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니, 안 통한 걸 넘어서 원점 아닌가!
나는 말 할을 잃고 해리스를 멍하니 보았다. 해리스도 눈썹을 추켜세웠다.
“대체 어떤 사고 회로를 통하면 그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제가 할 소리거든요!”
나는 기가 막혀 빽 소리를 질렀다.
해리스는 커다란 손으로 내 양 뺨을 뿝 누르며 경고했다.
“너 계속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목쉰다.”
“이으 우에 응어애?!(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자, 이거나 마셔.”
“아, 고맙…… 이 아니라!”
나는 양 볼을 되찾자마자 반사적으로 해리스가 가져다준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홀짝(정말로 목이 마르긴 했다)일 뻔하다가 급히 정신 차렸다.
“해리스 님!”
“응.”
“진짜 그러시면 안 돼요!!”
“왜?”
평소라면 ‘해리스가 해리스 했다’ 하고 체념하고 빠르게 맞춤형 설득을 시도했겠지만, 순간이나마 마음이 통했다고 착각하고 감격한 와중 튕겨 나온 난 그 이상으로 당황한 상태였다.
“진짜 자꾸 그러시면 지옥 가요!”
저딴 허접한 말이나 해버릴 정도로.
“……?”
해리스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나도 말하자마자 후회스러웠다.
당황한 순간 내뱉는 것이 사람의 진심이라고 하던가. 이제 와 할 말은 아니지만 난 사실 사후 세계를 약간은 믿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었던 거지만.’
나는 시한부 희귀병 환자였다.
병의 특성상, 체계적으로 정리된 치료법보다는 새롭고 실험적인 치료들이 주로 내게 해당하였고 언니와 엄마는 내게 일일이 내가 왜, 어떤 처방과 치료법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 내가 알면 더 두려워할까 봐 걱정했던 거겠지.’
치료에는 환자의 의지나 마음도 큰 영향을 끼치니까.
가족들의 생각은 나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아프고 괴로운 건 똑같아서, ‘삶이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사후는 천국 보내줘!’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이드, 넌……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서 그런 것도 믿는군.”
“…….”
하지만 이렇게 해리스한테서 ‘하긴, 넌 좀 얼빵하지’ 같은 시선을 받을 정도로 열렬히 믿진 않아!
‘그보다 해리스야말로 천국, 지옥 같은 거 믿어야 하지 않나?’
이 세계는 내 세계보다 신앙의 힘이 강하잖아. 판타지 월드의 주민 주제에 불신자라니!
내 얼굴을 이번에도 읽어냈는지 해리스가 말했다.
“그건 제이드, 네 덕분이지.”
“네?”
왜, 내가 뭘 어쨌는데!
“네가 처음에 말했지, 다른 세계에서 온 예언자라고.”
저기서 내 말의 포인트는 예언자였지만(다른 세계라고 굳이 붙인 건 내가 이 세계의 상식이 부족해서 실수할까 봐 밑밥 깐 거였다), 해리스는 관점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럼 그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어쩌다 떨어지게 된 걸까.”
“아…… 그건 제가…….”
“죽었겠지.”
저, 정확하다. 혹시 박수무당이세요?
“눈빛이 불민하군.”
“읍.”
해리스는 다시 커다란 손으로 간단히 내 양 뺨을 누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죽어서 떨어진 게 내 곁이라는 건데…….”
해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락이잖아.”
“…….”
아, 아니. 나는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이런 부분에서 이상하게 자기 객관화하는 거지.
‘하긴, 첫 만남은 진짜 지옥 같긴 했어.’
지하 감옥에 억제구를 쓰고 감금당하던 S급 이능력자 해리스가 폭주하기 1초 전 상황! 끔살만이 기다리고 있었지.
‘나…… 사실 딱히 착하게 살진 않았던 거 같기도 하고?’
갑자기 나조차도 의심스러워졌다.
죽자마자 이 지경이 되다니, 생각해보면 나도 나쁜 짓 많이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일단 나 때문에 언니와 엄마가 마음고생, 돈고생, 생고생한 것만 해도…….
‘불효는 확정이다.’
심지어 먼저 죽기까지 했어. 그게 최대의 불효라던데!
“제이드, 네 천성이 선하다는 건 나도 안다.”
“딱히 그렇지도 않- 웁!”
해리스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반박을 시도했지만 깔끔히 묵살당했다.
“그러니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하고 싶은 거겠지.”
“읍!”
“싸가지 없는 애새끼나 그 어미라도.”
“우웁-!”
“하지만 제이드.”
볼을 누르던 해리스의 손가락이 턱을 움켜쥐며 나를 주인에게 당겼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 투명하게 일렁이는 적안.
“선하게 살아봤자 별 소용 없어 보이지 않아?”
“…….”
너무 타당한, 논리적인 결론이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버릴 정도로 그는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제이드…….”
같이 악해지자.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깊고 매혹적인 눈매. 어둠이 켜켜이 쌓인 듯 까만 머리카락이 단정한 이마를 쓸고 목덜미로 내려온다.
긴 속눈썹이 붉은 눈동자에 어둠을 드리우며 퇴폐적인 시선이 내 정신을 앗아간다…….
“……가 아니라!”
정신 차려!
빡-!! 나는 해리스에게 이마 박치기를 시도해 저 엄청난 외모 공격에서 벗어났다.
“……?!”
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아파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후,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어.’
저 얼굴도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방금은 진짜 자발적으로 통장 비번을 부르고 다단계에 가입하며 보증까지 서준 뒤 장기까지 털려 버릴 얼굴이었다!
‘미친 외모 공격, 정신 방비가 시급하다.’
왜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지? 봐도 봐도 내 취향 저격이라?
“일, 아야! 일단요, 해리스 님. 할 말은 많지만 우선 한 가지만 먼저 짚고 넘어갈게요.”
나는 혹이 난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전 해리스 님 곁이 지옥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제이드, 마음은 알겠지만.”
“아, 좀 들어봐!”
나는 손으로 해리스 입을 틀어막았다. 너만 입 막을 줄 아냐? 나도 알거든!
“전생…… 그러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희귀병 환자였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신세였어요.”
“…….”
해리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의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이렇게 골골대다가도 이번에도 어떻게든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사실 어느 순간부터는 알고 있었다.
아, 이번은 정말 끝이구나.
“그래도 전 아주 간절히 바랐어요. 이대로 죽지 않기를, 내 두 다리로 병원 바깥에서 걸어 다닐 수 있기를, 그리고…….”
나는 해리스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해리스 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수 있기를.”
“……!”
해리스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요동치는 감정의 물결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래,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해리스 님.”
이것이 어찌 나락일까? 내가 죽음 앞에서도 바라던 그대인데.
“만나서 기뻐요.”
당신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야.
‘……생각보다 더 미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점도 당신의 일부니까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지.
나는 툭, 해리스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해리스 님도 그렇게 말하지 마요.”
지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꽈악, 해리스의 입을 막던 손으로 얼굴을 잡아당겼다.
“이미 망한 인생이니 더 망하자는 거야, 뭐야? 전 잘 살아서 R=VD 했거든요!”
“R…… 뭐?”
“그럼 해리스 님도 더 잘 살려면 더 착하게 살아야 할 거 아니냐고요!”
생각하니까 더 빡치네, 아무리 자낮이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지옥이니, 뭐니, 하는 거 뭐야?
‘내 최애 까는 건 용납 못 해!’
그게 설사 해리스 본인이라도!
나는 박력 있게 해리스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진짜, 할 말 못 할 말 안 가려요? 다신 그렇게 말하지 마요!”
“제이드, 진정-”
“진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한 번만 더 지옥이니 뭐니 말해 봐요, 나까지 도매금으로 나락 보내버려?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알겠어.”
해리스는 내 박력에 넘어간 건지 마지못해 답했다.
나는 멱살을 놓고 씩 웃었다.
“자, 그럼 앞으로도 저와의 해피해피 라이프를 위해 공덕도 닦을 겸 디뮈아드와 아이린 공녀를 살려봅시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살려! 봅시다?!”
“…….”
해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진짜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군.”
“네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단 아이린 공녀가 고드윈의 후계권을 노리고 등장한 게 아닌 건 팩트다.
“정말로 노렸다면, 그 자리에서 라예르가 남매들을 소개하지 않았겠죠.”
사실, 당시 연회장 내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아이린 공녀에게 유리했다.
‘그 유리하던 흐름이 끊긴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자식들에게 후계권을 물려주겠노라 고집을 피웠을 때야.’
그 발언으로 인해 아이린 공녀는 순식간에 기존 구 고드윈 세력 내 그녀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차라리 연회에서는 일단 자신이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나중에 본격적인 계승권 분쟁을 하게 됐을 때 말해도 됐을 텐데.’
오랜 세월 고드윈 소공작으로 자리하고 라예르가의 안주인으로 살아온 아이린 공녀다.
그런 그녀가 과연 자신의 말이 어떤 파장을 끼칠 줄 몰랐을까?
만에 하나 정말로 후계권을 노렸다고 쳐도 이상했다.
‘그럼 임자가 나타난 지금이 아니라 한참 전에 등장해 낚아챌 수도 있었잖아?’
그러나 지금도, 2년 후 미래를 서술한 <시천귀>에서도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니 후계권 분쟁은 위장이에요. 목적이 따로 있을 텐데…….”
그것을 본래의 미래 속 라예르가의 파멸과 결부시키면…….
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해리스를 보았다.
‘설마.’
해리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적을 이쪽으로 끌고 왔군.”
라예르가가 아닌 고드윈에서 전쟁을 치를 생각이다.
제이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말로 미지의 적을 고드윈으로 유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아이린 공녀가 미래를 알았다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제이드가 무의식적으로 목걸이의 에이드리안(돌멩이)을 움켜쥔 순간이었다.
“소공작님-!!”
집무실의 문이 거세게 두드려지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