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답 자체는 진심이었다.
연회장에 서 있을 땐 이렇게까지 갈증이 의식되진 않았는데, 해리스에게 안겨 테라스에 도착하니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안심해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분리된 테라스의 공간. 누가 딱히 들어올 리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새삼 귀족 놈들하고 머리채 잡고 싸우느라 목마르고 지쳤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래서 알루카스가 하인 보냈을 때 들떴는데…….’
드디어 센스 있는 사람 하나 나오나, 했지. 근데 현실은 아직도 물 한 모금 못 마셨다.
“……큭, 큽!”
그리고 해리스 반응으로 보아, 아무래도 물도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목마른 게 웃겨? 어?’
이쯤 되면 빈정 상한다. 웃으려면 물이라도 주고 웃든가!
제이드는 고개 돌려 마음속 불만을 애써 묻었다.
‘쪽지 건으로 괜히 떠들었어, 갈증 나 죽겠네.’
작은 한숨, 그를 어떻게 들은 건지 해리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제 웃음을 참아냈냐는 듯 말짱한 얼굴이었다.
“마셔.”
“……!”
제이드는 눈을 빛냈다. 어느덧 물이 코앞에 있었다!
그것을 가져온 게 검고 촉수처럼 응집된 마력이라는 건 개의치 않으며 제이드는 꼴깍꼴깍 들이켰다.
“캬~ 시원하다.”
“…….”
거의 술을 원샷 한 수준의 얼큰함이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어진다더니, 물을 마시고 나니 달고 상큼한 과일 주스가 생각나고 고당도 간식이 끌리네.
“여기.”
“와, 감사합니다.”
때마침 해리스가 물 다음으로 건넨 건 달콤한 샴페인이었다.
도수가 높지 않고 주스처럼 달달하기만 해 제이드는 기분 좋게 실실거렸다.
“그래서…… 왜 그런 거야?”
“네?”
갑자기 무슨?
제이드가 눈을 깜빡이자 해리스가 연회장을 턱짓했다.
‘아, 오늘 말이지.’
제이드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야 뭐, 이건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요.”
“……네 책임?”
“네.”
제이드는 톡톡 터지는 샴페인의 공기 방울을 응시했다.
“사실, 해리스 님은 이런 걸 바라신 적 없잖아요. 관심도 없고.”
그냥 막무가내로 노먼 고드윈 개자식을 죽여버릴 생각이었을 텐데, 내가 어르고 달래서 이런 거지.
물론 제이드는 그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
고드윈이라는 이름이나 고위 귀족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리에서 오는 이점과 권리들, 양지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자유 같은 것들.
‘하지만, 결과적으론 해리스가 해낼 수 있는 당장의 복수심을 억누르게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해.’
본래의 해리스는 이렇게 차근차근 권력을 쌓아나가며 인내하는 것보단, 탈출하자마자 곧바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로 인해 자기 인생이 망해도 상관없다고 여겼겠지.’
그로서 어둠에 갇혀 정체를 숨기고 흑막처럼 살아가는 삶을 산다 해도.
‘하지만 난 상관있어.’
당신의 삶에 미래가 있길 바라.
어둠 속에 숨어서 타인을 조종하는 흑막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닌, 빛 아래에 나와서 당당하게 원하는 일을 하고 웃으며 살아가길 원해.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일 뿐이고, 강요라는 걸 안다.
그러니 보답이나 이해를 바라서도 안 된다는 것도.
‘그만큼 내가 잘해야 해.’
제이드가 미리 연회장에 해리스 지지자들을 풀어놓고 반박을 준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책임이니까…….”
“…….”
해리스는 제이드를 보았다.
샴페인으로 빨개진 뺨, 주절거리는 속마음.
그래, 인정한다.
자신은 당장 아버지를 찾아가 잔인하게 찢어 죽일 생각뿐이었고, 그 뒤 자신의 현재나 미래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 시원해.”
제이드는 테라스에 기대며 눈을 감는다.
저녁 공기의 시원한 바람이 정원의 꽃잎을 흔들고, 샴페인에 흥이 오른 제이드가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맑고 깨끗한 공기, 귀를 간질이는 노랫소리, 달콤한 향.
‘아.’
그제야 해리스는 자신의 ‘현재’를 인식했다.
감옥에 갇혀 있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억압당하지도 않은 자유롭고 나른한 저녁.
만월의 달빛이 쏟아진다.
하얗고 자그마한 몸과 그 위로 물결치듯 흘러내린 옅은 분홍빛 곱슬머리에.
길고 선이 가는 팔다리, 작고 갸름한 얼굴, 반쯤 감긴 눈을 촘촘하게 덮어오는 섬세한 속눈썹…….
“해리스 님.”
어둠 속, 푸르게 잠긴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한다. 도톰한 입술이 미소를 그린다.
“여기 좋네요.”
달처럼 환하게, 몽롱하고 비현실적으로.
“……그래.”
해리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의 달로 빚은 듯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의 현재라는 것을.
그리고 미래이기를 바란다는 것도…….
하아, 해리스는 열에 들뜬 한숨을 내뱉었다.
달큰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고 걷잡을 수 없이 고혹적인 향이 물밀려 들어왔다.
이것은 정말로 향일까, 아니면 내가 너에게 취해 버린 것에 불과한 걸까.
‘믿으면 안 돼.’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려온다.
상식적으로 제이드는 믿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느니, 예언자이니 하는 건 둘째 문제였다.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는 건 익숙했고, 이젠 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위해 누군가 나서주고, 앞서서 싸우는 사람이라니.
‘믿으면 안 돼…….’
손목이 아려온다. 이미 사라진 억제구의 통증이 상기되어 욱신욱신 박혀온다.
이미 믿음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지 않았나.
알 텐데.
“……너한테서 달콤한 향이 나.”
해리스는 제이드를 응시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약해졌을 때.
또는 흔들리고 무너질 것 같은 순간, 그 틈새를 노리고 파고들려는 듯 제이드에게서 향이 뿜어져 나온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자극시키려는 듯이.
그대로 따르면, 어떻게 될까.
“언제나 그런 것도 아니고, 하필 이런 순간에 지독하게 달큰한 향이…….”
“아, 그, 그게.”
제이드가 당혹스럽다는 듯 말을 더듬는다.
발음이 뭉그러진 목소리에 해리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고.
“…….”
잠시 말문을 잃었다.
눈앞엔 그사이 뭔가 주워 먹은 듯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진 제이드가 있었다.
“…….”
심지어 침묵한 해리스의 눈치를 보며 더 우물거리기까지 한다.
이 와중에도 먹을 게 들어간다고.
여전히 볼이 빵빵한 상태의 제이드는 해리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듬더듬 말했다.
“가, 간식.”
“…….”
내가 몰라서 보는 줄 알아?
보아하니 옆에 주머니 같은 것도 있었다. 미리 준비라도 해둔 모양이지.
“달다구리…….”
“음식의 종류가 뭔지는 나도 안다.”
“배, 배고파서요…….”
“…….”
침묵이 길어지자 제이드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쪽팔려.’
역시 치사하게 혼자 먹는 게 아니었다.
아니, 어쩔 수 없잖아. 방금 해리스는 ‘님도 드실래요’ 하고 말 걸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뭔가 엄청난 상념과 고뇌에 빠져있는 얼굴이었단 말야.’
난 예의상 말 안 걸고 조용히 먹은 거라고!
속으로 열심히 변명한 제이드는 꿀꺽, 급히 입안에 든 달다구리를 삼킨 뒤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했다.
“죄, 죄송해요. 혼자 먹어서…….”
그러나 역효과였는지, 해리스는 자신의 커다란 손에다 얼굴을 묻었다.
끅, 큽, 웃음을 참는 듯한 신음과 함께 커다란 상체가 흔들렸다.
“…….”
제이드는 애써 흐린 눈으로 상황을 외면했다.
한참 그렇게 근육질 상체를 들썩이던 해리스가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배가 왜 고파.”
“제가 사실 오늘 연회 준비로 끼니를 제대로 못 먹어서…….”
제이드는 설명하면서도 속으로 억울해했다.
‘연회장 들어오기 전부터 말했잖아, 배고프다고!’
이리저리 씻겨지고, 옷 입혀지고 화장하고 하느라 식사할 타이밍을 놓쳤다.
다행히 하녀 언니들이 미리 챙겨주었고, 연회에서 별일 없었으면, 구석에서 주워 먹을 생각이었다.
‘하필이면 연회에서 개판이 나서.’
먹을 타이밍이 없었다!
해리스는 자기 눈치를 보면서도 샴페인을 다시 입가에 기울이는 제이드의 모습에 기가 찼다.
“지금 그게 또 들어가?”
“모, 목이 마른 데 양해해주시면…….”
“목은 또 왜 말라.”
네가 상념에 빠진 틈에 조심히 숨죽여 먹느라 음료:간식의 적정 비율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샴페인을 그렇게 마시더니. 뭘 얼마나 그렇게 주워 먹은 거야?”
얼떨결에 주머니를 빼앗겼다.
해리스는 검은 마력으로 가져온 주머니를 힐끗 보고서 잔소리를 했다.
“배고프면 샌드위치 같은 걸 달라고 하든가, 이 단 것들은 또 뭐야?”
“그치만, 오늘 너무 많은 열량을 소모해서 고당류를 섭취해야만 충전이 된……. 아니,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
다시 온 침묵에 제이드는 자신이 뭔가 심각한 분위기를 깨버렸다는 걸 인지하고 진지하게 사죄했다.
“진짜 죄송합니다. 앞으로 탄단지의 비율을 지켜 먹도록…….”
“어떻게든 먹긴 해야겠다?”
“때와 상황을 가리지 못한 것도 죄송…….”
먹는 것까지 눈치 주다니, 이 악덕 상사 같으니, 근무 시간도 안 지켜주고!
속으로 욕하는 걸 듣기라도 한 건지 해리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진짜 미치겠네.”
“……?!”
제이드는 눈이 커졌다. 갑자기 해리스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가벼운 포옹이 아니라 그대로 삼켜 버릴 듯, 꽉.
‘뭐지, 혹시 접촉 가이딩이 필요한 건가?’
하긴, 생전 먹는 거로 뭐라 안 하던 놈이 개코처럼 냄새 운운한 것부터 이상했어.
아무래도 해리스도 자신처럼 컨디션이 메롱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가이딩이 아니라 흡성대법일 텐데……!’
이 와중에 그거까지 들킬 순 없어!
제이드는 접촉 가이딩을 하는 척 마주 끌어안아 토닥이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다급히 진정제를 찾았다.
“제이드.”
“네, 네.”
역시 유비무환이다. 분명 여기쯤 넣어둔 거 같은데…….
“나 배신하지 마.”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고개를 든 제이드가 마주한 것은 피처럼 붉은 적안이었다.
“네가 날 배신하면…….”
내려다보는 해리스의 얼굴엔 무섭도록 표정이 없었다.
새빨간, 산 채로 꺼내 뜨겁게 박동하는 심장을 그녀에게 쥐여준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새까매져 버린.
“……정말 죽여버릴지도 몰라.”
이는 살해 협박이 아니었다.
제이드에게 죽음의 안식 같은 자비를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허의 이능으로 죽음으로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그대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몸으로 영원히 자신에게 갇혀 버릴 거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