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비꼬는 얇은 목소리의 주인은…….
“……라예르가 둘째 공자님.”
디뮈아드였다.
‘젠장.’
이렇게 딱 마주쳐 버리다니.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뭐,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난 동관의 거처로 가고 있었고, 아이린 공녀와 가족들도 동관의 거처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용병왕 새끼를 보고 왔다지.”
그래도 이렇게 시비 털리는 건 짜증 난다…….
“해리스 고드윈의 반려 가이드라더니, 천박하기 그지없는 행태야. 정말이지-”
왈왈, 컹커컹-!
난 디뮈아드의 막말을 자체적으로 뮤트 처리하며 생각했다.
‘쟤는 대체 왜 이럴까.’
라예르가의 둘째 공자, 디뮈아드는 신이 직접 숨결을 불어 넣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순도 높은 은을 직접 실로 뽑아낸 듯 눈부신 은회색 머리카락과 와인색으로 짙은 자줏빛 눈동자.
최고의 장인이 심열을 다해 빚어놓은 듯한 이목구비가 자그마한 얼굴에 박혀 있다.
그리고 붉은 장미꽃잎을 물고 있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입술은…….
“한 치라도 이능력자 곁에 달라붙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
……멈추지 않고 개소리를 지껄였다. 난 잠시 열었던 귀를 다시 뮤트시켰다.
‘애는 내가 진짜 그렇게 싫은가?’
이젠 좀 의아할 지경이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이렇게 보자마자 득달같이 쫓아와 왈왈 짖어대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도 관심의 일종이라던데, 확실히 난 내가 싫어하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못 기울이겠어. 그냥 무시하고 말지.
‘혹시, 애가 이렇게 나한테 집요하리만치 못되게 구는 건…….’
나를 보면 떠오르는 게 있어서인까? 다시 속이 복잡해졌다.
‘아이린 공녀가 원래의 <시천귀> 전개와 달리 후계권을 운운하며 고드윈에 들어온 것은, 디뮈아드 때문일 거야.’
전염병 사태 이후, 아이린 공녀 부부는 빠르게 라예르가를 수습했다.
그러나 빠른 성장에는 반드시 뒤탈이 있게 마련인데, 라예르가의 경우에는 그것이 보안이었을 확률이 크다.
‘안 그럼 왜 갑작스럽게 습격이 일어났고 아이린 공녀가 살해당했겠어.’
본래도 라예르가는 교역의 중심지다. 온갖 사람이 오가는 곳.
‘즉, 각종 범죄자와 암살자, 용병을 비롯한 무력 집단이 스며들어도 잡기 쉽지 않은 곳이란 말이지.’
라예르가는 제국의 3대 명문가다.
그런 곳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은, 그 습격이 충동적이고 급작스럽게 일어난 사태가 아닌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과 음해의 결과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라예르가를 노린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자가 진정으로 노린 것은 대체 뭐지?
‘……모르겠다!’
정보와 두뇌가 제한적이라 거기까진 역시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린 공녀는 알고 있겠지.’
그럼 그녀로부터 역추적하면 된다.
아이린 공녀가 고드윈으로 온 이유, 그녀가 연회장에서 보인 목적, 그리고 해리스와 나를 보던 시선…….
‘……아이린 공녀의 목적은 고드윈의 후계권이 아니야.’
그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을 데려왔다는 건, 후계권을 핑계로 아이들을 고드윈에 대피시켰다는 말이 된다.
라예르가에서는 보호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보면 아이린 공녀의 행동이 이해돼.’
진정으로 고드윈의 후계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닌, 대외적으로 그런 시선을 받는 게 목적이겠지.
진심으로 후계권을 노린다면 해리스와 전면으로 붙어야 했고, 오래 버티려면 그런 척 속이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린 공녀는 자신의 목표를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해리스와 말을 섞기도 전에 사태를 무마시켰다.
심지어 개판으로 끝난 첫날의 연회 이후 가신들과 방계들이 도망치게 내버려 뒀다.
아이린 공녀가 후계권을 위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난장판이 된 연회 이후 귀부인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그 기회조차 방치했지.’
심지어 그다음 날 마주친 레노르는 자신을 ‘라예르가 소후작’이라 칭했다.
비록 내가 고의적으로 그 말을 내뱉도록 먼저 꺼내긴 했지만, 정말로 고드윈의 후계자를 노리고 왔다면 의식적으로라도 라예르가의 이름을 사용하진 않았을 텐데.
최소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사용인들이라도 눈치를 주었겠지.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군.’
아이린 공녀가 라예르가를 피해 고드윈으로 온 것도, 그 명분으로 후계권을 꺼내 든 것도 모두.
그리고 그렇게 급하게라도 움직여서 보호하려는 자식은…….
‘레노르가 아니야.’
<시천귀>에서 레노르는 순조로이 라예르가의 후작이 되었으니까.
정말로 그녀를 노린 거라면, 아이린 공녀와 디뮈아드가 죽었어도 습격이 이어졌어야 할 텐데도.
‘목적은 디뮈아드다, 그래야만 말이 돼.’
아이린 공녀가 목숨 걸고 싸울 이유도, 어머니의 죽음에 끝내 디뮈아드가 자살한 것도, 그 후엔 더 이상 라예르가에 분란이 생기지 않은 것도.
‘……디뮈아드의 정체가 뭐지?’
대체 이 미소년의 비밀이 무엇이길래 이렇게도 집요하게 노려지는 것일까.
그것도 제국의 개국 공신 가문이자 3대 명문가인 라예르가조차 핑곗거리를 만들어 도망칠 정도의 미친 적에게.
‘뭔가 익숙한데.’
분명 이런 식으로 미친 듯이 집착 당하고 도망치다 비참하게 죽는 사람을 한 명 더 아는데…….
“……야!”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돌멩이(에이드리안)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흠칫 놀랐다.
“듣고 있어?”
디뮈아드의 앙칼진 외침에 난 얼른 답했다.
“아, 아니요.”
“뭐? 이 미천한 가이드 따위가 감히-”
“……?!”
갑자기 바늘에라도 찔린 듯 신경이 곤두세워지며, 난 황급히 디뮈아드를 내 뒤로 숨겼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디뮈아드를 무시하며 전방을 주시하자, 예민해진 감각은 곧바로 촉을 건드린 ‘그것’을 발견했다.
“……?!”
뭐야 저거!
* * *
[꾸으엑-!]
‘그것’은 기괴하고도 불길한 마력을 뿜어내는 봉제 인형이었다.
외향만 보면 그냥 크리피한 인형이네, 하고 말 것이 커다란 가위와 칼을 쥐고 철컥- 철컥! 하고 날을 세우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괴물이요? 여기서요?!’
제이드는 눈을 깜빡이며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 장소가 잘못된 거 아니야?
심지어 눈 부분에 달린 단추가 자신들을 정확히 향하더니…….
[쿠엑!]
공격하잖아-!
“으아아!”
제이드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바싹 얼어붙은 디뮈아드의 어깨를 잡아 다가오는 칼날을 피했다.
‘몸집은 작은 게 공격은 엄청나게 잽싸다!’
드드득- 매서운 칼날의 움직임이 커튼을 찢고 카펫마저 뜯어버렸다.
‘미친!’
잘못 스쳤다간 살 찢기겠어! 제이드는 디뮈아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건지, 디뮈아드도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놔! 놓고 꺼지라고, 이 천것아!”
“……너 진짜 이 와중에도 이럴래?!”
심지어 디뮈아드는 자신이 어깨를 끌고 피하는 것이 싫다는 듯 몸부림치기까지 했다.
‘아니, 내가 아무리 싫어도 때와 상황은 가려야 할 거 아니니!’
나라고 널 이렇게 보호해주고 싶은 줄 알아? 이 싸가지 도련님의 보모 어디 갔어!
‘최소한 레노르라도?’
제이드는 봉제 인형 괴수의 공격을 피하며 다급히 동관의 복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
라예르가에서 쫓아온 사용인들이나 경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왜?!’
동관이 원래 조용한 곳이긴 했지만, 자신과 해리스가 머물기 시작한 뒤부터 이렇게까지 사람 없이 고요하진 않았다.
심지어 아이린 공녀와 라예르가의 남매가 머물며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한 이후엔 살짝 북적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복도 한복판에서 공격당하고 기물이 부서지며 각종 소음이 터지고 있는 지금,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디뮈아드 혼자서 이 괴수와 상대하도록 판을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설마, 디뮈아드를 노리는 적?!’
사태를 파악한 제이드는 절규했다.
“왜 하필 나도 같이 휘말린 거야!”
“누가 도와달래?! 꺼져, 꺼지라고!”
제이드와 디뮈아드가 악을 쓰는 와중, 어느덧 봉제 인형 괴물이 코앞까지 날아왔다.
[뀨엑!]
“으악!”
당장에라도 가위로 자신을 썰어 버릴 듯한 기세에 제이드는 일단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들고 휘둘렀다.
퍼억-!
거대한 촛대로 흉악한 봉제 인형 괴수를 후려갈겼지만…….
[뀩!]
봉제 인형 괴수는 공격이 닿기도 전에 금속 촛대를 날카로운 칼날로 자르며 뒤로 피했다.
‘하지만 난 그것 또한 예상했다!’
제이드는 봉제 인형 괴수가 물러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공수 전환을 했다.
“흐아압!”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이 새끼부터 조지고 본다!
제이드는 뒷걸음질 치는 봉제 인형에게 촛대와 화병, 손에 닿고 집어 던질 수 있는 무엇이건 던지고 휘둘렀다.
쨍그랑- 쾅! 으드득-!
각종 값비싸고 진귀한 귀물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제이드는 아주 잠깐 속으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선대 공작님. 하지만 저도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청구는 따님에게 하세요!
“죽어! 죽어! 죽어-!!”
[꾸, 꾸엑……!]
제이드의 맹렬한 역공의 결과, 봉제 인형은 점차 코너로 몰려갔다.
하지만.
“뭐, 뭐 하는 짓이야? 위험하다고!”
사색이 된 디뮈아드가 제이드를 뜯어말렸다.
‘이게 진짜 미쳤나!’
그의 눈에 제이드는 예쁘장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외형의 소유자였다. 박빙으로 싸우는 지금마저도 훼까닥 돌아버린 객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해, 미친 짓 그만하고 당장-”
“시끄러!”
그러나 디뮈아드가 모르고 있었을 뿐, 제이드는 던전의 식인 괴수까지 상대하던 몸이었다.
즉, 봉제 인형 괴수가 갑자기 나타나 놀랐을 뿐이지 해치울 자신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시끄럽고 빨리 내 뒤에 서기나 해라!”
“…….”
제이드의 기세에 밀린 디뮈아드는 그녀가 반말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주춤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찰나가 독이 되었다. 봉제 인형은 제이드가 잠시 돌아본 순간 곧바로 디뮈아드를 공격하려 칼을 휘둘렀다.
[꾸에엑-!]
“……!”
다가오는 섬뜩한 살기와 번뜩이는 칼날. 디뮈아드는 바싹 얼어붙었다.
그렇게 작고 정교한 디뮈아드의 얼굴에 칼이 찍히려던 순간이었다.
“안 돼!”
번개같이 권총을 꺼내든 제이드가 두 발의 탄환을 갈겼다.
탕- 탕!
하나는 정확히 봉제 인형의 머리를 터뜨리고, 다른 하나는 칼을 쥔 팔을 날렸다.
“꾸에엑-!”
괴수 인형의 괴성이 복도를 가득 울렸다.
그러나 디뮈아드의 신경은 자신을 죽일 뻔한 괴수가 아닌, 총을 든 채 이를 악문 제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
온통 새빨개진,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