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이린 공녀…….’
그 이름을 상기하자 연회장에서의 차가운 자주색 눈동자와 물결처럼 흘러내리던 은발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그녀의 죽음은 라예르가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전쟁 때문이었다.
그녀는 라예르가의 주인으로서 병사들을 이끌고 적들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살해당한다…… 고 한다.
물론 그냥 죽지는 않았고, 기어코 적들을 몰살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어쨌거나 그 전투로 라예르가는 크게 무너지게 된다.
‘디뮈아드가 자살하는 건 이 무렵이지.’
그것도 분신자살.
대체 어떤 마법적 처리를 한 건지, 시체는 물론 유서조차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생과 삶으로 인한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길 바란다는 듯이.
나는 속이 착잡해졌다.
활자로 보았을 때도 ‘안됐다……’ 하고 생각하던 비극의 주인공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니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특히 까칠한 아기 고양이 디뮈아드는, 너무 어리잖아.’
한숨이 나왔다.
아직 한참 어리고, 삶에 즐거울 것이 많은 나이일 텐데 어쩌다 그렇게 한을 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걸까.
오늘 디뮈아드의 패악질에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소년에게 닥칠 참혹한 미래를 알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하지만 실물을 보니 더더욱 의문이 들었다.
‘병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주변의 반응을 보아하니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가족들을 보면 무척이나 사랑받고 자란 게 분명한데.’
어쩌다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걸까.
‘역시 아이린 공녀가 살해당해서……?’
아이린 공녀가 사망 이후, 선대 공작은 그녀의 죽음은 라예르가 때문이라며 격노하고 아예 그쪽과 단절해버린다.
‘맞아. 그 때문에 고드윈 공작 가문에 문제가 생기는 에피소드도 있었지.’
라예르가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당연히 고드윈의 수입에 라예르가와의 거래 비중이 컸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하나 남은 딸마저 비극적으로 잃은 선대 공작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괴팍하고, 포악하고 자멸적인 선택도 마지않는…… 그야말로 폭군.’
그렇게 폭군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선대 공작에게 나타나, 새로운 삶의 목표와 의지를 불어넣어 준 것이 바로 해리스……. 정확히는 해리스와 그의 가이드인 에이드리안이었다.
‘주인공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그런 건.’
그런 점에서 2년이나 일찍 나와 상대적으로 멀쩡한 선대 공작을 만나게 된 것은 해리스에게나 나에게나 참 다행…… 잠깐.
‘아이린 공녀가 살해당하는 시점이 이 무렵이잖아!’
“어떻게 해!”
“뭐가.”
“막아야 해요!”
“그러니까 뭘?”
난 다급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해리스는 ‘믿어보겠다’라고 말했던 것을 지키듯, 뒤죽박죽인 설명에도 무어라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들었다.
“즉, 네 말은 아이린 공녀의 죽음을 막아야 디뮈아드 라예르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다는 거네.”
“네. 그러니까 막아야…….”
“내가 왜?”
“……네?”
난 멍하니 해리스를 바라보았다.
붉고 투명한, 그러나 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어두운 눈동자.
“내가 왜, 그것들이 죽는 걸 막아야 하지?”
* * *
진심이다.
제이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왜 구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지금 해리스는 고모인 아이린 공녀나, 사촌인 라예르가 남매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저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죽도록 학대당하고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왜 자신은 남을 도와야 하냐는 반감도 아니었다.
그냥 순수한 의문이었다.
“넌 왜 막고 싶은 거야?”
해리스는 그저 묻고 있었다.
왜 누군가의 죽음을 막는 게 너에게는 당연한 일이냐고.
“…….”
제이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를 이해시킬 수 있는, 혹은 설득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저 사람들은 당신의 혈연이 아니냐, 구하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 또는 이를 가지고 그들과 거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유년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해리스가 맞이한 유년기는, ‘위험 앞에서 남을 돕는다’는 본능적인 인류애 정신마저도 거세될 정도로 혹독했다.
그 누구도 어린 날의 해리스를 돕지 않았다.
그 누구도 울고 있는 너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쁜 놈들, 다 죽어 마땅한 놈들!’
어떻게 우리 해리스에게 이토록 가혹할 수가 있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괴롭힌 거야!
처음 <시천귀>를 읽을 때, 그의 아픔에 공감했다. 갇혀 있는 괴로움을 이해했다.
이끌림의 시작은 분명 그랬다.
그리고 이어진 삶의 궤적을 지켜보며 최애가 될 정도로 마음을 쏟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차라리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나 같은 변태 독자들이 붙지 않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평탄하고 안온하게 자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도 안 된다면, 차라리 모든 게 시작되기 전에 만날 수는 없었을까.’
아픔도 고통도 없이, 순진하고 어렸던 해리스를 더 빨리 그 지옥도에서 빼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가득 차오른 눈물은 그대로 툭 건들기만 해도 쏟아질 것 같았다.
“……왜 그런 얼굴이야.”
톡, 해리스의 기다란 손가락에 뺨에 닿아왔다. 한계까지 차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우네.’
해리스는 제이드의 눈가를 적시고 뺨으로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을 바라보았다.
너는 참 많이 울지. 대부분이 나 때문이었고.
그렇다면 이번에도 나 때문인가?
“내가 무서워?”
해리스는 가만히 눈물을 손끝으로 쓸며 물었다.
자신이 협박해서, 위협해서, 그래서 무서워져서 울던 노예 소녀의 얼굴이 지금의 제이드의 얼굴 위로 겹쳐진다.
그 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성가시게도 생각했던 얼굴이 시간을 뛰어넘어 다가와 심장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었다.
통증이 느껴진다.
“내가 또, 너에게…….”
무언가를 했나, 그것이 너를 다치게 만들었나? 그렇게 묻기도 전에 해리스의 입술이 굳어졌다.
“아니에요.”
제이드가 자신을 끌어안은 것이다.
꽈악, 자그마한 몸이 낼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그냥…….”
그리고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누구를, 되물으려던 해리스는 깨달았다.
지금 제이드가 만나길 바라는 사람은 한참 어린 시절의 자신이라는 걸.
가족이라는 것을 바라고, 애정이라는 것을 기대하던, 언젠가 마법처럼 어머니가 병상에서 일어나고 아버지가 미소 지어주길 소망하던…….
그런 멍청하고 어리석은, 생각만으로도 수치스럽고 환멸 나는 어린 애새끼를.
‘너는 그때의 나를 이렇게 안아주고 싶은 거구나.’
해리스는 멍하니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처음의 나는 너를 위협하고 겁박했을 텐데, 그 기억이 지금도 네겐 공포의 근간으로 남아 있을 텐데.
그런데도 너는 내게 다가온다.
‘역시, 전 해리스 님이 좋아요.’
귓가에 울려오는 목소리.
그것이 신호가 되어 파도가 밀려온다. 폭력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물결이 그의 전신을 덮쳐 수면 아래로 끌고 갔다.
아래, 더 아래 그가 가둬두고 들여다보지 않아 녹슬고 굳어버린 마음으로.
“……그랬더라면.”
해리스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탈출하긴커녕 같이 감금되었을걸. 그땐 지금보다 약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웃었다는 것도 착각일지도 모른다.
형편없이 떨리는 그의 목소리처럼, 얼굴도 엉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포옹을 바랐을지도 모르지.’
머저리 같고 등신 같았던 자신은, 최소한 한 가지의 바람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킁, 제이드가 얼굴을 파묻은 셔츠 부근이 축축했다.
“어릴 적의 저는 원체 병약했어서, 잘 안 죽는 단짝 가지고 싶었거든요.”
해리스의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가만가만 제이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난 필요 없어.”
이렇게 가느다랗고 작은 네가 그 감옥에 끌려왔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이 와중에도 매정해…….”
“너 같은 게 들어와 봤자 일주일도 못 버텼을 거야.”
“심지어 냉정하기까지!”
“그래? 이렇게 성격이 안 맞아서야 친구가 되긴 무리겠군.”
그러자 꽈악, 제이드는 더욱 힘주어 해리스를 끌어안았다.
“……반드시 친해질 거예요.”
그리고 울어서 빨개진 눈가에 힘을 주며 외쳤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휙 치켜든 얼굴의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본다.
감옥을 탈출하던 날 올려다본 새벽 별처럼 찬란하게, 파도치는 물결처럼 절대적으로.
압도적인 대자연이 푸르게 그를 집어삼켰다.
“그래.”
해리스는 저항 없이 웃었다.
“네 마음대로 해.”
* * *
그 뒤로 조곤조곤 대화가 이어졌다.
“……아이린 공녀에겐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해리스의 손가락이 눈물로 젖은 내 눈가를 매만졌다. 서투르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이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었다.
“네가 본 미래와 현재가 달라졌다면 이유는 하나야.”
“뭔데요?”
“너.”
내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눈물을 다 닦아낸 해리스가 말했다.
“네가 변수지.”
다른 세계에서 온, 나의 제이드.
나른한 속삭임에 내 뺨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좋은 거 같은데.’
얼굴이 가깝고, 해리스의 입술은 붉고, 나는 들뜨는 마음을 꾹 누르며 말했다.
“정확히는 해리스 님과 제가 변수죠. 그러니까…….”
시선을 마주한 해리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통했구나.’
알 수 있었다. 방금의 친밀한 대화로 그와 나 사이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을.
나는 감격에 젖어 외쳤다.
“이번엔 두 사람이 죽지 않게 구해 봅시다!”
“이번에도 둘 다 죽을지 잠자코 지켜보자.”
“…….”
안 통했잖아!!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