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등에 닿아오는 단단한 근육질 가슴과 특유의 싸한 향기.
“……해리스 님.”
나른하게 내리깐 붉은 눈이 제이드를 맞이하며 속삭였다.
“응, 제이드.”
나지막한 중저음이 귀를 간질였다.
“여기서 뭐 해?”
어느덧 제이드는 해리스의 품에 안긴 뒤였다.
해리스는 한쪽 팔로 얇은 허리를 감싸고 다른 쪽 팔을 어깨에 가볍게 얹었다.
“뭘 한다기보다는, 어쩌다가 휘말린 것에 가깝…….”
“기다렸는데.”
그리고 제 턱을 제이드의 머리 위에 기대며, 해리스는 말했다.
“아? 아!”
하긴, 중앙관 가까이 갔으니 누군가 자신을 알아봤겠지.
당연히 지나가는 누구라도 해리스에게 말했을 법한데, 소란에 휩쓸려 연무장에 가버렸으니 뭔가 싶긴 했을 거다.
‘설마 감시한 건 아닐 거고.’
제이드는 혼자서 의문을 가졌다 해결한 뒤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요…….”
“응.”
다 아는 정보를 들으며, 제이드를 향해선 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해리스는 건너편의 잡것들을 힐끗 보았다.
“그나저나, 답이 없네.”
“……!”
“해리스 고드윈…….”
가뜩이나 라예르가의 남매는 해리스의 등장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어느 잡것이 내 가이드에게 그딴 말 지껄였지?”
그러나 피처럼 불길한 적안이 그들을 향하자 본능적으로 흠칫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 해리스 님!”
“두 분은 라예르가의 귀하신 자손들이십니다.”
“부디 양해를……!”
여태껏 주인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으며 한 발자국 멀어져 있던 라예르가의 종들이 황급히 다가서서 둘을 보호하려 했지만.
“……?!”
어느덧 일렁이는 검은 힘이 그들 사이를 둥글게 감싼 뒤였다.
“읏-!”
사용인들이 다가서려 한 순간 경계가 불꽃처럼 훅 일어나 그들을 떨어뜨렸다.
“이, 이건!”
“이능, 공허……?!”
“……!”
검은 장막이 그들을 삼키기 전, 들려온 사용인들의 비명에 제이드는 눈이 커졌다.
바로 알아보네?
“세 번 묻진 않아.”
그러나 주변에서 어찌 반응하든 신경 쓰지 않는 해리스는 라예르가 남매, 정확히는 디뮈아드를 응시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디뮈아드는 놀랍게도 해리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항하면서 외쳤다.
“잡것을 잡것이라 말했는데 뭐가 문제지?”
“하?”
“네놈의 눈에나 진주인 것이지, 이 몸의 안목으론 생선 눈깔만도 못한데 어쩌란 말이냐!”
제이드는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이 와중에도 패악질을 부리다니, 패기 쩐다.
“디뮈아드 레슬레이 라예르가!”
레노르가 질겁하며 말려도 디뮈아드는 세 치 혀를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두지 못하겠-”
“하여간, 유폐되었으니 못 배워먹고 자란 것도 별수 없겠지.”
도리어 세상의 모든 멸시와 증오를 한 얼굴에 담은 듯 악의를 뿜어냈다.
“저딴 천것한테 그리도 달라붙…… 으, 읏-!”
그러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끄, 끄읍?!”
디뮈아드 발치 아래 그림자처럼 고여 있던 검은 힘이 촉수처럼 기어올라가 소년을 움켜쥔 것이다.
“디뮈아드-!”
“해리스 님?!”
레노르와 제이드는 둘 다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미잔데?!’
레노르는 필사적으로 디뮈아드를 옥죄는 검은 촉수를 떼어내려 했고, 제이드는 황급히 해리스를 말렸다.
“그만, 그만 하세요!”
“왜?”
해리스는 사색이 된 제이드의 얼굴에 의아해하다가 ‘아’ 하고 혼자서 납득한 뒤 답했다.
“아직 안 죽었어.”
……그거야 당연하잖아!
제이드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갑자기 왜? 겨우 저런 막말을 들었다고……?
‘아, 해리스는 라예르가 남매에게 감정이 좋을 수가 없어.’
연회에서의 깽판이나, 다 잡은 줄 알았던 소공작 자리가 다시 멀어진 것. 둘 다 아이린 공녀와 라예르가 남매에게 책임이 있었다.
“라, 라예르가 둘째 공자는 아직 어려요. 그러니…….”
“어린 게 왜?”
“…….”
다급해진 제이드가 일반 상식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해리스의 얼굴은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듯 무표정했다.
그제야 제이드는 떠올렸다.
‘아, 맞다. 해리스는 그런 개념 없지…….’
해리스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어린 애한테 이런 짓을!’ 같은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다.
도리어 상상 초월한 학대와 핍박만 실컷 받고 자랐으니, ‘최소한 어린 것들은 봐주자’ 같은 개념을 걸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게 다 빌어먹을 노먼 고드윈 때문이야. 이 만악의 근원 같은 새끼!’
속으로 이를 갈던 제이드는 설득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제…… 제가 보고 있기 무서워서 그런데, 이제 그만 놔주시면…….”
“눈 감겨줄까?”
“…….”
제이드가 말문을 잃은 사이, 디뮈아드를 옥죈 검은 힘들이 일순 약해진 듯 느슨해졌다.
“흐응?”
이것 봐라. 해리스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사과하겠소!”
“레노르 님?!”
그 순간, 레노르가 해리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라예르가의 적장녀이자 디뮈아드의 본보기가 되어 잘 보살펴야 할 누이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표하오.”
“누님!”
디뮈아드는 경악했지만, 레노르의 단단하게 엄격해진 얼굴을 마주하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결국 사죄했다.
“내, 내가 말이 과했소. 그대와 그대의 가이드에게 한 폭언, 모두 정식으로 사죄하리라.”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내뱉는 말은 어색해, 레노르의 말투를 따라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사과 들을 일이 많다…….’
그리고 첫 번째 사죄는 레노르 덕분이었지.
제이드는 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해리스 님.”
해리스의 옆얼굴은 여전히 서늘해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겨우 막말 들은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방금 디뮈아드가 막말한 건 제이드 자신만이 아니라는 거다.
자고로 용서란 피해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리스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드리운 어둠은 너무나 짙고 깊다.
‘솔직히 정신병 걸려도 할 말 없는 상황이지.’
그리고 진짜 일반인이면 정신병 걸리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해리스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함부로 모욕하고 조롱하는 이를 보복하려 드는 것도 어찌 보면 합당한 일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발작 포인트가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난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해리스 님, 제발…….”
제이드는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개의치 않는다지만, 그래도 난 당신이 손가락질당하거나 욕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해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의 선 안에서 살아가길 바라.
‘그리고 라예르가의 적장녀가 이렇게 사과하는데, 받아주지 않을 순 없잖아.’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안 받아주면 그건 외교 전쟁이다!
“…….”
내려다보는 해리스의 적안은 고요했지만, 일시에 디뮈아드를 감싸던 힘이 사라졌다.
“쿨럭, 컥-!”
“디미!”
디뮈아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쿨럭였고, 레노르는 그런 동생을 안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큰 외상은 없구나, 다행이야.”
휴, 레노르의 말에 제이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어린 애라고 해리스가 조금은 봐줬던 모양이지.
“봐주어 고맙소.”
“뭐가 고맙- 읍!”
쿨럭이던 디뮈아드는 곧장 항의 내려 했으나, 레노르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조금의 불만도 내비치지 않은 채 동생을 안아 올렸다.
“레노르 님!”
“디뮈아드 공자께선……?!”
“되었다. 이만 돌아가자.”
검은 장막의 감옥이 사라지며 등장한 라예르가의 사용인들은 당혹한 소리를 내었으나, 레노르는 그들에게 답해 주지 않고 디뮈아드를 안은 채 사라졌다.
“……!”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이드는 누이 어깨 위로 올라온 디뮈아드의 두 눈이 해리스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것을 발견했다.
“……신기하네.”
“뭐가?”
저 말고 해리스 님을 야려봐서요. 제이드는 말을 삼켰다.
아르투 소백작은 레노르에게 처발렸음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노려봤었다.
강약약강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걸 확인한 레노르에겐 감히 원한조차 제대로 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디뮈아드는 자신이 해리스에게 꼼짝달싹도 못 하고 당했는데도, 상대적 약자인 제이드가 아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강자인 해리스에게 증오심을 내보였다.
‘레노르가 무릎 숙여 사죄해서? 사랑하는 누님에게 굴욕을 주었다고?’
제이드는 속으로 갸웃거렸다. 그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좀 더 근원적인 사유가 있는 거 같…….
“제대로 밟아줬어야 했는데.”
“네?!”
뭔 미친 소리야. 지금 밟다 못해 지르밟아서 새싹도 안 남게 생겼어!
“너한테 막말했잖아.”
“아, 전 괜찮아요.”
“왜?”
“그야 해리스 님 사촌이잖아요.”
생긴 것도 성깔도 해리스와 똑 닮았다는 의미였지만, 다르게 이해한 해리스는 잠시 멈칫했다.
“……네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저게 너한테 지껄인 말이 얼만데.”
“음? 처음의 해리스 님에 비하면 약과인걸요.”
“…….”
잊고 있었던 첫 만남의 과거를 반추한 해리스 잠깐 침묵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저 정도야 뭐, 귀여운 수준이죠. 개소리를 왈왈거리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죽이니 마니 협박하진 않았으니까.”
“…….”
제이드는 진짜 별생각 없이 말한 거였지만, 해리스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이야, 지금 생각해도 그땐 살아남은 게 용해.”
심지어 또 최근에 죽인다고 했지. 제이드는 가물가물한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배신하면, 죽이겠다.’
……상당히 압축된 버전의 기억이었으나, 제이드는 그 외의 말을 더 떠올리지 못했다.
이전부터 자주 들은 말이기도 했던 것도 있지만, 술에 취한 머리는 배고프고 목말랐다는 본능을 더 또렷하게 기억했기 때문이다.
‘뭐, 이쯤 되면 일종의 월례 행사 같은 거지, 생리처럼.’
자주 겪어서 익숙하지만 늘 거지 같은……. 아, 생각해보니 여기 와서도 생리를 안 했네.
‘전생 때는 아팠던 거지만, 여기선…… 흠, 설마 이것도 마력 순환으로 인한 신체 강화 덕분인가?’
의아해하던 제이드는 왜인지 모르게 엄중해 보이는, 사죄라도 할 듯한 얼굴의 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하다.”
“네?”
“그때는 내가 과했다.”
그때?
생각에 빠져 해리스가 뭐라 말한 건지 제대로 듣지 못한 제이드는 대충 알아들은 척 넘겼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마?”
“네, 과하신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
“…….”
자신이 해리스 뼈를 때리다 못해 직격타를 먹인 것도 모른 체, 제이드는 원래 해리스를 찾았던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보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