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 아니 난…….”
“사양할 것 없다니까요?”
시선을 돌리자 난처한 듯 굳어 있는 소녀와 그녀에게 들이대는 사내가 보였다.
“레노르 양이 비록 덩치는 지나치게 크고, 얼굴은 평범한 게, 여자가 지녀야 할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레노르 양?
숨 쉬듯 후려치는 말투에 얼이 빠져있던 난 뒤늦게 연회장에서 얼핏 보았던, 아이린 공녀가 데려왔다는 라예르가의 장녀를 떠올렸다.
‘잠깐, 저 새끼 지금 감히 라예르가의 장녀한테 뭐라 하는 거야?!’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인 라예르가의 적장녀한테?!
‘저거 뭐 하는 새끼야. 황태자라도 돼?’
내 의문은 빠르게 풀렸다.
“괜찮습니다. 아르투 백작 가문은 그런 안주인도 관대히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본인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밝혀주었으니까.
‘……아르투 백작 가문? 안주인??’
맙소사, 저 미친놈은 그렇지 않아도 썩은 아르투 백작의 아들, 소백작이었다!
‘아니, 이건 상대가 황태자인 것보다 더 나쁜데.’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상대가 황태자면 그래도 일단은 급이라도 맞다.
하지만 차기 고드윈 공작자리를 노리고 신 고드윈 세력에 붙었다, 구 고드윈 세력에 붙었다 하는 박쥐 방계 가문 따위라니.
‘게다가 저 소백작 놈, 소문이 엄청 안 좋다고!’
퍼넬로피가 시비 걸다 끌려간 이후, 아미아는 자발적으로 아르투 백작 일가와 관련된 소문을 내게 줄줄이 물어다 줬다.
역시 구 고드윈 세력의 이인자 레디안 백작의 손녀딸이라 그런지, 아미아가 물어오는 정보의 질은 남달랐다.
‘귀족 영애 함부로 건드렸다 가문 차원에서 수습한 것만 3건, 일반 평민들은 추행에 폭행에 협박까지 아주 고루고루 잘못을 저질러서 선대 공작님 눈 밖에 단단히 난 놈…….’
그래서 노먼 고드윈조차 소백작이 아닌 퍼넬로피를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일단 그쪽은 드러난 범죄 기록은 없었으니까.
아르투 백작, 자식 농사 한 번 정말 망했다…… 고 중얼거리려던 난 흠칫했다.
두 자식 중 하나는 죽었고, 백작 본인도 함께 살해당했다.
아르투 백작의 딸이 나를 죽일 뻔했으며, 백작 또한 공모자이자 주모자일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어도 한 번 느낀 섬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긴 묘한 불길함.
그것은 죽은 자의 가족이 어떠한 짓을 저질렀어도, 자신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 새끼가!’
그리고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아르투 백작 가문에 적의를 가진 나조차도 이렇게 머뭇거리게 할 정도라면, 그와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아르투 소백작에게 얼마나 관대해질까?
‘그리고 선대 공작님은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겠지.’
이번 연회에서 아르투 백작이 어떠한 짓을 저질렀든, 딸이 본성에 암살 미수를 일으킬 뻔했든, 결국 백작과 딸은 죽었다.
그로써 모든 죄는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 아니, 도리어 동정표가 생겨서 아르투 백작 가문 자체에는 유리한 일이 되었다.
죄악은 죽은 자와 함께 떠났으니까.
구 고드윈 세력은 당분간 아르투 백작 가문을 종기처럼 조심조심 대할 것이며, 소백작은 깨끗한 상태로 손쉽게 아르투를 계승할 테지.
누구도 막지 못하고, 건드리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일을 도모하기 딱 좋은 순간이다.
그것이 설사 말도 안 되게 무리한 일이라도!
“이제 제가 가주이니, 제 아내 정도는 가문의 압박 없이 택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인 라예르가의 장녀에게 구혼하는 짓이라든지.
아르투 소백작은 윙크하며 레노르에게 정원에서 갓 딴 꽃을 내밀었다.
“그 영광스러운 기회, 레노르 양에게 먼저 드리고 싶군요.”
……저 새끼가 진짜 돌았나!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별개로 감정적으로는 몹시 화가 났다.
자신이 불쌍한 상황이라는 것을 한껏 어필해 여자한테 압박을 주는 상황이라니.
‘역겨워.’
뭔가 익숙한 상황이라서 더 빡쳤다.
새내기한테 추근대는 복학생은 그래도 등신짓 하면 학교 커뮤니티에 박제하거나 소문이 나서 욕이라도 먹지, 현재 아르투 소백작은 조실부모하고 누이까지 잃은 놈이라 누구 못 건드린다.
“소백작, 미안하지만…….”
라예르가의 적장녀도 상황의 압박감 때문인지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이런, 다른 여자들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상대가 너무 진상이다.
“제가 보기엔 레노르 양으로도 충분할 것 같거든요.”
“…….”
저 미친 새끼가 진짜 돌았나.
계산적으로 생각하자면, 아이린 공녀는 해리스(플러스로 그와 엮인 나까지)의 적으로서 등장했다.
그러니 저들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기 힘든 아르투 소백작 같은 놈을 대신 상대하게 하는 건 여러모로 나쁘지 않…….
‘……기는 뭐가 나쁘지 않아! 보기만 해도 거지 같다!’
부숴 버리겠어!
* * *
아르투 소백작의 계획은 단순했다.
‘여자를 꾀어야 해.’
아버지가 죽기 전에 구슬린 탓도 있었다.
목적을 위해 계집을 꾀라.
그 수작에서 꾀어야 할 상대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펐다. 머저리 같던 누이는 지참금 걱정이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이로써 어머니의 유산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부족해.’
아르투 백작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그리고 아버지와 누이를 죽인 진범을 찾기에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르투 소백작의 눈에 그 모든 것을 갖춘 귀족 영애가 보였다.
‘라예르가의 딸……!’
미남미녀로 가득한 라예르가에서 유일하게 평범하게 생긴 장녀.
그런 계집은 보통 외모 콤플렉스가 대단하다.
‘그런 주제에 신분은 지나치게 고귀하니, 함부로 다가서는 사내도 몇 없겠지.’
있다 한들 라예르가의 방벽을 쉽게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가능하다.
불행히 돌아가신 가족들을 동정해 선대 공작마저도 자신에게 어쩌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
‘지금이야.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어!’
유혹해야 한다.
정 안 되면, 마음이 약해 보이니 어떻게든 구슬려 혼인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고 보면 그만이다.
제아무리 라예르가라도 딸을 시집보내면 어쩌지 못하겠지. 고드윈도 그랬지 않은가?
그리고 예상대로.
“아, 아르투 소백작. 가족 일은 유감이지만 이건…….”
라예르가 후작 영애, 레노르는 얼굴을 굳히며 제가 내민 꽃을 피했다.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그 사실로 눈에 불이 들어온 아르투 소백작은 더욱 집요하게 들이댔다.
“레노르 양, 이제 깊은 사이인데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마시죠.”
그리고 손에 쥔 꽃을 레노르 앞에서 흔들었다.
“슬슬 제 손이 아픈데 꽃 좀 받-”
“레노르 님께선 아르투 소백작을 불편히 여기고 계십니다!”
“이만 물러나 주십…… 까악!”
건방지게 레노르의 하녀가 앞에 나섰지만.
“하녀 따위가 어딜 끼어들어!”
아르투 소백작은 참교육을 보여주었다.
황당해하는 얼굴을 보니 아랫것들도 제대로 못 다루나 보지?
‘진짜, 가문 말고는 쓸데가 없군.’
얼굴도 몸매도 취향이 아닌데.
언짢아진 아르투 소백작이 한 소리 하려던 순간이었다.
“꺼져 X신아!”
“억?!”
* * *
나는 장갑을 던지자마자 소리쳤다.
“레노르 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예르가 소후작이거든?!”
아르투 소백작이 내뱉는 개소리 족족 개빡쳤지만, 저게 제일 신경 쓰였다.
‘개새끼……! 난 노예에서 남작까지 올라왔어도 꼬박꼬박 ‘님’자 붙이고 산다고!’
신분 상승 성공의 신화를 이룩한,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인 나마저 철저히 지키는 신분제를 저 본토 세계인이 안 지켜? 열받는다!
“뭐 이런 미친년이……?!”
아르투 백작의 눈은 나를 알아보자마자 살기를 내뿜었다.
“년이 아니라 리안 남작이다!”
거지 같은 람서스 제국……. 이딴 놈도 귀족이라니! 망해라!
“남작? 비천한 계집년이 웃기고 있군. 얼마나 주제도 모르고 나대면-”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건 네놈이겠지, 아르투 소백작!”
“저년이!”
아르투 소백작은 장갑을 쥐어 들어 결투 승낙 표시를 취했다.
신사가 레이디와 겨루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내가 먼저 장갑을 던졌으니, 핑계는 확실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가족이 그렇게 죽었으니 나도 죽여버리고 싶겠지.
‘그러든가.’
나도 마찬가지다. 죽일 순 없으니 고자로 만들어주마.
물론 그랬다간 또 아르투 백작 가문의 대를 끊었다고 욕먹겠지만…….
‘사람이 욕도 먹고 살아야 오래 살지!’
이번 생은 장수해 보자!
나는 아르투 소백작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머저리 같은 것, 곱게는 못 뒤질 줄 알아라! 울며불며 살려달라 해도 늦었-”
“잠깐.”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팔이 나와 아르투 소백작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녕 이 작은 소녀…… 아니, 리안 남작과 결투하겠단 말이오?”
레노르였다.
조심스럽던 이전의 태도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말투 또한 급격히 딱딱해져 있었다.
“레노르 양, 겉보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저 악랄한 년은 제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
“그 무슨 헛소리요! 자네를 썩 좋게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신사도는 있다고 생각했거늘…….”
“뭘 알고나 끼어드십시오!”
아르투 소백작은 버럭 고함쳤다.
“저년 때문에 제 아버지와 누이까지 모조리 누명을 쓰고 죽었어요! 저는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원한을…… 컥!”
그러나 고함은 갑작스럽게 멎었다.
“가족을 한순간에 잃은 가엾은 자. 그렇게 보아 무례를 몇 번이고 넘어가 주었지.”
철썩.
흰 가죽 장갑이 아르투 소백작의 안면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범인을 찾는 데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이 약자에게 화풀이나 하는 꼴이라니!”
레노르는 싸늘해진 얼굴로 장갑을 벗은 맨손을 쓰러져 있는 하녀를 향해 내밀었다.
“내 명예를 위해 나선 리안 남작을 대신해, 결투를 신청하오.”
어, 어라.
나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사태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 검을 가져와라!”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 * *
“하, 검 좀 다루어 보셨다고 자신만만하신가 보군요.”
결투는 본성의 연무장에서 치러졌다.
“그래봤자 여자가 결투에서 사내를 이기는 일 따윈 연극에나 나오는 일입니다. 두고 보시죠!”
-라고 말하며 아르투 소백작은 굳이 하인이 가져온 진검을 제치고 목검을 들었다.
‘아니, 뭐, 사실 안전하게 하려면 그게 맞긴 하지. 하지만…….’
레노르가 본인 소유의 진검을 꺼내 든 시점에서 저러는 건 좀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약자 존중, 신사도를 따지던 만큼 본인도 기사도를 따르는지 레노르는 말없이 목검으로 바꿔 들었다.
“지금이라도 후회하지 마시고, 패배를 인정하시면…….”
“준비 끝났나? 시작하지.”
“……그 차림새로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이건 결투 상대에 대한 모욕입니다!”
“…….”
드레스를 벗고 수련복으로 갈아입은 레노르는 더는 그의 트집을 받아주지 않고 검을 들었다.
“자, 자, 잠깐…… 잠깐!”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