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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61화 (61/119)

61화

그러니 제이드.

날 배신하지 마.

내가 널 죽이게 만들지 말아줘.

저주와 같은 속삭임. 테라스에 내려오던 몽환적인 달빛은 어느덧 사라지고 우글거리는 어둠이 사방을 에워쌌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기이하고도 섬뜩한 공간 한가운데에는…….

“……해리스 님.”

어둠이 고여 흘러내린 듯 검은 머리카락. 깊은 눈매의 적안은 암흑 속에서도 선명하고, 하얀 피부는 인간이 아닌 석고처럼 매끈했다.

아름다웠다. 가까이 갔다가는 살이 베이고 피를 볼 것처럼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아름다움.

제이드는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 그를 목도한 순간부터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토록 압도적으로 아름다웠지만, 그리하여 두렵기도 했지만…….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제이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정신 공격에 가까운 외모에 마비되어 몽롱하던 이성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왜 언제는 가짜로 죽이려 했던 것처럼 말씀하시는지? 맨날 진짜로 죽이려 했잖아요.”

“…….”

빙의 첫날부터 해리스에게 죽을 뻔하고, 그 뒤에도 거의 1일 1죽음 위기로 살아온 빙의자로선 ‘너 배신하면 죽인다’ 같은 협박은 이제 익숙해진 인사말 같았다.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하지만 익숙해졌다 한들, 협박은 협박. 제이드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저런 말을 들어야 하지? 심지어 오늘처럼 전심전력으로 해리스의 편을 들었던 날에?! 여기서 내가 뭘 어떻게 더 잘하라고!

“진짜…… 진심…… 진짜 진심 너무해!”

흐윽,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가 취지에 빨개진 뺨 위로 도르륵 흘러내렸다.

“…….”

해리스는 가만히 제이드를 보았다.

무서워할 거라곤 예상했다.

그래도 배신 따위는 생각도 못 하게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분명 그랬지만…….

“너무해액-!!”

해리스는 멍하니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물든 제이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 서러움이 분노로 물들어버리는 것까지.

“나쁜 놈! 쓰레기! 개자식! 니가 인간이냐-!”

이런…… 무서워하다 못해 180도 돌아 아예 카량카량 극대노한 고양이처럼 화를 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인간이냐고!!”

“……아닌 거 같다.”

분노를 토해내는 제이드의 얼굴에 해리스는 냉정히 답했다.

자신의 이능을 생각하면 이제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는 훌쩍 뛰어넘은 뒤다.

“아니면 다야?!”

옹골차게 주먹을 쥔 제이드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정권 지르기를 훅 날렸다.

“……!”

해리스는 눈을 크게 홉 떴다. 옹골찬 주먹이 정확히 명치를 후려갈긴 것이다.

아프다기보다는, 이 주먹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맞은 자신이 충격적이었다.

“진짜 탈덕할 거야, 이 나쁜 놈아!!”

그리고 오늘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두 눈 부릅뜨고 화내던 제이드는 화를 쏟아내자마자 풀썩 쓰러졌다.

“제이드?!”

황급히 그녀를 잡아챈 해리스는 이어진 ‘쿨-’ 소리에 잠시 굳었다.

“……자냐?”

설마 이래놓고 진짜 잔다고?

기가 막힌 해리스는, 잠이 든 제이드를 내려다보다가 발견했다. 제이드 곁에 쓰러진 대여섯 개의 샴페인 잔을.

“…….”

그래, 취했던 거구나.

그리고 난 취한 사람에게 헛소리나 지껄인 등신이고.

현타가 온 해리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깨달았다.

자신을 이렇게 뒤흔드는 사람도, 가라앉히는 사람도 언제나 하나.

“음냐, 해리스 님…….”

제이드, 너 하나뿐.

“왜.”

술 취한 사람의 의식 없는 웅얼거림인 걸 알면서도 해리스는 대답했다.

“졸려요…….”

“보면 알아.”

“침대…… 이불…… 배게…….”

“너 사실 안 취했지?”

해리스에게 기대어, 여긴 딱딱해서 불편하다 칭얼거리던 제이드는 몇 번 버둥거리다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를 마치 다람쥐의 도토리처럼 꼭 끌어안은 채.

‘술버릇이 이거야?’

주변에 치대고 성질부리기?

해리스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도 못했는데, 들끓던 의심과 불안은 멋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정말이지, 제이드는…….

피식 웃은 해리스는 제 품에 쓰러진 제이드를 추슬러 똑바로 안아 들었다.

“누가 주인인지.”

얕은 투덜거림이 테라스에서 이어진 동관의 비밀 통로에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 * *

아르투 백작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하 감옥은 아니라, 귀족들 전용 감금실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일단 혐의가 확실히 밝혀진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조사도 진행되기 전이니까.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그렇다 한들 아르투 백작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공작 성에 사람을 심은 것 정도야 가신들이라면 흔히들 하는 일이었다. 황실조차도 귀족들이 눈을 심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키는 것까지 용납되는 건 아니었다.

그것도 본성의 가장 핵심적인 치안 정보를 다루는 감옥은 더더욱!

“부, 분명 잘 될 거라고 했잖아.”

의자에 앉은 백작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패륜아 새끼 따윈 제치고, 우린 혐의를 벗을 거라고…….”

분명 그랬는데. 노먼 고드윈이 그렇게 말했었는데-

똑똑.

굳게 닫혀 안쪽에서는 열 수도 없는 문에서 두드림이 들려온다.

아르투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얼어붙었다. 어느 각하? 선대 공작? 아니면…….

“노먼 고드윈.”

“……!”

아르투 백작은 순간 안도했다.

그래, 노먼 고드윈이 자신을 이대로 둘 리가 없다.

‘엄밀히 말해 본성 감옥에 사람을 심어둔 건 내가 아니잖아?’

이건 노먼 고드윈 측에서 알아낸 소식이었고, 어디까지나 자신은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말씀드린다면 제아무리 선대 공작이라 한들 어쩔 수 없겠지!’

제 아들, 노먼 고드윈에게 제대로 손 쓰지 못해 결국 이렇게까지 밀려난 못난 아비 아닌가.

그리고 노먼 고드윈도, 본성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이대로 죄인의 처지로 두진 않을 것이다.

“고, 공작 각하께서 보내셨소?”

“예.”

그래! 자신은 아르투 백작이며, 고드윈 공작 가문의 가신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아름다운 딸과 유능한 아들, 부유하고 능력 있는 가문을 다스리고 있다.

이런 내가 쉽게 버려질 리가 없다. 이렇게 끝날 수 없는 것이다……!

“그분께서 걱정하지 마시라며, 앞으로의 계획과 동향을 설명하기 위한 쪽지를 보내셨습니다.”

“……!”

슥- 문틈 사이로 쪽지가 들어왔다.

합리화하면서도 쉽사리 문밖의 사람을 믿지 못하던 아르투 백작은 다급히 쪽지를 줍기 위해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공포로 얼어붙어 비논리적으로 불안함이 이어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과도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도.

선대 공작은 가신들을 아무렇게나 죽일 수 있는 폭군이 아니었다. 인격적인 면모를 고사하고 권력 구조적인 면에서도 그러지 않을 위인이었다.

그런데도 아르투 백작은 죽음의 두려움에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를 인지하지 못한 채, 아르투 백작이 문 가까이 걸어가 쪽지를 주워 든 순간-

“-커헉!”

그림자가 백작 위로 드리웠다.

“아, 이 새끼 존나 굼뜨네.”

본성의 사용인처럼 차려입은 자가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그의 손아귀엔 아르투 백작의 목이 틀어 잡힌 뒤였다.

“카학, 컥, 커헉……!”

아르투 백작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발버둥을 쳤지만, 그것은 사자에게 목이 잡힌 너구리의 발버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르투 백작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

달칵, 문을 닫고 들어선 암살자가 아르투 백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저, 정말 날 놓아준 건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아르투 백작은 바닥에 쓰러져 쿨럭였다. 피가 쏠려 벌게진 얼굴로 그는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어, 어째서! 나는, 노먼……!”

“아, 맞아.”

암살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 공작 놈의 의뢰지. 폭로조차 제대로 못 해내면 죽여서 없애 버리라 하더라고.”

“……!”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유리하다나.

그렇게 흥얼거리던 암살자는 침구의 천을 가져와 천장에 매달았다.

“나 원래 이런 잡무까진 하지 않는데……. 뭐, 기왕 있는 김에 겸사겸사하는 거긴 하지만…….”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암살자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것이 공포스러워 아르투 백작은 협상할 생각도 잊고 외쳤다.

“미, 미친, 미친놈-!”

“그래, 그래.”

나도 알아.

나붓하게 속삭인 암살자는 아래를 지린 아르투 백작의 목덜미를 귀찮다는 듯 구겨 쥔 다음 천장에 매달았다.

“걱정 마, 혼자 가는 건 아니니 외롭진 않을 거야.”

“……!”

부릅뜬 눈은 감기지 않은 채 혼탁해졌다.

암살자, 듀크는 손을 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크게 문제 될 흔적은 없지만…….

‘이래 봤자 들키겠지.’

어차피 그렇게 치밀하게 숨길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죽은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 의뢰 조건이라 그렇지.

“하여간, 세상엔 성가신 의뢰인이 너무 많다니까.”

하지만 때로는 그 귀찮은 의뢰들 사이에서 진주 같은 만남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게 이 일의 즐거움이었다.

“제이드, 리안이라.”

듀크는 씩 웃었다. 정말이지 지켜보는 보람이 있는 가이드였다.

“아, 내가 관음증 있는 거 어떻게 알고.”

그녀가 다른 이능력자의 반려 가이드라는 것은 그의 즐거움을 해치지 못했다.

계속 발버둥 치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꼴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었다.

어디까지 할까 기대되는 마음까지 생길 정도로.

“이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그때엔 직접 얼굴 보고 인사해야지.

듀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꺄아아악-!”

귀청을 찢어놓는 비명이 울린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새벽이었다.

“아, 아르투 백작과 영애께서-!”

* * *

“내가 안 죽였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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