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저건 괴물이야, 괴물!”
레노르의 품에 안겨 거처에 도착한 디뮈아드가 악을 썼다. 두려움과 증오로 거칠던 호흡이 기침으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저런 이능, 쿨럭, 이능력자들 따위, 전부 죽어버려야……. 켈록! 죽여야 해! 사회악-!”
“그래, 그래.”
레노르는 익숙하게 그런 디뮈아드를 안아 다독이며 성질을 받아주었다.
한참 온갖 저주와 욕설을 내뱉던 디뮈아드는 기력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레노르는 디뮈아드가 그렇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평소와 같은 속도로 위로했다.
“그래, 우리 디미 말이 다 옳다. 우리 디미가 다 맞아.”
“……성의가 없어.”
“아닌데.”
“맞거든, 누님 완전 무성의하거든?”
디뮈아드는 레노르의 단단한 품에 파고들며 투덜거렸다.
“디뮈아드 님, 목이 갈라지셨는데…….”
“아, 노라.”
라예르가에서 따라온 하녀 노라가 미지근한 꿀물을 내밀었지만, 디뮈아드는 그를 받기는 바로 사납게 노려보았다.
치켜 올라간 자줏빛 눈동자, 병약한 미소년의 외형인데도 위협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꾸, 꿀물입……!”
“이리 주렴.”
하녀 노라는 본능적으로 겁먹고 벌벌 떨자, 레노르는 대신 손을 내밀어 꿀물을 받아 한 입 마셨다.
그리고 독을 감별하기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품 안의 포션을 따라 휘휘 섞었다.
“마시렴.”
“…….”
처음 꿀의 달콤한 향이 나던 미지근한 물은 어두운 초록빛의 포션에 섞이자 구역질 나는 냄새로 돌변했다.
누가 봐도 마시기 싫은 꼴이었으나, 처음의 꿀물을 거절한 디뮈아드는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면서도 순순히 받아 마셨다.
“쭉쭉 다 마셔.”
다 마실 때까지 집요하게 바라보는 누이 때문에 억지로 원샷한 디뮈아드는 컵을 비우자마자 헛구역질했다.
“으웩-”
“그렇게 싫으냐?”
“진짜 최악이야. 토 나오는 맛이라고. 효과만 나오면 다야? 맛에도 개선해야지! 진짜 구려. 센스가 없어.”
와다다 불만을 쏟아내는 디뮈아드를 레노르는 ‘이런, 안타깝구나’, ‘그래, 그쪽이 잘못했네’ 하고 다독여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사용인을 물렸다.
“……미안.”
디뮈아드는 다들 물러나고 공간이 고요해진 뒤에야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까탈스러운 동생의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는 사과였다.
그러나 레노르는 사과를 받아주지 않고 가만히 디뮈아드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잘못했지?”
다정하지만 엄격한 눈빛에 디뮈아드는 움찔하다가 우물쭈물 답했다.
“앞으로 안 그럴게.”
“뭘 안 그럴 거지?”
“……누님 앞에서 막말하지 않을게.”
“디뮈아드.”
“싫어, 싫다고!”
좀 진정했나 싶더니 디뮈아드는 다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디뮈아드 레슬레이 라예르가.”
“……잘못했어.”
깨갱, 앙칼진 반항은 금방 제압되었다.
디뮈아드는 레노르에게 한참 훈계를 듣고 나서야 다시 애칭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잘 반성하고 앞으로 그러면 안 된다. 다행히 이번에는 좋게 넘어갔다지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뭐가 좋게 넘어가? 속으로 투덜거리던 디뮈아드는 불쑥 물었다.
“……누님은 왜 그 가이드 남작을 가까이한 거야?”
“응?”
“설마 외형 때문은 아니지? 아무리 누님이 귀엽고 예쁜 것들에 약하다 해도 나보다 못생겼던데.”
“디미.”
“연회장에서 보니까 제 주인 닮아 성깔도 더럽고 재수 없고 까칠하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디뮈아드가 저런 말을 하니 아주 웃겼다.
하지만 레노르는 은은한 미소만 담은 채 말했다.
“디미, 리안 남작은 좋은 사람이다.”
“그걸 몇 시간 만에 어떻게 알-”
“감이야.”
“…….”
디뮈아드는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레노르의 감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레노르는 뾰족한 디뮈아드의 입술에 꿀에 절인 진정 성분의 약초를 넣어주며 말했다.
“내가 왜 그 가이드에게 가까이 갔겠니, 디미. 너무 그렇게 삐지지 마.”
“안 삐졌어!”
“그래, 그래.”
“진짜 안 삐졌다고!”
“알았다니까?”
레노르는 디뮈아드를 다독이면서도 머릿속으로 오늘의 일을 정리했다.
‘해리스 고드윈.’
라예르가를 출발하기 전, 그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최대한 긁어모았다.
패륜아의 자식, 이른 각성, 전설 속 고대 마수 ‘공허’의 파편을 이능으로 흡수한 자. 오랜 감금과 탈출.
‘그리고…… 학살자.’
과연, 이번에 드러난 해리스 고드윈의 이능은 대량 학살에 몹시도 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심지어 S급에 범접한다고 했지.’
그건 가장 따끈따끈한, 용병왕 알루카스에게서 제공받은 정보였다.
그러나 레노르는 무수한 글자의 나열들이 알려주지 않은 정보를 한 번의 만남으로 깨닫게 되었다.
‘리안 남작…….’
제이드 리안, 그의 하나뿐인 가이드.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노르는 말없이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 * *
“뭔가 이상해요.”
바깥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 해리스의 집무실로 들어온 제이드가 말했다.
“해리스 님도 느끼셨죠?”
핏줄이 불거진 손등에 닿아오는 다정한 손길. 무언의 기대가 담긴 적안이 제이드를 응시했지만…….
“아이린 공녀와 라예르가 소후작의 행동이 이상하다는걸요.”
“……그래.”
기대 꺾인 해리스는 생각했다.
‘역시나 기억이 없군.’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예 하나도 없을 줄이야.’
해리스는 팔짱을 꼈다.
제이드는 익숙한 살해 협박만 간략히 기억하는 밤이었으나, 정작 해리스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 결심을 전달한 것으로 기억하는 밤.
진실을 알았다면 제이드가 ‘네? 그 말이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죠?’ 하고 경악할 속사정이었지만, 일반 개념과 상식이 부족한 해리스는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그럴 상황은 아니지.’
이전의 대화로 해리스는 자신이 잊고 있었던 첫 만남의 날카로운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이 어떻게 제이드에게 다가왔을지도.
“…….”
최소한 지금의 자신은 제이드에게 뭐라 서운해할 자격이 없었다.
대신 두들겨 팬다면 맞아줄 의향도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제이드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다.
‘……자격 같은 건 앞으로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돼.’
앞으로 제이드는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을 테니까. 마음을 정돈한 해리스는 제이드의 말을 받았다.
“일단 라예르가 소후작은 그렇다 쳐도, 어젯밤 아이린 공녀만 해도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제이드.”
“후계권을 노리고 왔다기엔 너무-”
“네 예지에 아이린 공녀는 본디 나타나지 않았던 건가?”
“……!”
곧장 핵심으로 치고 들어오는 발언에 제이드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아닌가?”
“……네, 아니, 아니요. 나오긴 했는데…….”
“어젯밤처럼 그렇게 등장하진 않았다는 거군.”
해리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이미 제이드는 많은 예지를 이용했고 그 여파로 본래의 미래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니 슬슬 다른 미래가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네 예지에 문제가 생기게 된 거…… 왜 그런 얼굴이지?”
“제 말 믿으세요?!”
“……?”
갑자기 뭔 소리야, 하고 묻는 듯한 얼굴에 제이드는 다급히 눈앞의 차를 마시며 진정한 뒤 다시 물었다.
“아, 아니. 해리스 님은 제가 예언자라는 말 안 믿으셨잖아요.”
“제이드. 난 정확히 ‘다른 세계에서 온 예언자’라는 말을 믿지 못한 거다. 정말 다른 세계에서 떨어졌다면 그 마탑주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반드시 연구 소재로 잡아갔-”
“아무튼!!”
제이드는 당황했다. 너무 당황해서 해리스의 말을 잘라 버린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젠 믿으시는 거예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 그로 인해 당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도.
‘정말로 믿어준다는 건가?’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제이드에게 얼굴을 기울이며, 해리스는 천천히 말했다.
“믿어보려고.”
“……!!”
제이드는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왜?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우리 해리스가 이럴 위인이 아닌데?’
진짜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 어쩌다 이런 심경 변화를……?
‘심지어 해리스, 어젯밤 연회에서 내가 목 터지게 싸웠을 때도 불신의 말을 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하룻밤 만에 바뀌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내 기억상 크게 별다른 일은 없었…….
‘……혹시, 어젯밤 내 기억이 술에 취해서 왜곡된 건가?’
사실은 ‘배신하면 죽인다’가 아니라, ‘거짓말하면 죽인다’, 혹은 ‘거짓말로 나 속인 거면 진짜 죽인다’ 뭐 그런 거였던 걸까.
‘그, 그럴지도……. 하긴, 내가 어제 얼마나 잘했어. 믿어볼까, 잠시 흔들렸다가 습관적으로 경계한 거겠지.’
그래, 그런 거야. 제이드는 혼자서 어젯밤의 일을 짜 맞추고 납득했다.
“크흡…….”
그리고 감격했다.
팔짱을 낀 채 제이드의 다채로운 얼굴 변화를 구경하던 해리스는 갑자기 울컥한 모습에 당황했다.
“제이드?!”
“진짜 감동…….”
“……!”
젖은 목소리.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청안.
해리스는 놀랐다. 자신이 믿어보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다니.
‘얼마나 내 믿음을 갈구했으면…….’
그리고 머릿속에 본성에서 깨어난 첫날의 제이드가 산뜻하게 ‘좋아한다’ 고백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까지 좋다고?’
당혹스러울 정도의 애정이었다.
해리스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부터 간질간질해지고, 갑자기 손발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집착, 욕망, 소유욕을 벗어난 이 마음은…….
“예에에스-! 진짜 이건 인간 승리야!”
……감격에 찬 제이드가 펄쩍 뛰며 자화자찬을 하는 순간 가라앉았다.
“저 의심 병자에게서 신뢰를 받아내다니! 진심 업적이 따로 없-”
“그 의심 병자, 바로 앞에서 듣고 있다.”
“큼, 큼!”
제이드는 팔짱을 낀, 노골적으로 언짢아 보이는 해리스를 보며 말을 삼켰다.
음, 바로 앞에서 폴짝 뛰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아니었나.
“큼!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네. 이번 아이린 공녀의 등장은 제 예지에 없었어요.”
레노르는 물론 디뮈아드도.
제이드의 진지해진 얼굴에 해리스도 더는 따지지 않고 화제에 집중했다.
“그럼 원래의 미래에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지?”
“원래는…….”
제이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죽어요.”
아이린 공녀는 살해당하고, 디뮈아드는 자살한다.
시체도 남기지 않은 채.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