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좌중이 고요해졌다.
해리스는 본능적으로 이 분위기가 저 낯선 인영의 말이 아닌, 그 말을 한 당사자 자체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일까, 그저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 수 있는 자라니.
본디 고드윈 령에서 저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것은 한 사람뿐이다.
선대 고드윈 공작.
샹들리에의 빛 아래 자줏빛 홍채가 선명히 보였다. 그것은 선대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기 때문이었다.
“너, 너는…….”
달싹이는 입술 끝,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선대 공작이 저렇게도 흔들리는 얼굴을 하다니.
해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얼굴과 달랐다.
그때는 경계와 경악, 두려움과 죄책감이 숨겨진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오랜만입니다, 각하.”
흰 손이 로브에서 나와 후드를 걷었다.
샹들리에 빛 아래 물결치는 은회색의 머리카락.
또렷한 자줏빛 눈동자와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
도도한 콧대와 강인하게 각진 턱까지.
“…….”
해리스는 시선이 저절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근엄한 인상의 미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저 수려한 용모가 그의 기억 속 누군가를 지나치게 빼닮아 있어서였다.
“아이린…….”
선대 공작은 떨리는 입술로 그 이름을 말했다.
“……아, 아이린 공녀?!”
“맙소사, 정말로?”
“아이린 공녀님이시라면, 진짜 소공작님이신 거잖아!”
연회장에 파문이 일었다. 일시에 공간을 장악하던 흐름이 그녀에게 기울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녀님, 이제 돌아오신 겁니까?”
본디 이 가문의 주인이 되기로 했던 사람은 아이린 공녀였다.
패륜아 노먼 고드윈이 멋대로 황실과 결탁해 빼앗아 갔을 뿐, 그리고…….
“라예르가 후작 가문은…….”
일방적으로 그들의 주인을 다른 곳의 안주인으로 보내버렸을 뿐.
선대 공작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감정으로 복잡해진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했다.
‘아이린 공녀가 현숙하고 지혜롭기로 널리 알려진바, 라예르가 후작 가문의 적차자와 맺어주고자 하니 이를 거절하지 말라.’
노먼에게 작위를 강탈당한 뒤, 갑자기 내려온 황제의 명.
거절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노먼 고드윈 따위를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반역죄를 의심 사던 상황.
‘안 된다, 아이린!’
‘……폐하의 명입니다, 아버지.’
‘너에게 이따위 혼담이라니, 격에 맞지도 않는다! 우리가 너를 지켜줄 수 있어!’
그렇지만 선대 공작은 끝까지 버텨내려고 했다.
라예르가 후작 가문은 고드윈 공작 가문과 마찬가지로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아이린은 고드윈의 주인이 되기로 예정된 자였다.
그런 아이린을 감히 적장자도 아닌, 차자를?
‘심지어 라예르가의 둘째는……!’
라예르가의 둘째, 오르시아 공자는 ‘나비 공자’로 불렸다.
나비처럼 산뜻하고, 여러 꽃을 탐하며,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귀공자.
한마디로 지조 없는 바람둥이였다.
라예르가의 둘째 공자가 수도에 올라올 때마다 수도에 치정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받아들일 수 없어! 결코! 내 그따위 놈에게 너를 시집보내려고 알리시아를 보내고……!’
‘아버지.’
‘설사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물러날 수 없다. 노먼 고드윈, 그 패륜아 새끼가-!’
‘각하.’
선대 공작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격노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뿐인 딸을 그런 놈팡이에게 보내어 일생을 허비하게 할 수 없었다.
없었지만…….
‘저는 고드윈에게 지켜지기 위해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린.’
‘부디 저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십시오, 각하. 당신은 아직 고드윈의 군주입니다.’
아이린 공녀는 그 말만 남기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떠났다. 황실이 축하로 보내온 혼수품을 달고서, 머나먼 라예르가로.
“라예르가는 괜찮소.”
그리고 세월을 넘어, 눈가의 미약한 주름이 아니면 그날과 똑같은 얼굴의 아이린이 도착했다.
“이는 이미 혼전에 그와 합의한 일이오.”
“아아……!”
아무 문제 없다, 이제 아이린 공녀가 돌아왔다.
그 사실에 구 고드윈 세력은 눈물을 훔쳤다. 본디 그들이 진정으로 모시고자 마음으로 따랐던 이는 아이린 공녀였으니.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라예르가에 역병이 돌았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어찌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당신도 참, 그게 언제적 일이오? 지금의 라예르가는 얼마나 번성한데.”
“이 모두 아이린 공녀가 안주인이 되신 덕분이지요. 라예르가에서도 탄성이 자자하다고…….”
연회장에 참석한 극성 아이린 공녀 파들은 안도 섞인 자신감으로 그녀 뒤에 섰다.
그것은 이전에 해리스에게 달려들던 반대파의 기세와는 확연히 달랐다.
“…….”
충성을 맹세한 파르나 경도, 선대 공작과 뜻을 함께한 레디안 백작 일가마저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대 공작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이린 공녀’라는 폭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겠지.’
해리스는 냉담히 수긍했다.
어차피 저들은 선대 고드윈 공작의 쇠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새로운 등불이 그의 유지를 이어가길 바라서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을 뿐.
본래도 그는 저들에게 큰 기대를 한 적은 없었다.
“……저자가 고드윈 소공작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아르투 백작이 나선 건 그때였다.
좌중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빌어먹을, 그 ‘때’라는 게 이거였어?’
해리스 고드윈의 계승권 회복을 막을 수 있는 기밀이라며 은밀히 받은 정보를 받은 것은 새벽에 가까운 아침 무렵이었다.
다만 그것을 언제 밝혀야 할지에 대한 타이밍은 ‘때가 되면 알 것’이라는 모호한 문장으로 끝났었다.
‘아이린 공녀라니……!’
과거 아르투 백작 또한 친 아이린 공녀파였다.
지금은 가문의 영광과 개인의 야망을 위해 이젠 노먼 고드윈과 손잡은 상태였지만, 어쨌거나 아이린 공녀라는 존재감과 위엄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자식이 아이린 공녀를 두고 고드윈 후계권을 다퉈?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아무리 야망이 넘치고 영광을 바란다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해리스 고드윈 같은 패륜아 노먼의 새끼면 몰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아르투 백작은 이를 악물고, 어느덧 자신 뒤에 서 있던 사람을 앞으로 밀었다.
“제 딸이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
“아르투 백작 딸이면, 퍼넬로피 양?”
“걔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분명-”
“네, 저는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퍼넬로피는 눈물이 그렁그렁 담긴 얼굴로 말했다.
“누명을 쓰고서!”
낡은 드레스와 바들바들 떨리는 몸, 그린 듯 ‘힘든 고초를 겪은 귀족 영애’ 같은 모습이었다.
“누명?!”
“네, 미허가 이능력자를 밀반입해 본성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하지만…….”
퍼넬로피는 또르륵, 눈물을 흘리며 가련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보나는 제 직속 하녀였어요.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이능력자 따윌 어떻게 곁에 둡니까? 가이드도 없이……!”
“듣고 보니 그렇군. 일리 있어.”
반대파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탐지기로 검사한 것도 아닌데, 난데없이 누명이 씌워졌죠. 거기에-”
“그렇지만 칼을 꺼내 해치려 한 건 사실이잖아요! 이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왜……!”
간신히 정신 차린 레디안 백작 측에서 반발이 들어왔지만.
“어허, 이것과 그것은 다른 일이지 않나!”
이미 흐름은 반대파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 그것이 누굴 해쳤단 말인가? 각하께서 붙이신 죄목이 심한 건 사실이네!”
“미르실 자작!”
“뭐! 나 불러서 뭐 어쩌자고! 내 말이 어디 틀렸나?!”
이미 연회장은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선대 공작은 아이린 공녀의 등장으로 얼어붙었고, 공작을 대신할 사람들조차 정신이 없었다.
서로 오가는 고성, 다툼, 벌게진 얼굴들…….
‘……그렇군.’
해리스는 이 모든 난장판에서 한 발자국 물러난 듯, 관조적으로 생각했다.
하녀, 보나 사건 자체를 흙탕물로 끌고 가버렸으니, 이젠 잘잘못을 따지기 어렵게 된다.
“……애초에, 이능력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잖아!”
바로 이렇게,
“그 반대의 증거도 없소!”
“정 이렇게 따지고 들 거면, 탐지기로…….”
“안 됩니다.”
아르투 백작이 딸의 어깨를 감싸며 비통히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사를 하려고 했지만, 감옥에 갔을 땐 이미…….”
“보나는 시체가 되어 있었어요!”
퍼넬로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가락질했다.
“바로 저, 흉악한 괴물 때문에-!!”
손가락 끝에 있는 사람, 해리스는 가만히 좌중을 응시했다.
고요해진 연회장 때문일까, 머릿속에 선대 공작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내일은 너를 위한 날이 될 것이다, 해리스.’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일이 말처럼 쉽게 풀릴 거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
‘네가 드디어 고드윈의 소공작이 되었음을 세간에 선포하는 연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개판이 될 줄이야.
“가, 감옥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던 꼴을…….”
“어머, 아르투 백작 영애. 가엾게도 그런 참혹한 꼴을 목도하셨다니.”
자신을 적대시하는 이를 다독이는 목소리. 이쪽을 향하는 적의와 혐오 섞인 공기.
과거, 고드윈 공작저에서의 과거가 오버랩된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손가락질하며, 경악하고, 괴물 보는 듯한 시선…….
‘괴물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공포와 원한, 증오가 섞인 이명.
문득 해리스는 자신이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별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해리스 님이.”
왜 이런 순간에는 항상 제이드, 너인 걸까.
자신을 응시하던 제이드가 어느덧 앞에 나선다.
‘내가 죽였어도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고드윈 소공작이라고 주장하려나?’
멍해진 뇌리로 해리스는 생각했다. 나를 대신해서 맞서 싸우려면, 역시 그 수밖에…….
“우리 해리스 님이 죽이셨을 리가 없어요!”
“……!”
해리스의 적안이 커다래지며, 붉은 입술마저 달싹였다.
왜,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냐고.
저 모든 사람이 나를 살인마라 손가락질하는데, 어떻게 너는…….
“하! 명색이 가이드라 나서나 본데, 그래봤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 해리스 님이 벌써 죽일 리가 없잖아요?!”
“……?”
벌써?
예상과 다른 주장에 반발하던 이들조차 주춤했다.
‘죽일 리가 없다’가 아니라, 벌써?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