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하인이 하나가 ‘제이드 님, 저쪽 신사분께서 보내신 겁니다’ 하고 속삭였을 때, 솔직히 나는 기대했었다.
‘앗, 나 이거 알아.’
술집이나 식당에서 취향인 사람에게 어필하기 위해 달콤한 음료를 서비스로 보내주는 것!
‘역시 제이드, 세계관 최고 미소녀답군.’
하, 이 미모 어쩔 거야. 내 치명적인 매력까지 더해지니 사방에서 난리네, 난리.
물론 누가 나보고 세계관 최고 미소녀라 인정해 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고로 중요한 것은 세간의 인정이 아닌 나 자신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아니야!’ 하고 반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무시하며,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낭만적이고 달콤한 샴페인 같은 게 들려 있겠지?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잘됐…….
“……?”
그런데 하인이 건넨 건 쪽지였다.
‘뭐야, 음료 1회 무료 쿠폰이라도 되나’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열었는데, 이딴 싸패 메시지라니.
‘알루카스, 이 미친놈이 진짜 돌았나.’
발신인은 안 적혀 있었지만, 단번에 누군지 알았다.
‘이딴 걸 장난이랍시고 칠 사람이 그 자식 말곤 여기 또 누가 있겠어!’
그리고 알루카스가 ‘죽여 줄까’ 하고 말한 대상이 누군지도 알 것 같았다.
‘아르투 백작이거나 퍼넬로피, 또는 아르투 백작 일가겠지!’
안 봐도 뻔하다.
내가 진짜 미쳐서 ‘그래! 죽여봐라!’ 하고 답장하면 알루카스는 정말 죽여줄 인물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알루카스가 죽여도 크게 문제 안 될 인물들은 아르투 백작 일가뿐이다.
소백작이라는 아들 하나 빼고 다 잡혀갔고, 아마 제대로 풀려나오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놈이 죽으면 엿 먹는 건 나라고-!’
왜냐? 오늘 연회장에서 싸운 거 소문 다 났을 테니까.
한마디로 이건 고급진 엿이란 말이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알루카스를 찾았다.
‘저기 있네, 저 망할 쉑……!’
놀랍게도 난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알루카스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근접 거리에서 만난 사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마나 코어를 인지하고 마력 순환을 주기적으로 해주어서 감이 예민해져서 그런 걸까…….
‘……가 아니라, 저 자식, 나한테 손까지 흔들고 있었잖아!’
이 자식, 나 완전 바보 취급하네.
나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
그런데 알루카스는 정작 내가 자신을 찾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다행이었다.
‘봐라, 이 자식아!’
나는 그가 보낸 쪽지를 주먹으로 우그린 다음, 중지를 펼쳐 엿을 날렸다.
‘엿은 니나 처먹어!’
입으로 달싹여 명확한 의사 표현을 더한 건 덤이다.
이런 무언의 어그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선을 끄는 것이다. 어그로 끌다가 상대가 고개 돌려 먹금해 버리면 어그로 끄는 당사자만 쪽팔리고 마니깐.
그런 점에서 난 아주 훌륭하게 어그로를 끌었…….
“푸하하하!!”
……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땐 멍하니 눈을 크게 뜨던 알루카스가, 내 중지를 보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큰 소리로 처웃고 있었다.
‘아니, 뭐가 웃겨?’
얼굴이 찌푸려졌다. 먹금 이상으로 짜증이 나는 어그로 대응 방식이었다.
그냥 웃어넘기다니……!
‘내가 진 거 같잖아, 젠장.’
진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졌다. 알루카스가 능글능글하고 뻔뻔한 캐릭터라는 걸 잊은 게 패인이었다.
나 혼자 찌질해지고 끝났네……. 울적하게 구겨진 쪽지를 주머니에 넣던 와중이었다.
“제이드.”
푹, 머리 위로 턱이 닿아왔다.
“지금 뭐 해?”
나지막한 중저음. 올려다본 얼굴은 무표정했고 적안은 위험하게 반짝였다.
“어…… 혹시 모를 모함에 대비한 위험 요소 인멸?”
그러나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애초에 해리스도 다 보고 있었거든? 바로 곁에 붙어 시야각이 뻔한데 뭘 감추겠는가.
“인멸?”
“네, 이런 종이가 나중에 딴 데서 발견됐다가 누구 죽으면 제가 의심받게 될 거 아니에요.”
난 궁중 암투물도 많이 봤다, 우후훗. 이런 쪽지 하나 따위, 하고 가볍게 방심했다가 그대로 ☆되는 엑스트라 허접1이 아니란 말씀!
“특히 저 사람이 이전에 말한 그 용병왕이거든요. 제가 진정제 팔아 재낀. 아무래도 그걸 빌미로 살인 청부했다고 몰릴-”
“그럼 찢어.”
해리스는 곧장 말을 끊으며 싸늘히 답했다.
“굳이 보관하지 말고.”
“엥? 찢는 걸로 부족해요~ 누가 조각이라도 기워서 붙이면 곤란해질 테니, 완전히 태워서 흔적조차 안 남게 만들어야…….”
“됐으니까 내놔.”
쑥, 해리스의 긴 팔이 내 주머니에 들어와 쪽지를 가져갔다.
사아아- 해리스의 손에 닿은 구겨진 종이는 어느덧 새까만 입자로 변하더니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
이런 효율적인 방법이. 감탄의 눈빛을 쏘자 해리스가 붉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쪽지도 주고받고.”
“아니, 일방적으로 보낸 건데. 전 안 보냈습니다만?”
“친해 보이네?”
“정확히는 저쪽이 친한 척을 잘하는 성격이라…….”
“어떤 성격인지도 알고, 저 새끼랑 친한가 봐?”
“…….”
알루카스, 아직 해리스와 제대로 안면을 트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 새끼가 되었구나.
물론 그가 해리스한테 어떻게 불리건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친하지 않다고 몇 번의 돌림노래를 말했던 거 같은데.’
그런데도 추궁하듯 내려다보는 해리스를 보자 불쑥 마음속 질문이 튀어나왔다.
“혹시…… 질투하세요?”
“질투?”
해리스는 픽 웃었다.
“내가 질투를 왜 해. 넌 내 반려 가이드고, 저 새낀 그저 굴러다니는 용병 따위에 불과한데.”
무심코 물은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냉랭한 대답이었다.
“아, 뭐, 그렇죠……. 맞아요, 정확하십니다.”
알루카스가 겨우 굴러다니는 용병 따위로 불릴 급은 아니지만, 굳이 지적해서 이 주제를 더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마상…….’
저기요, 저 방금 연회에서 진짜 제 기준 피 터지게 싸웠거든요. 그렇게 매정하게 딱 잘라서 말씀하시면 상처…….
“그러니까 지금 당장 죽여서 이 세상에서 제거해버려도 상관없겠지.”
“……네?!”
상처받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건데?
“왜, 싫어?”
해리스의 입꼬리가 더욱 깊게 휘어졌다.
“안 친하다며. 그런데 왜 싫지?”
“…….”
친하지 않으면 죽어도 괜찮은 거야? 이세계 빙의 반년 차, 오늘도 내 당연한 상식과 가치관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고 말했다.
“시, 싫어요.”
“왜.”
말이 급격히 싸늘해진다.
나는 차가워진 눈빛을 마주하며 맞춤식 설득을 시도했다.
“제가 지금, 무지 피곤하니까요.”
“……?”
“해리스 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 후달리거든요? 진짜 힘들어요.”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해리스 님이 저놈이랑 싸우면 제가 곁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럼 사방팔방에 잔해가 터질 텐데, 볼 기력도 없어요…….”
“…….”
다행히 맞춤형 설득이 통했는지 해리스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럼, 너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싸우시겠다고요? 아니, 해리스 님의 반려 가이드인 제가 어떻게 해리스 님을 보내고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어요? 행여나 다치실까 걱정하고 노심초사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잘-”
“잘 자잖아.”
“…….”
“어디서 거짓말을.”
귀신같이 허점을 잡은 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쳇, 잘 나가다가 실수했네.
“……잘은 아니고, 악몽 꿀 거라고요!”
“퍽이나.”
“아니, 해리스 님. 그렇게 자꾸 제 가이드 의식 무시하시고 그러면 곤란해요. 자꾸 이렇게 안 믿고 그러시니까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흔들리고…… 헙!”
“헛소리 좀 그만해.”
해리스가 나를 안아 들었다.
그제야 난 내가 너무 지쳐서 약간 정줄 놓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피곤하다면서 잘만 쫑알쫑알.”
공주님 안기로 맞닿은 몸. 나를 내려다보는 해리스의 깊은 눈매.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모호한 붉은 입술.
“…….”
잘만 떠들던 혀가 멈칫했다. 갑자기 급격한 갈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
고드윈의 후계자에게만 허용되는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선 해리스는 어느덧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진 제이드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해리스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했으나, 실제로 그의 속은 몹시도 시끄러웠다.
왜 그랬던 걸까.
연회장에서의 싸움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위해 싸우던 제이드 때문이었다.
‘해리스 님이 죽이셨을 리가 없잖아요!’
놀랍게도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었다.
제이드가 하녀, 보나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였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간 해리스는 사실 기다리고 있었다.
왜 죽였냐고. 어쩌다 죽였냐고 물어볼 순간을.
그러나 제이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처음에 의아해하던 해리스는 이내 납득했다.
어차피 네가 한 짓인 거 알고 있고, 더 알고 싶지 않다는 거리감인 거겠지.
그런 줄 알았는데…….
‘해리스 님 입장에선, 보나가 살아 있는 게 죽은 것보다 더 유리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다니.’
단순히 같은 편이라서 덮어놓고 편든 게 아니라, 자신을 정확히 알고 믿었던 거라니.
충격의 파도가 그를 덮쳐왔다. 일시에 휩쓸린 그는 멍하니 제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며, 그의 앞에 서서 보호하려 더는 제이드를.
“……제이드.”
파도치는 감정을 눈 속에 가둔 해리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대체 왜, 무엇을 위해 그런 거야.
해리스는 테라스에 뻗어 있는 제이드를 보았다.
피로해 반쯤 감긴 눈과 달싹이는 입술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서.
그는 알아야 했다.
제이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길래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목마르다는 생각…….”
“……?”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지?
제이드는 침묵하는 해리스가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말했다.
“진심, 목말라 죽겠는데 여기 마실 거 없어요?”
“…….”
“그냥 물이라도?”
“…….”
“물도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제이드의 간절한 얼굴에 해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듯 어깨가 들썩이고 등 허리가 떨리는 듯도 했다.
‘……착각이겠지. 설마 내 갈증이 웃길 리가.’
제이드는 흐린 눈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