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아르투 소백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레노르의 검은 그야말로 눈으로 따라가기도 버거울 정도로 아르투 소백작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몇 번 막기는 했으나, 실력이라기보다는 시험 문제 정답을 3번으로 쭉 찍으면 몇 개는 맞는 정도의 운에 가까웠다.
“크아악—!”
끝내 곤죽이 된 아르투 백작은 주저앉아 양팔로 머리를 막았다.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바지는 축축해진 상태였다.
“그, 그만……!”
쓰러진 아르투 소백작은 반쯤 시체가 된 꼴로 항복을 표했다.
“5분도 못 버티는군.”
레노르는 승리감 하나 없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산뜻한 상태였다.
“그만, 하면 다?”
제이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죽거렸다.
“제대로 사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투 소백작?”
“저게-!”
반 죽어있던 아르투 소백작은 그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표정 보아하니 아직 할 만한 모양이군.”
“사, 사죄하겠습니다!”
레노르가 다시 검을 올리자 황급히 공손해졌다.
“레노르…… 아니, 라예르가 소후작님! 제가 실수했습니다!”
“실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더럽고 추악한 야심으로 고의적인 무례를 저질렀으면서…….”
“저년이-!”
“년?”
레노르는 두 번 참아주지 않았다.
“지금 자네, 리안 남작에게 무어라 지껄였지?”
스캉! 레노르의 검이 아르투 소백작의 목젖에 닿았다.
“……미, 미안하오, 리안 남작.”
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사과였다.
하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아르투 소백작은 빠르게 퇴장하면서도 제이드를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뭔가 일을 치겠군.’
쳐봐라, 내가 당하나. 제이드는 빙긋 웃으며 은밀히 중지를 날려주다가…….
“리안 남작?”
“앗, 접겠습니다.”
“?”
불쑥 다가온 레노르를 보고 황급히 접었다. 레노르는 검을 하녀에게 내밀며 제이드에게 인사했다.
“이미 알겠지만, 라예르가의 레노르라네.”
울컥해서 나서긴 했지만, 막상 아이린 공녀의 딸과 이렇게 이야기하자니 어색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하하, 저는 리안…… 그러니까 제이드 리안입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나도 만나 반갑네.”
허스키한 목소리. 고풍스러운 말투.
과연 레노르에게선 대귀족의 후계자다운 풍모가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야성(?)적인 해리스와 비교하던 제이드는 의문을 떠올렸다.
‘……음? 그럼 아이린 공녀의 주장은 뭐지.’
이렇게 라예르가의 후계자로 키워진 사람을 고드윈에 데려와 선대 공작이 선택한다면 고드윈의 후계자로 바꾸겠다고?
뭔가 이상하다.
제이드가 멈칫한 사이, 레노르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대가 끼어든 덕분에 내 하녀가 애꿎은 화를 덮어쓰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 고맙네.”
“아, 아닙니다.”
물론 일방적인 화기애애함이었다. 아무리 같은 귀족에 들었다 해도 급이 다르니깐.
‘심지어 진영도 다르잖아.’
그래서 거리를 벌릴 겸 말을 꺼냈지만…….
“보셨다시피 그놈하곤 제가 원래 감정이 좋지 않은 관계라 괜한 오지랖으로-”
“그것이 어찌 오지랖이라는 거지? 의(義)라고 봐야 옳아.”
“…….”
이상하게 저쪽에서 너무나 호감 어리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도 그자를 영 마땅찮게 보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사정이 사정인데다가 고드윈의 사람이니 매정하게 굴지 않으려 했는데…….”
레노르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기가 막힌 말을 들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그게 참말이더군.”
“하, 하, 맞아요. 진짜 어이없었죠…….”
“알아주어 다행이네!”
왜인지 마음이 통했다고 여긴 건지, 레노르는 기쁘게 웃으며 재잘재잘 말했다.
외가에 오랜만에 방문한 것도 있어 사정을 봐주어 대했을 뿐인데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한 대 치면 죽을 것처럼 약해 보여서 손대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까지 들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 아니! 우리 이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
왜 이렇게 속마음을 줄줄이 풀어놓는 거야!
제이드는 속으로 진땀을 뺐다.
‘저도 당신이 개인적으로는 호감이긴 합니다만…… 우리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실제로 연무장에 있는 고드윈의 사람들이 둘을 희한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태생적 권력자인 레노르는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이지, 이 작고 말랑한 손으로 어찌 결투를…….”
레노르는 그렇게 말하며 제이드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흠칫 놀랐다.
“……?”
희고 고와만 보이던 손이 생각보다 단단했던 것이다. 심지어 굳은살도……?
놀란 레노르는 기사의 본능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손목과 팔뚝을 더듬었다.
“……?!”
제이드는 속으로 펄쩍 뛰었다.
“레, 레노르 님. 이게 무슨-”
“몸의 선은 얇은데, 의외로 근육이 잡혀 있잖아……?”
“네? 근육이요?”
처음 듣는 소리에 제이드는 눈을 크게 떴다.
‘모르는 건가?’
의아해진 레노르는 무의식적으로 마주 잡고 있던 제이드의 손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상하게 마력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기분 탓인가?’
속으로 갸웃거리던 레노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도 모르게 제이드의 체내 마력을 확인하듯 불어넣고 만 것이다!
기본적으로, 체내 마력 확인은 간단한 신체적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숙련된 마력 보유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
낯선 감각을 인지한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 이거 엄청 기분 이상한데!’
제이드는 자신의 흡성대법이 의도치 않게 레노르의 마력도 빨아들였음을 인지하고 황급히 끊어 내려 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반응한 것인지, 반대로 이번에는 레노르의 마력이 상대의 체내 마력을 확인하겠다는 듯 밀고 들어와 버렸다!
‘타인의 마력이 들어오는 감각…… 정말 묘하구나. 마취 없이 장기가 들춰지는 기분…….’
본능적인 거부감에 토할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아내던 순간이었다.
“……놀랍군!”
정신 차린 레노르가 다급히 손을 거두었다.
본의 아니게 체내 마력 확인을 하게 된 레노르는 정말이지 놀란 상태였다.
‘마력 순환을 계속 쉼 없이 하여 신체를 강화한 거였다니!’
이는 드문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신체를 단련하는 게 우선이었다.
애초에 마력 순환 자체가 무척이나 힘겹고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하네!”
“아, 아하하, 그, 그런가요……?”
갑작스러운 사태를 어찌 변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제이드는 레노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제대로 인지 못 했구나!’
다행이다. 나도 스리슬쩍 넘어가야지. 제이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 제가 한 대단하죠~!”
칭찬은 받아서 나쁠 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내가 던전에서 그렇게 날아다녔던 거구나.’
뭔가 납득되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병자였던지라 보통 건강한 몸은 이 정도인가 했는데, 실제로도 이 몸은 제법 강한 편이었던 거야.’
레노르는 무덤덤한 제이드의 반응을 보고 오해했다.
‘타고난 신체적 약점을 오랜 기간의 마력 수련을 통해 극복하다니!’
얼마나 고되게 노력했으면 저렇게 담담하게 반응하는 걸까.
감격한 레노르는 진지하게 말했다.
“자넨 기사가 될 자질이 있네.”
“?”
그게 왜 그렇게 되지?
“아, 아닌 거 같은데요. 게다가 전 이미 가이드…….”
“겸손할 것 없네. 가이드라면 더더욱 신체 단련이 중요하겠지!”
“아니, 겸손이 아니라…….”
“아, 교습받을 적절한 스승이 없어 그러나? 걱정 말게! 내가 특별히 교습해 주겠네.”
레노르는 자신이 있게 말했다.
물론 그녀도 아직 미흡한 실력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가르침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무 뛰어난 천재는 자신보다 못하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난 아니니까.’
그리고 실제로 가르치는 학생도 있었다. 그 학생의 평가에 따르면, 자신도 제법 괜찮…….
“누가 누구의 교습을 받아?!”
“디미?”
레노르는 뒤에서 들려온 앙칼진 목소리를 반기며 소개했다.
“아, 리안 남작. 이쪽은 내 동생 디뮈아드요.”
라예르가의 둘째 공자, 디뮈아드는 첫째 공녀와 달리 엄청나게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자주색 눈동자, 섬세히 세공한 인형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새빨간 입술까지.
“그리고 내 첫 번째 교습…….”
“누구 마음대로!”
이상적인 미로서 그림에나 그려질 법한 미소년이 재빨리 레노르와 제이드 사이에 끼어들더니 사납게 쏘아붙였다.
“나! 나만이 누님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제자야! 어딜 잡것이 끼어들어?!”
끼어들겠다 한 적도 없어…….
제이드는 레노르의 얼굴을 보아 욕은 꾹 참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라예르가의 둘째 공자님. 저는 제이드 리안-”
“닥쳐.”
소용없었다. 디뮈아드는 한층 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누가 네깟 것 따위 알고 싶다고 했나? 눈치껏 꺼질 것이지 뭘 아득바득 붙어 있는 거야!”
“디뮈아드!”
폭풍처럼 쏟아진 폭언에 레노르는 당황했고 제이드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화, 확실히 해리스의 사촌이 맞긴 하네.’
정중하고 친절하고 성격 좋은 레노르가 너무 낯설어서 어버버하고 이끌려갔는데, 고드윈 특유의 싸가지 없는 DNA가 잘 유전된 것이 분명한 디뮈아드를 보니 정신이 말똥해졌다.
‘뭐, 해리스에 비하면 이쪽이 왠지 더 하찮은 느낌이긴 해.’
생긴 건 고양이, 아르릉거리는 건 말티즈? 치와와……?
제이드가 뻘 생각을 하는 것을 모르는 레노르는 몹시도 미안한 안색으로 질책했다.
“이게 무슨 무례냐? 리안 남작은 이제 나의 벗…….”
“누님, 저것이 얼마나 사특한 것인지 어젯밤 연회에서 충분히 봤잖아, 저런 것과 말을 섞다니 제정신이야?!”
“디뮈아드!”
치와와다.
남매의 다툼을 지켜보던 제이드는 확신했다. 예쁘고 앙칼지고 싸가지 없는 게 아주 딱이야.
“리안 남작, 정말 미안하오. 내가 동생을 잘못 키워-”
“누님이 뭘 잘못해?! 누님은 잘못한 거 없어! 잘못은 저 잡것……!”
디뮈아드는 자줏빛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제이드에게 손가락질하려다 흠칫 굳었다.
“잡것?”
제이드가 아닌, 그녀 뒤의 사내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한테 잡것이라는 거지?”
검고 아득한 힘이 제이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