안 했더라도, 뒤에서 여자들과 놀아났을지 누가 알아.

-응, 안 믿어~ 이러다 반전으로 사생아 나올 거임~

그리고 이 생각은 <시천귀> 세계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간에선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이름 날린, 그리하여 2대 이사그 공작이 된 나리아를 ‘이사그 공작의 사생아’로 어림짐작했다.

그리고 황실을 비롯한 각종 권력 가문에서 혼담을 제시했다.

이사그 공작 가문이 북부를 꽉 장악했으니 이제 혼맥으로 제국과 엮어보겠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송구합니다만, 저는 혼인할 수 없는 몸입니다. 혼담을 모두 거두어주십시오.”」

나리아는 공개적으로 모든 혼담을 거절했다.

물론 구혼자들은 순순히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사그 공작, 아무리 선대 공작이 성기사로서 순결을 맹세했다지만 그대까지 유지를 이어받을 필요는 없지 않소?”

“어허! 공작, 이사그 가문은 제국의 개국 공신 가문일세. 그대는 정녕 그 가문의 대를 끊을 생각인가?”

“공작, 이건 명령이네. 합당한 사유를 들지 않는다면 거절은 받아들이지 않겠어.”」

사방에서 빗발치는 항의에 나리아는 결국 이유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저는 혼담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지?”

“선대 이사그 공작께서 완성하신 무예는, 오직 순결한 몸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나리아의 답변에 제국이 뒤집혔다.

‘뭐 저런 무공이 다 있어?!’ 하고 경악하는 반응 반, ‘맙소사, 용사 이사그 공작은 정말로 죽을 때까지 동정남이었구나!’ 하고 충격받는 반응 반으로.

게다가 순결을 잃는 즉시 쌓아둔 무공이 무(無)로 돌아가며 코어가 파괴되고 육신은 사망에 다다르게 된다는 극단적 부작용까지 알려지자 온 대륙이 들썩였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광기……!’

독자인 나조차도 놀라웠다.

‘저거 동자공(童子功)이잖아!’

무협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하지만 주인공은 고자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절대 익히지 않는, 그래도 워낙 대단한 무공이라 조연들은 종종 배운다는 바로 그 전설의 스킬……!

‘이걸 서양 판타지에서 보게 되다니!’

역시 온갖 설정이 버무리된 <시천귀>, 없는 것 빼고 다 있어!

아무튼 나리아가 밝힌 사연으로 인해 이사그 공작 가문에 쏟아지던 혼담이 싹 들어간 것은 물론, 이사그 공작 가문 고유의 무공을 탐내던 이들 대다수를 꼬리를 내리게 했다.

‘고자로 살긴 싫었나 보지?’

물론 모두가 나리아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세상엔 하지 말라는데 굳이 하는 염병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염병이 중 하나는 이사그 공작 가문이 거두어 키우는 고아로 잠입해 무공을 빼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아악-!”」

그렇게 불손한 마음으로 무공을 익혔던 염병이가 뒷골목의 여관에서 여자와 발견되었는데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조사 결과 정말로 마나 코어가 파괴되어 쇼크사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엔 조용해졌다고.

‘뭐, 그러고도 모자라 이사그 기사단을 유혹하는 둥 은밀히 시도가 이어지긴 했지만…….’

유혹에 넘어가 동정을 잃은 기사들이 연이어 사망하거나 패인이 되면서 개수작 부리는 이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사그 공작 가문은 무협 세계의 문파와도 같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혈통의 고귀함 따윈 1도 없다는 거지.’

그래서 3대 개국 공신 가문 중에서도 유일하게 황실과 혼맥을 잇지 않은 가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혼인 동맹이 불가능한 가문인걸.’

하지만 혈통이 고귀하지 않다고 한들, 그 누가 이사그 공작 가문을 고결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랴.

어떤 의미로 황실보다도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예르 가이젠’은 그렇게 대단한 가문에서 후계자로 뽑히게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사그 공작 가문이 본디 후계자로 내세웠던 인물은 그가 아니라…….

“이사그의 추악한 탕녀, ‘이오게나 시온’이었지.”

카밀로는 차분히 답했다.

“네가 쥔 통속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

제목만 봐도 알겠지만, 19금 소설인 <타락한 기사님은 밤이면 밤마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고결하기로 명성 높은 기사, ‘이온’은 사실 누구보다 타락한 기사였고, 밤이면 밤마다 순결하지 못한 짓을 하다가 들킨다.

이토록 심플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 이 <타락 기사>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에는,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감과 다채로운 19금 씬 덕분도 있지만…….

‘실존 인물 모티프라는 점이 가장 크지.’

과거, 이사그 공작 가에는 두 명의 총아가 있었다고 한다.

초대 이사그 공작을 빼닮은 듯 아름답고 강인하던 이오게나 시온.

그리고 무예에 미친 기예르 가이젠.

본디 기예르 가이젠은 북부의 산맥을 굴러다니던 고아로, 산맥의 주민들은 괴물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 꼬마 괴물에게 ‘가이젠’이라는 이름을 주고, 이사그 공작 가문으로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이오게나 시온이었다.

당시 소공작이었던 이오게나 시온은 친히 무예를 시사할 정도로 가이젠을 총애해,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장한 가이젠의 무력이 이오게나를 뛰어넘게 된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게 된다.

그리고 이사그 공작이 가이젠에게 ‘기예르’라는 두 번째 이름을 내리면서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난다.

‘두 번째 이름은 후계자에게나 내리는 거였으니.’

이는 이사그 공작이 암묵적으로 후계자를 교체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거나 다름없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미쳐 버린 이오게나 시온은 끝내 추악한 계략을 부리게 된다.

미인과 술, 마약을 이용해 기예르 가이젠을 타락시키고 그의 순결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

‘무예의 특성상 암살 시도나 다름없어.’

하지만 외골수 무인 기예르 가이젠은 넘어가지 않았고, 도리어 악독한 이오게나 시온이 제 꾀에 넘어가…….

“순결을 잃고 죽었다지.”

카밀로의 차분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명예롭기로 유명하던 이사그 공작 가문에서 일어났다기엔 너무나 자극적이고 막장이라 제국 전역이 떠들썩해졌다고 한다.

‘이런 통속 소설마저 나올 정도로.’

그리고 한참 과거의 일인데도, 지금도 그 주제로 쓰인 통속 소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 정도로 인기 있는 루머기도 했다.

“만에 하나 살았어도 마나 코어가 파괴되었을 테니, 죽은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을 거야.”

로브 아래, 여전히 얼굴이 가려진 카밀로는 남 일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맞아요, 보통은 그랬겠지만…….”

남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천천히 말했다.

“다행히 당신은 살았지요.”

“……뭐?”

“죽어가던 와중 이능력자로 각성하고, 운 좋게도 지나가던 가이드에게 발견되어 가이딩도 받았으니까요.”

바로, 최강의 가이드인 에이드리안에게.

나는 에이드리안과 닮은 얼굴로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나요, 이오게나 시온?”

이름을 바꾸고 성별을 감추며 정체마저도 숨기고 정보 길드의 수장으로 살아온 자.

이오게나 시온이 얼어붙은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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