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하암~ 길게 하품을 내쉰 알루카스는 짜증스럽게 배를 긁으며 말했다.
‘진짜 아저씨 같다.’
분명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을 행동인데, 긁히는 뱃가죽 위의 우둘투둘한 복근 덕분에 몸매 자랑처럼 보이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더 짜증 나!’
그와 마찬가지로 졸린, 정확히는 숙취에 시달리는 제이드가 불만스럽게 답했다.
“알아요.”
“알면…….”
“그래도!”
버럭, 소리를 지른 제이드는 제가 지른 소리에 제 머리가 울리는 고통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루카스! 님이! 애초에! 그런 쪽지를 안 보냈으면-!”
“아야, 아야, 아야! 아야~!”
제이드는 철썩철썩 알루카스의 근육 가득한 팔뚝을 후려쳤다.
알루카스는 팔뚝을 잡고 엄살을 피우다가 제이드를 흘겨보았다.
“마지막은 진짜 따갑잖아.”
“아프다고 해요, 아프다고!”
전력을 다해 팔뚝을 후려쳤는데, 상대는 겨우 모기 물린 것 정도로 취급할 때의 심정이란.
제이드는 씩씩거리며 알루카스를 노려보았고, 알루카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하여간…….”
“하여간, 이 아니라!”
애초에 왜 그런 쪽지를 왜 보내선!
제이드는 다시 찌릿 알루카스를 노려보았다. 알루카스도 찔리는 게 있는지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근육질 팔뚝을 쓰다듬었다.
아르투 백작과 딸이 사망했다. 깨어나자마자 들은 소식이었다.
‘사인은, 자살.’
처음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목을 매단데다가, 벽에는 자신들이 감히 선대 공작을 기만하려 한 것에 사죄드린다는 문구가 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 각하께서 아르투 백작을?!’
‘너, 너무하시는군. 아무리 불경죄를 저질렀다 해도,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나오시다니.’
‘이건 원로회에서도 나설 수 없는 일이네. 어쨌거나 자살의 형식을 취했으니…….’
‘게다가 스스로 죄도 자백했지요. 어쨌거나 극형감이긴 합니다. 차라리 가주와 공범인 딸이 이리 죽었으니, 아르투 백작 가문은 살겠군요.’
‘……이번 일로, 고드윈의 후계를 누구로 삼을지에 대한 각하의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라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었다.
선대 공작이 이번 후계자 발표 연회에서 개쪽당하시고 빡치셔서 본보기로 아르투 백작 일가를 아예 박살 내 버린 게 아니냐는.
선대 공작만큼은 아니더라도 해리스도 같이 의심받고 있다. 이능으로 어떻게 한 거 아니냐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는 상황.
‘증거 인멸 안 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여기서 저 쪽지라도 나왔으면 난리가 났겠지. 이런 플래그도 피해 가는 나, 제법 대단해요.
‘-하고, 안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혹시나 한 상황을 피했다 해도 속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이 세계는 사람이 너무 쉽게 죽어 나가는 거 같다. 고성에서 악랄하던 사용인들, 그리고 하녀 보나, 이제는 아르투 백작까지.
다 인간쓰레기들이며 나를 죽일 뻔한 사람들이라는 건 안다.
알지만…….
‘난 원래도 죽음하고 가까웠던 사람이란 말야.’
희귀병 환자, 장기 입원자. 그런 곳에 있으면 죽음을 겪게 될 일이 많다.
‘……나만 해도 한 번 죽었을 정도니까.’
제이드는 조소했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익숙해지지 못한 죽음이 여기 와서 더 낯설지 않게 다가오다니.
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섭네요.”
“음? 네가 왜.”
“…….”
그래, 바로 이렇게.
약한 것들의 죽음은 남 일이라는 태도의 이기적이고 공감 능력 떨어지는 S급들을 보면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나조차도 점점 익숙해지는 거 같아서 더더욱.
“고드윈 본성 보안이 뚫렸잖아요.”
제이드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선대 공작님이 아르투 백작 일가가 죽으면 자신께 혐의가 올 줄 모르셨을까요? 더욱 철저히 경비하셨을 텐데…….”
“서관 감옥이 보안? 허접하던데.”
“…….”
제이드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알루카스를 응시했다.
“뭐, 왜.”
“……알루카스 님 기준으로 말씀하시면.”
“당연히 내 기준으로 말해야지.”
알루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다가 불려 나오느라 대충 걸친 비단 로브가 흘러내리며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알루카스는 익숙한 탄성을 기대하며 하품을 삼켰다.
어젯밤, 난장판으로 끝나 버렸던 연회가 다시 열렸었다. 당연히 손님과 방계를 맞이하는 서관에는 각종 귀부인이 가득 모여 있었다.
누구 하나 나의 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할 법도 한데…….
“……?”
눈앞의 소녀는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이며 갸웃거리고 있다.
뭐지? 마찬가지로 갸웃거릴 뻔한 알루카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맞다. 다 떠나고 있지.’
술을 잔뜩 들이켜서 잊고 있었네.
하암~ 알루카스는 귀에 들려오는 서관의 복잡한 소리에 다시 늘어지게 하품했다.
아르투 백작 일가의 자살‘처럼’ 보이는 살인 사건의 소식 이후, 초대받은 손님과 가신 대다수가 빠르게 떠나고 있었다.
보통 연회가 짧아도 3일, 길면 일주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드문 일이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호스트가 마련한 숙소에서 충분히 대접받다 떠나는 게 관례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무섭다는 거겠지.’
오랜만에 연 고드윈 본성의 연회는 이렇게 악몽처럼 끝났다.
알루카스는 어쩐지 즐거워져 씩 웃으며 말했다.
“죽인 놈도 나랑 비슷한 급인데.”
“……!”
제이드는 입술을 달싹이려다 말았다.
본능적으로 ‘해리스 님이 아니에요!’ 하고 반박하려다가 알루카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까닭이다.
“너도 아는구나?”
“……제가 할 소리 아닌가요?”
“내가 듀크 아인델타를 못 알아볼 리가 있냐? 저래 봬도 암살자의 왕씩이나 되는 놈인데.”
알루카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담은 이름에 루켄이 흠칫했다.
“아니, 그 새끼가 와 있었어요?!”
“……!”
제이드는 흠칫 놀랐다. 아니, 저 사람은 언제 또 저기 와있었지.
“넌 왜 또 뒷북…… 아니, 훔쳐볼 거면 조용히 훔쳐보든가. 왜 갑자기 끼어들어.”
“앗,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이제부터 닥칠게요.”
“……아니, 언제부터 듣고 계셨던 거예요.”
“아, 처음 찰지게 단장님 후려갈기실 때부터요.”
루켄은 제이드에게 윙크했다.
“이야~ 손맛이 매우시던데요, 가이드님?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알루카스 단장님의 보좌관인 루켄이라 합니다, 언제 저도 한번…….”
루켄은 스리슬쩍 다가와 제이드에게 얻어맞으려 팔뚝을 내밀었다가 알루카스에게 걷어차였다.
“꺼져, 좀.”
“아, 취향 아니라면서 왜- 악! 말, 말로 하십- 와악!”
어느덧 화염에 휩싸인 루켄이 사라진 뒤, 알루카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듀크 아인델타를 무슨 금붕어 똥처럼 끌고 다니더라?”
“……저기, 보좌관 죽지 않나요?”
“됐어. 쟤 화염 저항 스킬 있어.”
제이드는 왠지 루켄이 어떻게 화염 저항 스킬을 얻어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뭐…… 잘못 걸린 게 있어서요. 이래저래 문제가 복잡해서, 사실 저번에 카페 간 것도…….”
“불행히도 이번엔 떨어졌더라만.”
“그놈 만나러- 잠깐, 뭐라고요?”
제이드는 사정을 설명하려다 멈칫했다.
분명 그 관음증 쾌락 살인마가 지금도 주변을 떠돌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없다고, 그놈.”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제이드는 멍하니 알루카스를 올려다보다 물었다.
“……왜?”
“글쎄, 어디 갔나?”
“아니, 그거 말고요! ‘불행히도’라는 파트!”
그 쾌락 살인마가 더는 내 뒤를 따라붙지 않는 게 어째서 불행한 일이란 말인가.
“아, 그거.”
알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막 사내의 커다란 육신이 제이드의 자그마한 몸을 완전히 가둘 듯 가까워졌다.
“그야 당연하잖아.”
“왜 당연한지 모르겠…… 아니, 일단 퍼스널 스페이스부터 좀 지켜주시면…….”
“너처럼 흥미로운 관찰 대상을 두고 떠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 찾아온다는 소리니까.”
“……!!”
* * *
나는 터덜터덜 중앙관으로 걸어갔다.
‘인생…….’
처음 알루카스를 찾아갔을 땐 아르투 백작 일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는 일에 협조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야 선대 공작님은 아니니까.’
현재 구 고드윈 세력은 공포에 떨고 있다.
아무리 아르투 백작이 잘못했다 한들, 이렇게 막무가내로 죽여버리면 자신들의 안위도 불안해지는 거니까.
이게 폭군 남주물이면 이런 상황에서도 권력 구조가 굳건히 잘 유지되겠지만, 전에 말했다시피 선대 공작님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이번 일로 아르투 백작 가문은 피해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졌어.’
결과적으로, 선대 공작님은 자신의 기반 세력과 이간질당한 셈이다. 구 고드윈 세력이 약화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런 수작을 부릴 사람?
‘당연히 개쓰레기 노먼 고드윈이지.’
안 봐도 뻔하다. 그래서 입증하려 한 건데…….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계속 머무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군.’
쪽지를 핑계로 끌어들이려 한 알루카스는 내 제안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거절했다.
‘나도 귀족 놈들이 떠나면 슬슬 자리 비우려고. 수도에서 의뢰가 꽤 있던데 건국제 다가오는 기념 그쪽에나 가볼- 아야! 왜 또 때려?’
‘기분 탓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
메시지를 공격하지 못하면 메신저를 공격해라.
그 고전적인 방법대로, 후계자를 해리스로 세우겠다는 결정을 꺾지 못하니 그 결정권자인 선대 공작을 공격했다.
‘완전히 당했어.’
이번 연회는 나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국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젠 또 어떻게 해야 하지?’
가뜩이나 지끈거리는 머리는 아직도 숙취가 풀리지 않아 더 아팠다.
‘게다가, 그 관음 병자 암살자가 가버릴 정도의 일이 찾아온다니.’
알루카스는 어쩌면 위험하다기보단 성가신 일일 수도 있다고 부연하긴 했지만, 전혀 안심되지 않았다.
‘대체 또 무슨 일이 터지려고.’
지금 일어난 일만으로도 수습 안 되는 와중이거든요?
그렇게 머리를 싸매며 해리스를 찾아가려던 와중이었다.
“자꾸 튕기지 마세요. 튕기는 여자는 매력 없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
빡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