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이린.”
계속해서 입을 다물던 선대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라예르가 후작 부인으로서 방문한 것이냐, 고드윈의 공녀로서 귀환한 것이냐?”
“두 가지가 다른가요?”
그제야 아이린 공녀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선대 공작이 쓰게 웃었다.
“다르냐고? 맙소사, 아이린……. 넌 이제 라예르가 사람이 다 되었구나. 그런 말장난을 하다니.”
과연 선대 공작, 과거의 죄책감과 애정에 흐려져 있던 이성을 회복하자 다시 냉철한 군주의 얼굴이 돌아왔다.
“아이린, 네가 라예르가와의 연을 끊고 고드윈 공작 가문에 돌아온 것이라면 환영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씁쓸히 고개를 젓던 선대 고드윈 공작이 천천히 아이린 공녀와 반대파 모두를 응시했다.
“하지만 네가 라예르가 후작 부인으로 돌아와 고드윈 소공작의 자리를 운운한 거라면…… 라예르가에 책임을 묻고야 말 것이다.”
“……아버지!”
아이린 공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부름에 선대 공작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방금의 반응은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린 공녀는 이제 고드윈의 소공작이 아닌, 라예르가의 안주인이 되어버렸다.
“고, 공녀님.”
“정말입니까……?”
갈대같이 흔들리며 아이린 공녀 앞에 숙이던 반대파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나타났다.
대다수 반대파의 입장에선 해리스는 당연히 마땅찮은 후계자였다.
‘이유는 말하면 입 아프니 생략!’
하지만 그렇다고 해리스보다 더 혈통이 우수하고 능력도 뛰어난 후계자는 없으니, 덮어놓고 반대하진 못한 차 아이린 공녀가 등장하니 소공작 축하 연회고 나발이고 깽판 칠 정도로 와르르 넘어 가버린 거겠지.
하지만.
“……앞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능력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부족함 없는 이가 고드윈의 소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아이린 공녀의 뜻은 그들과 달랐다.
“그렇다면 저의 아이들에게도 부족함은 없겠지요.”
“……!”
“뭐, 뭐라고?”
술렁임 사이로 아이린 공녀는 두 명의 아이를 내보였다.
친모를 닮았는지 껑충 큰 키에 굳은 얼굴의 소녀와 자그마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 하나.
“제 딸, 레노르와 아들 디뮈아드입니다.”
“아이린.”
“제 아이들에게도 자격이 있습니다!”
아이린 공녀가 소리칠수록 동요는 더욱 커졌다.
당연하다. 구 고드윈 세력은 누구보다 노먼 고드윈을 증오하고, 선대 공작을 따르는 만큼 적법한 후계자였던 아이린 공녀를 선망했던 이들이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 합리화했던 거겠지.’
비록 라예르가에 시집갔더라도 여전히 뼛속 깊은 고드윈일 거라고.
지금 고드윈 가문에 돌아온 것도 라예르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오롯이 고드윈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당사자가 아니라 자식들을 고드윈에 밀어 넣고, 본인은 라예르가의 후작 부인으로 돌아온 거였다니.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아이린 공녀님!”
기대가 큰 만큼 충격도 컸다.
반대파들은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어떻게 이러냐고? 내가 이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린 공녀는 사납게 고함쳤다.
“그럼 노먼의 자식에겐 자격이 있고, 내 자식에겐 없단 말이냐!”
그러나 불호령에 주춤한 것은 그녀의 자식들뿐, 반대파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 이건 배신입니다, 공녀님.”
“지금껏 당신만을 기다려온 저희에게 어찌……!”
저 꼴을 보니 해리스에게 반발하며 막말을 지껄이던 것도 이젠 불쌍…… 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그러기에 누가 해리스 반대하래? 추억 보정 좀 꺼!
그리고 누구보다 추억 보정이 강할, 그러면서도 다른 늙은이들처럼 울진 못하는 선대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다, 아이린.”
“하문하십시오.”
“너는 지금껏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았지. 이번에야말로 답해 주길 바란다.”
“…….”
“네 두 명의 아이 중 누구를 고드윈의 후계로 내밀 생각이냐?”
“그건, 능력에 따라…….”
“결국 내 판단에 맡긴다는 거군. 이것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
“다시 물으마, 그럼 그렇게 골라진 아이는 영원히 라예르가와 절연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런! 천륜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이린 공녀의 격한 반응에 선대 공작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고요해진 연회장, 선대 공작의 비통한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아이린.”
“아버지조차 견디실 수 없을 일을, 어찌 제게……!”
“해리스는 했다.”
“네?”
“해리스, 너의 하나뿐인 조카는 천륜을 끊어냈단 말이다.”
“…….”
“그런데 너는 능력도 모자라고 혈통도 성 차지 않는 아이 둘을 데려와, 내 손주의 것을 빼앗아 달라고 떼를 쓰는구나.”
슬프게 웃던 공작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여느 때와 같은 싸늘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내 이 자리에서 선언하지. 고드윈의 소공작이 될 이는 해리스뿐이며, 그 어떤 이가 온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그것이 라예르가의 혈통이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어-!”
선대 공작은 더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내 대에서 고드윈을 라예르가의 종으로 만들 성싶으냐?!”
“아버지, 그런 게 아닙니다!”
“더 이상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라, 아이린! 넌 이제 라예르가의 후작 부인이 아니냐!”
아이린 공녀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자신이 한 말이 돌아온 셈이니 더욱 큰 타격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선대 공작은 더없이 사나운 얼굴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내가 내 후계자를 공표하는 데 개판 치는 모습, 잘 지켜보았다.”
“가, 각하!”
“저흰 그저……!”
“불순한 놈들 죄다 끌고 가! 전부 주리를 틀어버려라!”
“각하-!!”
발버둥 치며 끌려가는 사람들. 거들진 않았지만 침묵하며 암묵적으로 동조하던 이들. 해리스의 편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한 자들까지.
감미로운 악기 연주로 시작되었던 연회는 비명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제이드.”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뒤에서 안아오는 두툼한 품.
해리스의 손이 내 눈을 덮었다.
그제야 난 내가 피로해 죽을 지경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쉬어.”
나는 그대로 힘 빠진 몸을 해리스에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너무 긴 연회였다.
* * *
“이야, 막장이야, 막장.”
루켄은 오징어를 씹으며 박수를 쳤다.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이니, 어쩌니, 하던데, 그런 가문도 이렇게 개판이 되네요.”
진짜 흥미진진하다.
어느덧 옷의 답답함을 호소하긴커녕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잊고 상황에 몰두하던 루켄이었다.
“원래 작위 계승 관련해선 다 개판 되게 마련이야.”
막장 연극 보듯 몰입하던 루켄과 달리 적절하게 술과 안주를 곁들이며 감상하던 알루카스가 말했다.
“하긴, 우리도 그랬죠.”
루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퇴장하는 배우, 아니, 고드윈 일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나저나 선대 공작, 라예르가 후작 가문 겁나 싫어하네요. 뭐 있어요?”
“딸내미를 강제로 시집 보낸 가문인데 어떻게 안 싫어해?”
“그런 것치고는 너무 극렬하게 싫어하는 거 같아서…….”
“사위가 그 유명한 ‘나비 공자’잖아.”
“아…….”
그럼 못 참지. 싫어 죽겠지.
루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다시 갸웃거렸다.
“그래도 부부 사이 괜찮지 않아요? 왜, 그, 우리가 의뢰받아서 라예르가 갔을 때 말이에요.”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그러나 역병으로 소후작이었던 누이와 가족들을 잃고 갑작스레 가문을 잇게 된 라예르가 후작과 그의 안주인.
‘아무쪼록 잘 해결해주길 바라오. 요청한 것들은 준비해두었소.’
몹시도 위엄있던 안주인과 그런 안주인의 시선을 받고 싶어 나비처럼 주변을 맴돌던 후작.
나비 후작을 성가셔하면서도 그에게 곁을 내어주던 안주인.
‘제법 괜찮은 한 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부인이 라예르가는 내팽개치고 자식들만 챙겨 오다니.
“싸웠나? 하긴, 그만한 과거를 지낸 남편은 자다가도 기분 나빠 두들겨 팰 만하죠.”
“……너 그 이야기 왜 나 보면서 하냐.”
“아뇨, 그냥 어쩌다 보니 앞에 계셔서 본 건데 혹시 찔리십니…… 크악!”
매를 벌어요, 매를.
알루카스는 루켄의 입을 물리적으로 닥치게 하며 혀를 찼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뭔가 있단 말이지.’
라예르가의 안주인, 아이린 공녀는 어리석지 않다. 이렇게 허무하게 패퇴할 리가 없는 인물인데.
‘뭔가, 일이 예상보다도 빠르게 마무리되었단 말이지.’
알루카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능 탐지기를 언급하자 반응하던 아이린 공녀.
라예르가에서 엄격하던 얼굴.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곁에서 떼어놓지 않던…….
“……설마.”
알루카스는 아이린 공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포착된 사람은 제이드였다.
“흐응…….”
그는 처음부터 아이린 공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연회가 막장에 치닫게 될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재미있겠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딱히 제이드에게 언질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리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과연 제대로 해결할지도.
“생각보다 더 재미있단 말이지…….”
피식피식 웃던 알루카스는 종이에 무어라 써서 대충 접더니, 벽에 붙어 얼어 있던 하인 하나에게 건네 고개를 까딱였다.
“아,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하인은 쪽지를 펴볼 생각도 하지 않으며 다급히 제이드에게 다가갔다.
알루카스는 뚫어지게 제이드를 응시했다.
해리스 고드윈의 품에 안기다시피 기대어 있던 그녀가 쪽지를 받고, 펼쳐 보인다.
그리고 짧은 문장을 읽자마자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든다.
“나야, 나~”
알루카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실 그렇다 해도 찾아내리라곤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연회장이 너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간격도 멀었고.
분명 그런데…….
“……?”
제이드의 청안은 정확히 그를 찾아냈다.
꿰뚫리는 것만 같은 시선.
철렁, 알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쥐었다.
* * *
나는 하인이 건네준 쪽지를 펼쳤다.
[죽여 줄까?]
“…….”
뭐야, 이 미친놈은.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