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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73화 (73/119)

73화

무려 라예르가의 주인을 그녀의 딸 앞에서 욕한 거였지만…….

“아, 그랬나요?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나는 사과하지 않았다. 실례라 해도 별로 미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쪽이 더 심했잖아!

‘생각해 보면 이상했어.’

라예르가의 둘째 공자나 되는 디뮈아드가 복도에 혼자 있던 시점부터 말이 안 된다. 그때부터 의심해야 했어!

‘……이미 늦었지만.’

뭐, 다들 좀 정신 나간 것 같지만 일단 저렇게 바로 튀어나온 걸 보면 아마 지켜보고 있었던 거겠지. 우리가 정말로 다치기 전에 구해주긴 했을 거야, 아마.

‘근데 나는 왜?!’

왜 나까지 그 미친 생존 교육에 끼어 들어가게 된 건가! 난 라예르가와 뭣도 관계없는 남인데!

‘이래 봬도 진짜 무서웠단 말야!’

뭐, 식인 식물 괴수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 빨리 해치우긴 했지만(라예르가 나름의 밸런스 조절이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이런 위기와 시련이 나한테 닥칠 이유가 없잖아!

‘심지어 괜히 전력만 노출해 버렸어…….’

내가 무어라 따지기도 전, 아이린 공녀는 ‘흠, 그나저나 권총이라. 각하께 허가는 받은 건가?’ 하고 물어서 내 입을 봉쇄해 버렸다.

내 눈빛을 알아차린 레노르는 부끄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원래는 그대가 가고 나면 하려고 했는데, 인형이 통제를 벗어나 버려서…….”

“그럼 그만둬야죠!”

“그렇지.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그대가 너무 잘 싸우더군.”

“네?”

갑자기 내 싸움 실력이 거기서 왜 나와.

그러나 의아한 나와 달리 검술 덕후 레노르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끼어들 타이밍도 놓쳤고 혼자서 잘하기도 해서 그냥 처리될 때까지 기다렸지. 그대, 정말 빨리 처리하더군?”

“…….”

난 기가 막혀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그럴 때는 타이밍을 보는 게 아니라 그냥 튀어나오는 거라고!

“역시 대단하오.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리안 남작, 기사가 될 자질이 충분하네.”

하지만 동지를 만나 흥분한 기사 덕후 레노르는 역시나 덕후답게 상대의 반응을 읽지 못하고 열변을 토했다.

“아니, 앞뒤 가리지 않고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도를 고려하면 리안 남작은 이미 기사나 다름없소!”

아니라고! 안 될 거야, 그 망할 놈의 기사!

할 말은 많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디뮈아드를 두고 돌아서기 전에 들었던 아이린 공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 떨어트린 후 기어 올라온 새끼만을 키운다고 하지.’

안 그러거든!

가뜩이나 살아남기 어려운 야생의 세계.

사자는 최상위 포식자답게 적도 많아서, 지가 죽인 다른 동물들한테 새끼가 죽임당할까 봐 완전 애지중지 키우고 교육한다!

‘진짜 뭘 알고나 말하세요!’

저건 40년을 산 늙은 독수리가 더 강해지기 위해 자신의 부리를 부러뜨려 버린다는 낭설보다도 유명한 개소리다!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그 역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다른 집안의 가정 교육에 타인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상식 때문도 있었지만…….

‘아이린 공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디뮈아드를 질책하는 얼굴은 한 가문의 주인답게 엄격했지만, 초조함과 불안감이 엿보였다.

‘저런 미친 짓을 해서라도 아들을 방비시켜야 한다고 믿는 건가.’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아니라는 말도 못 하겠다.

아마 원래의 아이린 공녀도 저렇게 디뮈아드를 미친 방식으로 방비시키지 않았을까?

그러나 끝내 아이린 공녀는 살해당했고,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지키길 원했던 디뮈아드도 죽었다.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습격 때문일까.’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남기 위해 아이린 공녀도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거다.

‘비록 좀 미친 방법이지만…….’

어쨌거나 디뮈아드도 합의한 내용이겠지. 그 성격상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키면 하겠어? 싸가지 바가지를 부리며 진상 부리지 않을까.

저 미친 짓을 따르는 걸 보면 자기가 생각해도 필요하다 싶었던 걸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동 학대 같지만…….’

하여간 <시천귀>, 디스토피아 배경이라 기본적인 인권도 안 지켜준다. 해리스도 그렇고, 우리 오빠충 에이드리안도…….

“네에,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대충 답하며 에이드리안(돌멩이)을 만지작거렸다. 하여간 여긴 정말 다들 불행하고 불쌍한 애들밖에 없다니깐.

“나야말로 고맙소.”

레노르는 다시 감사 인사를 했고, 우리는 몇 마디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렇군.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어 정말이지 고맙네. 라예르가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야.”

라예르가 이름 걸고 뭐 하나 부탁하면 들어주겠다는, ‘라예르가 한정 소원권’까지 쥐여주고서.

나는 사라지는 뒷모습을 배웅하며 속으로 신기해했다.

‘레노르, 정말 성격이 좋구나.’

사실 뭣도 아닌 내가 충고한 것을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데, 순수하게 감사하고 편견 없이 듣는 저 태도라니.

사실 ‘라예르가’라는 거창한 이름과 죽음의 위기만 뺀다면 저들은 꽤나 흔한 가족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남동생.

반대로 가족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데 책임은 더해진 상태의 장녀.

‘게다가 180도로 돌아버린 엄마까지.’

딱 가정 파탄 나기 좋은 상황일 텐데, 레노르라는 자기중심이 단단한 사람이 들어가서 약간 이상하지만 그래도 화목한 가정이 유지된 것처럼 보인다.

‘서글서글하고 뒤끝 없다는 것 말고도 기본적으로 멘탈 회복력이 좋은 느낌이야.’

참 좋은데…… 너무 좋아서 차기 가주가 저래도 괜찮은가 살짝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 험난한 세상, 저러다 호구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뭘 걱정까지 해?’

던전으로 떠나기 전, 해리스가 언짢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쓸데없이 마음 쓸 필요 없어. 라예르가 소후작이 정말로 그렇게 속없이 성격 좋은 사람이라 해도, 가문이 망할 일은 없을 테니.’

‘번영의 반지, 덕분이랬나.’

세상을 멸망에서 구한 용사들, 그들은 의로운 선을 행한 대가로 거룩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용사이자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인 라예르가의 초대 가주, 시오니 라예르가는…….

‘고아였어. 정확히는 멸문당한 가문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 살아남기 위해 거지처럼 비천하게 살았다더군.’

그리고 번영의 돌을 받은 시오니 라예르가는 가주의 인장 반지에 그것을 박았고, 그 이후 라예르가의 인장 반지는 ‘번영의 반지’라 불렀다고 한다.

그 덕분일까, 라예르가는 람서스 제국의 역사 내 패가망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안 믿는 표정이네? 해주석은 믿으면서.’

‘……!’

알고 보니 해주석도 번영의 돌과 마찬가지로 그때 받은 성물 중 하나란다.

초대 건국 황제, 람서스는 적이 많았다.

그는 달려드는 암살자와 적들은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저주와 마법은 두려워했다.

‘그 공포로부터 해방되길 원해서, ‘해방의 돌’이라…….’

그게 해주석의 다른 이름이었다니. 너무나 빨간 맛 나는 이름이라 <시천귀>에 안 나왔나.

‘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나?’

주로 애정하는 캐릭터들 위주로만 복습해서 그런가. 일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시천귀>의 백과사전으로 살지 않던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보자, 용사들이 대충 다섯인가 여섯이었는데.’

람서스(건국 황제), 고드윈(공작). 라예르가(후작). 그리고 성녀랑…….

‘아, 성녀를 수호하던 성기사가 세운 가문!’

이사그 공작 가.

로판 특유의 ‘북부의 대공’ 밈처럼 이쪽도 척박한 북부에서 강인하게 가문을 지켜온 가문인데, 사실 이쪽은 그보다 다른 점들이 더 유명했다.

첫째, 이사그 공작 가문은 성기사가 세운 가문이어서인지 혈족 계승이 아니었다.

성기사 이사그는 죽을 때까지 혼인하지 않았고, 황폐한 북부의 고아들을 거둬 키운 뒤 가장 합당한 제자에게 가문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서양 판타지의 귀족 가문(家門)보다는 무협의 문파(門派)에 가까운 이미지였지.’

그리고 둘째로는…….

“……?!”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눈이 커다래지고, 호흡이 일순 멎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내 침실, 고요한 공간이 이질적으로 인지되는 것은 꽤 기이한 감각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선 난 방을 정리하는 하녀 언니를 발견했다.

“아, 제이드 님.”

익숙한 목소리, 낯익은 얼굴.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 메이였다.

“돌아오셨군요.”

그녀는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책들을 정돈하며 내게 빙긋 웃어 보였다.

“피로하진 않으신가요?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무형의 공기를 떠도는 먼지와 빛, 그리고 열린 창문의 틈새로 스며드는 바깥바람.

그 사이로 숨죽이듯 존재감을 감춘 강대한 마력이 느껴진다.

나는 메이가 건네는 요깃거리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와 신선한 과일이 먹기 좋게 한 입 거리 사이즈로 준비되어있었다.

평소와 같이.

“…….”

나는 요깃거리를 받아 근처의 소파에 앉았다. 거기에도 내가 대충 읽다가 던져둔 책이 엎어져 있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메이는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이드 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하문…….”

“이런 책 보면, 기분 나빠요?”

나는 책 제목이 보이게 들어 올렸다.

<타락한 기사님은 밤이면 밤마다>

노골적인 19금 제목에 메이는 말문을 잃은 얼굴이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 전, 메이는 밤새 <타락 기사>를 읽느라 벌게진 눈으로 ‘완결권 내놔!’ 하고 외쳤었으니까.

그러나 그때와 똑같은 사람, 아니 정확히는 ‘똑같이 생긴 사람’은 책에서 시선을 비껴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카밀로.’

정보 길드의 수장이자 성기사 가문, 이사그에서 파문당한 자.

그로서 <타락 기사>라는 소설의 모티프가 되어버린 인물이, 익숙한 얼굴로 낯선 미소를 그려냈다.

“들켰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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