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마, 말씀이라도 하시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심 쪽팔린다.
이렇게 예쁜 나, 해리스가 봐도 우와- 하고 감탄하고 바라보지 않을까? 같은 망상을 했어서 더!
‘이건 수치플이야…….’
눈물을 삼키는 내게 해리스가 픽 웃었다.
“새삼 나한테 보여준 꼴이 한두 가지도 아닌데, 뭘 이런 걸로.”
……새삼 얼굴 철판 얇은 척하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허허.
뭐, 그 말대로 해리스한테 볼꼴 못 볼 꼴 가리지 않고 참 많이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민망해질 걸 알면서 왜 굳이 끝까지 구경하고 있던 거냐고!’
미리 도착했으면 말해줄 수 있잖아! 해리스 이 나쁜 놈, 난 너 기다리다 심심해서 염병 떤 거라고.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즐기던 것 같던데?”
“…….”
부정은 못 하겠다. 솔직히 나도 즐기긴 했거든.
거울만 봐도 재미있는 얼굴이라니, 정말이지 짜릿해. 최고야. 너무 좋아~!
‘그보다 이 자식, 어떻게 내 생각까지 다 읽고 있는 거야?’
설마 지금 생각까지 읽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 표정은 뻔해서 다 읽혀.”
“……그만 읽어요!”
“싫어.”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 허리를 감싸며 귓가에 울려왔다.
“네가 안 읽히게 노력해 봐, 제이드.”
“…….”
아, 젠장. 이젠 다른 의미로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려 하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심호흡하며 해리스를 곁눈질했다.
정말이지 오늘의 해리스는 평소보다도 눈부셨다.
기본적으로 키가 크고 훤칠한 미남자란 사람의 입매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주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렇게 각 잡고 갖춰 입으니 그야말로 눈부셨다.
넓은 어깨와 두꺼운 흉통, 상대적으로 늘씬한 허리와 좁은 골반에서 이어진 긴 다리.
힙라인까지 은근히 잘 살린 정장 핏은 정말 국보가 따로 없었다.
거기에 밤처럼 어두운 머리카락, 신이 제일 기분 좋은 날 깎은 게 분명한 아름다운 얼굴. 특유의 퇴폐미 넘치는 눈빛까지.
‘하…… 안구 복지 하나는 진짜 잘해.’
이 맛에 탈덕 못하지.
평소에도 정말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용모인데, 이렇게 각 잡고 꾸미니 눈이 멀 것 같…… 진 않았고, 눈알이 건조해질 것 같았다.
어떻게 이 모습을 앞에 두고 눈이 멀 수 있어?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깜빡일 타이밍 놓칠 수는 있겠다만.
“침 흐른다.”
“허업.”
나는 황급히 입술을 훔쳤다. 안 돼, 입술 화장도 얼마나 신경 써서 한 건데!
그러다 시선이 마주쳐 변명했다.
“배, 배고파서 그래요, 배고파서.”
“퍽이나.”
나를 선대 공작의 집무실로 에스코트하던 해리스는 코웃음 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핥듯이 봐놓고선.”
“…….”
나는 차마 부인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해리스는 크게 기분 나빠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내게 익숙해진 거라 그런가.’
아니면, 카트 사고 이후 나와의 심리적 거리가 조금 줄어들어서 그런가.
확실히 그날 이후 해리스는 내게 조금 더 관대해졌다.
‘내가 소공작이 되기엔, 선대 공작의 인정만으론 부족할 거야.’
이런 이야기까지 공유해 줄 정도로.
‘노먼 고드윈은 선대 공작과 가신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않고서도 강제로 작위를 계승해내는 데 성공했어.’
그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람서스 제국 제일의 무기상이다.
본래도 고드윈 공작 가문은 무기로 유명했다. 다만 그것은 장인들의 손길을 거친, 특별한 수제품들을 칭하는 거였다.
‘그리고 마탑과 주로 콜라보했지.’
하지만 노먼 고드윈은 매지컬 판타지 세계관에서 그리 각광받고 있지 않던 총기류를 획기적으로 개량하여, 공장을 통한 대규모 생산에 성공한다.
‘그걸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고.’
물론 이 시대는 여전히 마법과 마력, 마나와 같은 신비 에너지가 존재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런 힘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힘일 뿐.
노먼 고드윈이 대량 생산한 총기류는 절대다수의 무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려 집단 전투에 써먹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노먼 고드윈은 그 무기를 황제에게 바쳤다. 이것이 바로 그가 공작 위를 받게 된 두 번째 이유였다.
‘황녀의 남편이 되는 데 성공한 것도 이 덕분이지.’
람서스 제국에서 유일한 적통 황녀, 그것도 선대 황제 귀애한 황녀를 고작 소공작의 남동생 따위에게 결혼을 허락해 줄 리 없으니.
‘결과적으로, 노먼 고드윈의 권력은 황실과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거야.’
하지만 선대 공작님은 정반대다. 그의 권력 기반은 기존 고드윈 세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대대로 내려온 자산과 영지, 방계를 포함한 가신과 원로회. 전통과 명예 같은 것들…….
그게 문제였다. 기반 세력의 베이스가 분산되어 있다는 것.
‘아니, 사실 이게 보통이긴 한데.’
대체로 로판 남주들이 아니면 아무리 지배 가문의 가주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순 없다.
노먼 고드윈이 특이한 케이스다.
그는 분명 가족을 배신한 패륜아이며 인성 쓰레기지만, 결과만 따지자면 그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공작이 되는 데 성공한 용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노먼 고드윈의 고집만으로 해리스에게서 후계권을 빼앗고 유폐시키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황실이 개입했더라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해리스의 친모는 선대 황제의 적통 황녀이며, 배다른 남매인 현 황제와의 사이도 아주 좋았다.
‘그런데 정작 해리스가 후계권을 잃고 유폐되는 데에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지.’
여러모로 수상쩍은 일이었다. 현 황제의 등극에 적통 황녀의 지지도 한몫했다는 걸 알면 더더욱.
<시천귀>에는 람서스 제국의 황실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된다.
선대 황제의 첫 아내였던 웬즈디 황후와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결국 서자 중 하나를 웬즈디 황후의 자식으로 입적해 황태자로 등극시켰다.
하지만 웬즈디 황후가 병사하며, 후처로 들어온 아름답고 젊은 황후 플로엘라는 금방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엘레아스 황녀를 출산한다.
황태자보다도 정통성이 강한 황녀인 것만으로도 경계할 여지가 충분한데, 플로엘라 황후의 친정이 제국의 3대 가문 중 하나인 라예르가였다.
거기에 황제가 하나뿐인 적녀, 엘레아스를 몹시도 총애하기까지 했으니 황태자 세력이 위기를 맞이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록 플로엘라 황후는 제위에 조금도 욕심을 내지 않았고, 그녀의 친정인 라예르가 또한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라버니는 황제가 되실 거예요.”」
황녀가 조그마한 입을 연 것은, 그렇게 한창 갈등이 깊어져 가던 와중이었다.
「“네 오라비가 말이냐?”」
그 상황의 실질적인 주범인 선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아기 따님에게 물었다.
「“네, 오라버니가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대한 람서스의 군주가 되실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느냐?”」
팽팽한 긴장의 공기 속, 아기 황녀는 신비로운 주홍빛 눈동자를 휘며 웃었다.
「“저는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요.”」
「“하하하! 우리 아기 황녀가 예언자이기까지 했다니.”」
황제의 웃음을 때문인지, 아니면 아기 황녀의 ‘예언’ 덕분인지, 플로엘라 황후와 황태자 세력의 갈등은 서서히 완화되었다.
‘엘레아스 황녀가 예언자라 불리게 된 것도 그 무렵이라 했지.’
아기 황녀는 죽순처럼 쑥쑥 자라나면서도 오라버니에 대한 예언을 철회하지 않았고, 나이를 먹으며 세력을 다진 황태자도 고귀한 여동생을 귀여워했다.
‘그런데 정작 그 여동생이 목숨 바쳐 낳은 자식을 외면하다니.’
사실은 가식적인 관계였다 해도, 대외적인 시선을 생각하면 해리스를 챙기는 게 당연할 텐데.
굳이 남매의 정까지 안 가더라도 고드윈 공작 가문을 손에 넣는 것을 고려하면 해리스를 그렇게 버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근데 또 그게 되네……?’
뭔 수를 쓴 건지 노먼 고드윈은 해냈다. 정말이지 내일 없이 막사는 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선대 공작님은 그렇게 막살 수 없어.’
미친놈에겐 미친놈만의 자유가 존재하듯이 정상인은 정상인만의 책임이 있었다.
선대 공작은 다른 귀족 가문들이 그러하듯 가신과 원로회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고, 전통과 명예와 같은 세간의 인정도 필요했다.
‘즉, 가신과 원로회가 때로 일어나 해리스를 반대하면 일이 어려워진단 말이지.’
뭐 그렇다 해도 최종 결정권자가 선대 공작님인 건 변하지 않으니, 설마 일이 그렇게까지 나빠지겠나 싶지만…….
“……가자꾸나.”
우리를 기다리게 한 뒤에야 집무실에서 나오신 선대 공작님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각하, 괜찮으세요?”
“표정이 썩으셨습니다. 뭐 잘못 처드셨는지?”
나와 해리스의 염려에 선대 공작은 금방 기운을 차리셨다.
“이 망할 놈, 누가 내 친손준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연회장이 다가올수록 얼굴이 어두워지셨다.
‘아~ 이거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겠는데?’
만에 하나를 대비해두긴 했지만, 잘 풀릴지 모르겠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나는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어느덧 해리스는 내 귀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도록 두지 않을 테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
해리스의 붉은 입술에서 나온 숨결이 귀에 간질간질 닿았다.
귓바퀴에 작은 입맞춤이 뿌려지는 것만 같은 감각에 정신이 혼몽해지는 순간…….
“여차하면 내가 나설 테니까.”
곧바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바로 제일 걱정되는 문제거든?
“또 웃긴 얼굴.”
해리스는 눈가를 휘었다.
그 얼굴은 연회장의 입구에서 쏟아지는 빛보다도 눈부셔, 나는 긴장도 잊고 홀로 들어섰다.
“선대 고드윈 공작 각하와 해리스 고드윈 소공작, 그리고 소공작님의 가이드께서 입장하십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