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날 해리스를 찾아온 것은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였다.
‘던전이 터졌습니다……!’
에효,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균열이 던전화될 때까지 방치해? 장난하냐.’
그러나 던전이 발생한 곳은 해리스 반대파 쪽 영지였다.
‘뭐, 그나마 강경파는 아니었지만…….’
연회에서 어떻게든 사바사바를 잘해 놨다면, 해리스가 소공작이 된 겸, 어떻게든 읍소할 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의 연회는 ‘기쁘다 해리스 소공작 되셨네’가 아니라 ‘패륜아의 자식놈은 결사반대’에 가깝게 진행되었던지라…….
‘휩쓸려서 몇 마디 거들었다가 나중에 정신 차리고 선대 공작님께 사죄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고.’
결국 차일피일 시간이 늦춰지며 던전 사태가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해리스는 선대 공작이 선언한 고드윈의 소공작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해리스는 나와 약속을 했다. 소공작이 되어주겠다고.
그래서인지 해리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빠르게 출발했다.
‘등급이 크게 높은 던전은 아니라더군. 빨리 끝내고 돌아올 테니 넌 여기 있어.’
‘넵.’
‘이렇게 대답해놓고 몰래 따라온 거 발각되면 진짜 후회하게 만들어준다.’
‘아, 진짜 안 간다고!’
제이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원래도 갈 생각 없었거든? 그때는 목적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어쨌거나, 이번 일에서 수확이 없진 않았다. 그 반대파의 충성 지지를 받아낸 건 물론이고 덤으로…….
“알루카스, 이 자식이.”
정보도 좀 얻어냈지. 제이드는 서관 알루카스의 거처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하긴,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불길한 떡밥 미소 지었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처럼 바쁘고 콧대 높은 사람이, 제아무리 선대 고드윈 공작이 불렀다고 해도 언노운 던전까지 너무 빨리 도착했다 싶더니.
“라예르가에서 한 건 하셨네, 하셨어.”
어쩌다 안면이 있는 건가 싶었는데 의뢰까지 받은 사이였다.
하긴, 용병들에겐 고드윈의 반쪽짜리 주인보다 라예르가 후작이 더 마음에 차는 의뢰인이겠지. 일단 현금은 그쪽이 압승이니까.
‘고드윈도 부자긴 하지만, 현금 보유량으로는 라예르가를 못 이기지.’
거긴 수도 다음가는 제2의 교역 중심지다.
달칵-
기다린 지 한참 만에 얼굴을 내민 알루카스는 오늘도 루켄이라는 보좌를 달고 나왔다.
그리고 내게 인사도 하지 않으며 털썩, 건너편에 앉아 다 식은 차를 꿀꺽꿀꺽 다 마셨다.
“왜 또 와?”
“네. 저도 반가워요, 알루카스 님. 제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제이드의 용건을 들은 알루카스는 아무렇게나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의뢰는 기밀 유지야, 제이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나로 인해 잡혀 버려서인지 알루카스는 나른하면서도 무성의한 태도였다.
“그런 상식도 없이 질문하면 안 되지.”
라예르가에 가서 무슨 의뢰를 받았냐 물었을 뿐인데 상식 부족이라고 까였다.
‘뭐, 진짜 부족하긴 하지만…….’
이거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제이드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거짓말.”
“참 나,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이야. 사람 말 안 믿을 거면-”
“기밀 유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의뢰도 받겠다 해놓고 튄 게 몇 갠데, 언제부터 그런 용병의 신의 같은 걸 지키셨다고?”
“…….”
내가 상식은 부족해도 바보는 아니란다.
제이드의 답에 대충 대답하고 뜰 생각이었을 알루카스는 머리를 헝클었다.
“아, 그래. 그러기도 하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끝낸 의뢰에 대해선 입을 안 털거든?”
제이드는 미리 가져온 황실 소식지를 들어 보였다.
[이능의 힘, 황녀를 구하다!]
아래로는 알루카스의 용병단이 어찌 이 의뢰를 받았으며,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에 관한 상세 기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건 황실에서 먼저.”
“단장님, 걍 말해요~ 뭐 그리 중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입을 꾹 닫- 으악!”
제이드 뒤편에 서서 연분홍색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놀던 루켄은, 지루하다는 듯 반박했다가 갑자기 날아온 화염 공격에 펄쩍 뛰어 도망갔다.
“아, 진짜! 맨날 나만-!”
쾅, 내쫓긴 루켄 뒤로 문이 닫히며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되었다.
제이드는 예의상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쪽지는 전했어요?”
“……라예르가에서 맡긴 의뢰가 궁금하다며?”
“아, 그건 당연히 들을 거고. 일단 보좌가 사라진 김에 급한 것부터!”
“…….”
“보냈어요, 안 보냈어요?”
알루카스는 가만히 제이드를 응시했다.
처음 만난 날, 자신을 호구 잡아 진정제 계약까지 달성해놓고선 그걸로도 모자라 중간 다리로 이용하기까지 한 그녀를.
‘이 쪽지를 카밀로, 그러니까 정보 길드의 수장에게 전해주세요.’
처음엔 기가 막혔다.
감히 자신조차 함부로 부려 먹을 수 없는 이를, 제대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귀족의 가이드 따위가 접촉하려 들다니.
‘그리고 ‘카밀로’라는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정보 길드의 수장답게 카밀로는 자신의 정보만큼은 철저히 숨긴 이였다. 능력은 물론 성별, 나이, 국적과 혈통 여부조차도 불분명했다.
‘이름도 나 정도 되는 급에게나 허락하는 놈인데.’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게나 ‘카밀로’라 부르다니.
‘……친하기라도 한 건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 텐데도, 알루카스는 기분이 삐딱해졌었다.
‘……감히 용병왕을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겠다?’
‘아니, 보답해준다니까요. 그리고 이건 상대가 상대인지라-’
‘내가 당연히 들어주리라는 전제는 둘째치고, 멋대로 읽고 도중에 탈취하면 어떻게 하려고?’
질문을 하고 나서야 알루카스는 깨달았다. 그는 저 비밀 많고 수상한 소녀에게서, ‘당신을 믿으니까요’ 같은 말을 기대하고 있음을.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제이드는, 처음부터 그래왔듯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답을 했다.
‘정보 길드의 수장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며, 알루카스는 깨달았다.
눈앞의 소녀가 전한 쪽지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 결코 외부에 알리길 바라지 않는, 설사 용병왕이라도 적대할 극비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을.
‘곧 고드윈에서 연회가 열릴 거예요. 그 안에 답신을 보내주길 바란다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요정처럼 몽롱하게 아름답지만, 조금도 강해 보이지 않는 제이드가 감히 이 용병왕 알루카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전했다.”
알루카스는 왜인지 목이 말라 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답은 조만간 보내겠다던데.”
“흐음.”
제이드는 ‘그렇군요. 알겠어요’ 하고 답하며 차를 따랐다.
태연한 태도. 알루카스는 왜인지 삐딱해진 심보로 히죽거렸다.
“그게 다야?”
“네? 다냐니.”
“내가 또 거짓말하면 어쩌려고.”
“…….”
제이드는 하나도 따뜻하지 않은 차를 들며 싱긋 웃었다.
“제가 알루카스 님이 오시기 전에, 여기 독을 담았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꿀꺽꿀꺽 드셨어요?”
“너도 마셨잖아.”
“오기 전에 저는 미리 해독제를 챙겨 먹었을 수도 있죠.”
“……그런.”
귀찮은 짓까지 해가며, 네가 감히 나를 해칠 리가, 라고 대답하려던 알루카스는 말을 멈췄다.
제이드가 하고자 한 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저는 그렇다 쳐도, ‘카밀로’는 사칭으로라도 써먹기 좋은 인물이 아니잖아요.”
제이드는 느긋하게 답하며 차를 마셨다. 역시나 독 같은 건 들어있지 않아 보이는, 느긋한 얼굴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기분 더러운데.’
알루카스는 입꼬리를 짙게 휘었다.
보기만 해도 양기가 뿜어져 나오는 사내의 짙은 미소는 유혹적이었다. 정숙하기로 유명하다던 귀부인들조차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라붙게 만들던.
“와~ 눈 보신~”
“…….”
하지만 제이드는 차를 마시며 따봉만 날릴 뿐 별 반응도 없었다.
‘아직 덜 컸나?’
투명하고 무구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아직 천진한 소녀처럼 보이기도, 때로는 헤아릴 수 없이 깊어 보이기도 했다.
“……너 미성년은 아니지?”
“아닐…… 걸요? 아마??”
일단 영혼은 아닌데, 본체는 어떻게 되지?
제이드는 똥 싸는 고양이처럼 눈과 콧잔등을 찡그리며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
“됐어, 속은 아직 덜 컸나 보지.”
“……??”
속이야말로 확실하게 성인입니다만! 반박하려던 제이드는 이어진 알루카스의 말에 멈칫했다.
“그 자식하고 친해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모든 S급이 나처럼 성격이 좋진 않거든.”
“호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그보다, 정보 길드의 수장이 S급이었어요?”
“본명도 알면서 모른 척하려고?”
“호오…… 방금은 낚시였군요, 낚이지 않아서 다행이당.”
“……말을 말지.”
용병왕인 그조차 정보 길드의 수장에게서 알아낸 것은 그의 이름이 ‘카밀로’라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것뿐이었다.
‘혹시 이능력자인가 떠본 거군.’
이름을 알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친분인지도 테스트한 거겠지.
‘하지만 그쪽이 먼저 정보를 주기 전엔 넘어가지 않습니다!’
제이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자, 용병왕은 무거운 입을 뗐다.
“라예르가에서의 의뢰는 하나였어.”
과거, 라예르가 후작 일가를 몰살시킨 역병의 주범을 산 채로 잡아 오라는 것.
‘그 역병이 인재(人災)였구나.’
상황을 더 자세히 전해 들은 제이드는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산 채로 잡아갔어요?”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알루카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의뢰도 아니었어. 범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숨어 있으며 경호 인력이 얼마나 있을지도 이미 자료가 있었거든.”
“……그쯤이면 직접 잡아 와도 되지 않나?”
“이봐, 나 정도가 아니면 그렇게 무사히 잡아가진 못했을 거라고.”
“꽤 어려웠나 봐요?”
“쉽진 않았지. 적어도 미각성자들에겐 어려웠겠지만…… 나한텐 별것 아냐.”
“잘나셨습니다.”
“비꼬냐?”
“칭찬인뎅.”
짝짝짝- 제이드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박수를 쳐줬다.
“…….”
알루카스는 고작 이런 것에 기분 좋아진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였을 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이상하다 싶은 게 있었지.”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