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세 사람이 입장하는 순간, 그레이트 홀엔 음악마저 일시적으로 끊겨 정적이 찾아왔다.
“……맙소사.”
그리고 다시 물결치듯 이어지는 소음.
“각하께선 여전히 정정하신 모양이군요. 10년 전에 뵈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 똑같아요!”
“얼굴도 훤칠하군요. 자식놈들이 속 꽤나 썩였을 테니 주름이 자글자글할 법도 한데.”
“역시 왕년의 미중년은 늙어서도 미노년으로 숙성된다는 건가…….”
가장 먼저 사람들의 이목을 모은 것은 맨 앞에 선 선대 고드윈 공작이었다.
철강의 고드윈이라는 위명에 누구보다 적합하다는 계승 직후 평답게, 선대 공작은 여전히 강건했다.
그리고 다음은.
“그럼, 저자가 바로 그……?”
“해리스 고드윈-!”
놀람과 경탄의 한숨이 쏟아졌다.
그 패륜아 노먼 고드윈과 고귀한 엘레아스 황녀의 하나뿐인 자식.
그러나 고귀한 혈통에 걸맞지 않게 부족하고 모자라, 끝내 후계자의 자격을 잃고 유폐되었던 소년.
연회의 모든 방문자가 목 빼고 기다린 주인공이 드디어 등장했다.
그렇게 어둠의 그림자에서 성큼, 기다란 다리를 밟고 빛으로 걸어나 온 사내는.
“……황녀님을 쏙 빼닮으셨군요.”
누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림자를 켜켜이 쌓은 것처럼 어두운 머리카락, 석고로 깎은 듯 흰 피부 위로 수려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렬한 것은 새빨간 적안이었다.
갓 떨어진 핏방울처럼 붉은 홍채 아래 옅은 눈 밑 그늘과 기다란 속눈썹은 보는 사람 마음이 술렁일 만큼 지독한 퇴폐미를 풍겼다.
“정말로…….”
천하절색이던 엘레아스 황녀의 초상화는 널리 퍼져 있었고, 지방의 귀족들은 수도에 가게 되면 먼발치에서라도 그녀를 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자랑했다.
하늘 위의 달처럼 머나먼 사람이었다.
감히 닿을 생각도 못 하고, 그 어떤 뛰어난 화백도 고스란히 담을 수 없다며 호언장담하게 만들던 존귀한 황녀.
‘그런 존재가, 소공작이라 불리던 아이린 공녀도 아닌 노먼 고드윈 따위를 선택했다니!’
당시 누구도 노먼 고드윈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기에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소식을 처음 들었던 순간 느꼈던 놀라움과 열패감이 세월을 뛰어넘어 파도처럼 쓸려왔다.
게다가 그저 얼굴만 지독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덩치가 커다랗기로 유명한 선대 공작에게도 뒤지지 않는 키와 널찍한 어깨. 빈틈없이 근육으로 꽉 짜인 몸매와 두꺼운 흉곽은 범처럼 우아하게 움직인다.
그 곁의 자그마한 소녀를 에스코트하며…….
“……!”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해리스 고드윈 곁에 있는 옅은 분홍빛 실루엣이 바로 그 가이드인 것이다!
‘세 치 혀로 아르투 백작 영애의 발을 묶고, 레토스 자작을 벽에다 날려 버릴 정도로 폭행했다는 그……!’
전자야 흔한 일이라 치부하던 귀족들도 후자의 소식에 차를 뱉었다.
‘아니, 얼마나 흉악하면 그런 짓을 해!’
‘그보다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 거야? 맨주먹으로 사내를 벽에다 날려 버리다니!’
‘사실 그쪽이 이능력자인 거 아냐? 가이드가 그런 짓을 해낼 리가 없잖아.’
‘일리 있어. 해리스 고드윈이 특별 고용한 호위인 게지! 각종 더러운 일을 대신할……!’
해리스 고드윈을 적대시하고, 그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찾아온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남은 황녀의 아우라에 위축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선대 공작을 공격할 순 없는 노릇이니, 그들의 타겟은 자연히 가장 신분이 미천한, 그리고 ‘가이드’라는 제대로 된 직업도 아닌 제이드에게 쏠리게 되었다.
‘아냐, 난 미색으로 주인을 꾀어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해리스 고드윈이 이능력자라는 것도 거짓말일지도 몰라.’
‘그래, 아끼는 침실 시중 하녀에게 그럴싸한 직위를 주려고 가이드라 칭한 걸지도…….’
악의 어린 관심이 한 곳, 선대 공작의 그림자 뒤편에 가려진 인영에 쏠렸다.
그리고 그렇게 선대 공작의 그림자 밖으로 해리스 고드윈의 가이드가 나타나자…….
“…….”
“…….”
“…….”
연회는 다른 의미로 침묵이 돌았다. 그리고 뒤이어 충격 어린 술렁임이 퍼져갔다.
“저 얼굴은……?!”
* * *
‘아, 소문이 벌써 퍼졌구나.’
나는 연회장의 공기를 모른 척하며 해리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것들 눈깔 왜 저래.”
살벌해질 것 같은 목소리에 나는 얼른 속삭였다.
“아마 저의 너무나 뛰어난 외모와 치명적인 매력에 눈이 먼 게 아닐까요?”
“말 돌리네?”
우리가 투덕거리는 사이, 선대 공작이 단 위로 올라섰다.
“오랜만에 연 늙은이의 연회인데, 참석자가 많군.”
샹들리에의 빛이 그를 비추며 연설대와 같이 집중의 효과를 낳았다.
“이 자리를 빛내주어 감사하오. 모두 알겠지만, 내가 오랜 칩거를 깨고 나온 이유는…….”
아무래도 인사말 대충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실 모양이다.
나는 해리스와 함께 그 아랫단에 멈춰서 선대 공작의 말에 집중하는 척 진중한 얼굴을 덧그리면서 속삭였다.
“아니, 해리스 님. 그렇게 제 매력을 과소평가하시면 곤란해요. 아무리 해리스 님 본판이 우주 최강이라지만-”
“혓바닥이 길어? 너 지금 숨기는 거 있지?”
“……로서, 이 자리에서 새로운 고드윈의 소공작을 소개하고자 하오!”
스포트라이트가 곧장 해리스에게 이어졌다.
사방의 시선이 쏠렸으나 해리스는 그런 것 따위에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에도 씹었다.
“뭘 숨기고 있지?”
“됐으니까 얼른 나가서 박수갈채나 받아요!”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럼 중요하지, 안 중요해요? 나가요, 얼릉!”
“너 진짜.”
“해리스, 빨리 안 오냐?”
선대 공작은 웃는 낯 그대로 이를 악물며 내게서 해리스를 끌고 갔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해리스는 선대 공작의 손길마저 씹진 않고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두고 봐, 제이드.’
‘별거 아니거든요? 받고 나오시면 바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미 늦었어.’
‘아니, 진짜 별거 아니라고!’
눈빛, 손짓, 얼굴 근육으로 의사소통을 주고받던 것도 잠시, 해리스는 선대 공작의 손에 돌려세워졌다.
“바로 내 친손자, 해리스 고드윈이오!”
짝짝짝- 선대 공작의 사람들은 반대파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우렁차게 손뼉을 쳤다.
“저리도 훤칠한 청년이라니,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역시 선대 고드윈 공작 각하!”
“철강의 고드윈을 이끄신 시대의 주역! 그분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죠!”
나도 손 아프게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디 한 번 우리 선대 공작님의 판단 틀렸다고 해봐라, 탈룰라 따윈 받아주지 않는다.
‘어라, 저기 알루카스가 있네.’
평민이긴 해도 용병왕쯤 되니까 초대도 받나 보다.
하지만 알루카스는 박수 치지 않고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가 더 짙어지는 게, 마치 일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 경고하는 것 같았다.
‘……박수도 안 치네, 저 자식들이.’
경고처럼 해리스 반대파로 추정되는 귀족들은 끝까지 박수 치지 않았다.
물론 저들이라 해서 선대 공작님의 결정을 호떡처럼 마구 뒤집을 수 없으니, 설마 지금 당장 얼굴 앞에서 부정하진 않…….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긍정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패륜아 노먼 고드윈의 자식이 아닙니까! 각하, 벌써 과거의 원한을 잊어두신 겁니까!”
다행히 나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가라, 야니스!’
내 눈빛을 받은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가 먼저 나섰다.
“뮐벤 남작, 각하께서 어찌 잊으시겠는가?”
“레디안 소백작.”
“도리어 각하께선 그 이유로 해리스를 눈여겨보셨다네. 각하께서 제 아비마저 배신한 노먼이 친손주의 권리마저 빼앗게 둘 성싶겠는가?”
“으윽…….”
뮐벤 남작은 ‘이게 더 노먼 고드윈이 빡칠 일이야’라는 야니스의 공격에 KO 됐다.
“잘 말씀하셨습니다, 레디안 소백작!”
그러나 다음 타자도 대기 중이었다.
“그 패륜아 노먼 고드윈조차 일찌감치 포기한 자를 어찌……!”
“닥치지 못하겠소!”
우리 측 두 번째로 주자는 기사단장 파르나 경이었다.
“미르실 자작, 자넨 그럼 노먼 고드윈의 판단은 옳고 각하의 판단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 파르나 경이 무엇을 아시오? 정녕 이 결정이 고드윈 공작령에 어떤 해악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게요?!”
“해악?”
파르나 경은 차게 웃었다.
“해악이란 말은 자신의 영토에 언노운 던전이 나타나 수십, 수백 만의 영지민들이 사라졌음에도, 수도에 처박혀 영지를 돌아보지 않는 자네 같은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네.”
“파르나 경, 말조심하시오! 우린 그저……!”
“그저, 뭐? 각하께서 우리 고드윈 기사단을 보내 대신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겠지!”
“……용병을 고용 중이었소! 다, 다만-”
“우리 고드윈 기사단마저 소식이 끊겼으니, 소용없다 싶어 영토를 각하께 반환했나?”
“난 우리 가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한 것이오, 파르나 경! 그리고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 소공작께서 친히 던전에 들어와 괴수를 토벌하시고 우리 모두를 구해 내셨다.”
“……!”
사방이 술렁였다.
해리스가 정말로 이능력자가 맞는지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충격받아서, 그리고 그가 이능력자임을 알았던 사람들도 그 언노운 던전을 해리스가 해결했다는 소식에 놀라서.
“그러니 이 파르나, 그리고 고드윈 기사단은 소공작께 충성을 맹세하고자 합니다.”
쿵, 파르나는 해리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파르나 경 뒤로 참석한 기사단원들이 모두 해리스 앞에 부복했다.
‘좋았어.’
나는 속으로 엄지를 척, 하니 들어 올렸다.
사실 파르나 경은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해리스에게 충성 맹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서 미뤘지.’
좋은 미룸이었다.
덕분에 반대파들이 기세가 확연히 꺾였다.
선대 공작의 인정을 받고, 구 고드윈 세력의 이인자인 레디안 백작 가문을 포섭했으며, 실질적인 무력 집단인 기사단을 확보했다.
“…….”
아무리 해리스 반대파들이라 해도 더는 반발하기 어려워진 상황, 사방이 고요해졌다.
“혈통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해리스보다 고드윈 소공작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
싸움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양 가만히 있던 선대 공작은 그제야 사태를 마무리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렇다면.”
불쑥, 반대파들 사이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걸어 나왔다.
“혈통적인 면에서나 능력적인 면에서 고드윈 소공작이 되기에 더 적합한 자가 나타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