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장인은 사위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고, 친아버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날 아버지로 모셔야지.’
아무리 배운 것 없이 자라도 그 정도는 알겠지?
해리스 고드윈이 그의 사위가 되는 것은 아르투 백작의 머릿속에선 이미 기정사실로 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나름의 근거도 있었다.
‘제가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한들 친아비에게마저 버려진 불량품에 불과해.’
그런 놈이 아내의 친정 가문 도움 없이 어떻게 가문을 장악하고 제대로 된 공작이 되겠는가? 배운 것도 없을 텐데.
‘그리고 그것에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이 아르투 백작 가문뿐이야.’
선대 공작을 모시는 충성적인 다른 가문 후보들은 무시했다.
왜냐면 아르투 백작 가문은 현 공작, 패륜아 노먼 고드윈과도 연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갈라진 고드윈 공작 가문의 세력을 이대로 고착화할 일 있는가? 당연히 합쳐야지!
‘두 부자간의 화해도 주선해봐야겠어.’
물론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처럼 대하라는 것은 아니나, 이 갈등 상황이 계속돼서 좋을 건 없었다.
‘내 딸을 며느릿감으로 고른 걸 보면, 노먼 고드윈도 자기 아들과 화해할 마음이 아주 없진 않은 게지…….’
장인 된 도리로 잘 달래서 소공작이 먼저 고개 숙이게 만들어야겠다.
어쩌면 해리스 고드윈 측에서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없었다.
당연했다.
‘부모가 아무리 서운하게 굴어도 자식들은 받아들여야지. 저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게 누군데!’
제가 잘났다고 고드윈의 혈족으로 태어난 줄 아는가? 모두 부모의 덕인 거지.
비록 설움 받고 컸다 해도 이제 머리가 굵어졌으니 부모의 고마움을 알 때도 되었다. 모른다면 금수나 다름없는 꼴 아닌가.
“쯧…… 어쩌면 정말 금수처럼 자랐을지도.”
“그 패륜아의 자식 말입니까?”
“그래, 그렇지 않다면 고작 평민 가이드 계집에게 넘어가 퍼넬로피를 박대할 리가 있겠느냐?”
아르투 소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 나는 여동생이지만 최소한 그깟 가이드에 비할 수도 없이 귀했다.
퍼넬로피가 선대 공작의 암살 미수 시도로 감금되었다는 사실 또한, 아르투 백작 가문 내에선 ‘고드윈의 안주인 자리를 둘러싼 암투’ 정도로 해석된 지 오래였다.
“퍼넬로피에게 위기감을 느낀 가이드 계집이 수작을 부린 게지!”
“그러니까요.”
“그러니 네가 잘해야 한다.”
“네?”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아르투 소백작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소백작인 제가 어찌 그런 천한 계집과…….”
“그 주제에 신분 높은 사내들에게만 꼬리치니까 그렇지! 해리스 고드윈을 꾀어낸 것 보낸 모르느냐?”
“…….”
“나라고 네게 이런 일을 시켜 마음이 좋지 않다만, 그래도 미색이 제법 곱다 하니 잠시 침실을 데우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을 게다.”
“남의 손을 탄 계집은 불결한데……. 쳇, 알겠습니다.”
소백작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반응에 아르투 백작은 안심했다.
만에 하나 ‘그 일’이 틀어지더라도, 그 계집 하나만큼은 제거해야 했다.
물론 노먼 고드윈 측에서 보내온 소식은 현재의 판을 뒤엎기 충분했다.
‘분명, 선대 공작마저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패가 도착할 거라고 했지…….’
무대는 이제 시작이다. 아르투 백작은 웃음을 감추며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 * *
그레이트 홀.
노먼 고드윈의 패륜과 아이린 공녀의 결혼 이후 계속 닫혀 있던 고드윈 본성의 연회장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미르실 자작님이십니다!”
“야니센 백작 부부 입장하십니다!”
“뮐벤 남작……!”
문 앞에서 귀한 초대객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불려 나오며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몇 년 만이죠?”
“글쎄요, 최소 십여 년 정도…….”
선대 공작은 반 칩거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고드윈 공작 성의 위용은 젊은이들에게 잊힌 지 오래였다.
이제 귀족들의 데뷔당트가 수도 황실에서 주로 이뤄진다 해도, 본성에서의 연회가 막힌 것은 가신과 방계들에게 몹시도 아쉬운 일이었다.
늙은 귀족들은 선대 공작의 마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해하여 조용히 아쉬워했지만, 젊은 귀족들은 종주 가문의 횡포라 생각해 불만스러워했었다.
‘그놈의 본성 연회,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그렇게 까탈스러운 손님들은 고드윈의 연회장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앗, 이 벽을 가득 채운 작품은 마티나 화백의 것 아닙니까?”
“맙소사. 더는 이제 작품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유밀로스의 석상입니다!”
“어머, 이건 동방의 향이에요! 한 대가 고작 30분도 못 가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싼 최상급 향이 이렇게 사방에 진동하다니~!”
이것이 고드윈이다.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의 위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레이트 홀에는 그야말로 부가 공기 중에 뿌려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아들에게 작위를 빼앗겼다 해도, 본성과 영토를 지배하는 것은 선대 공작이다.
그를 보여주듯 연회장에는 각종 고드윈의 가신과 방계, 그리고 현 사태에 흥미가 있는 초대객들이 계속해서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가득 채워지는 초대객들의 분위기는 화려한 연회장만큼 밝지 않았다.
‘정말로 그 패륜아 노먼의 친자를 후계자로 내세울 셈인가?’
이번 연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문제가 있다고 그 노먼 고드윈마저도 버린 자식을?’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서로의 눈치를 보았고, 기분을 돋우는 곡이 연주되고 있음에도 공간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아이린 공녀마저 시집갔으니, 직계 혈족이 부재한 지금이야말로 기회야!’
-라는 마음으로 선대 공작의 발 닦개마저 자처하던 몇몇 방계 가문은 기분이 매우 좋지 못했다.
“기가 막히는군요.”
“아무리 혈연이 그립다 해도, 제대로 된 후보도 없이-”
“흠, 그 고드윈 공작이 후보로 보낸 것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더라? 각하에 대한 암살 미수…….”
그렇게 불만이 연회장의 샹들리에마저 닿을 무렵이었다.
“요, 용병왕, 알루카스 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알루카스가 등장한 것은.
“……뭐? 용병왕?”
“아르카이 용병단의 주인이 이 자리에?”
좌중이 놀라 웅성거렸다.
용병왕 알루카스. 이 오만한 S급 이능력자는 수도의 황실 연회가 아니면 거의 참석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여기에?
‘아무리 제국의 3대 가문인 고드윈 본성에서의 연회라지만……!’
설마, 이자 또한 해리스 고드윈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것인가?
‘왜? 같은 이능력자라서?’
‘그렇게 대단한 이능을 가졌나……?’
해리스의 과거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으나, 현재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반대파들의 얼굴이 불안해졌다.
의문 가득한 시선이 집중 포화되는 와중에도 알루카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연회도 참 오랜만이군.”
섹시한 저음의 목소리와 190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 그는 연회의 드레스 코드에 맞춰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늘 드러내 놓고 있는 몸매가 가려지자 준수한 얼굴에 더욱 시선이 몰려들었다.
길게 늘어뜨린 구불거리는 적발과 윤기가 흐르는 어두운 피부.
귓바퀴에 빼곡한 귀걸이 중 길게 늘어뜨린 이어드롭이 짜랑 정장 위에서 흔들렸다.
사막의 이민족다운 독특하고 야성적인 매력에 귀부인들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 등급이 용모에도 영향을 끼치나요?”
“신체 능력을 올려준다고는 들었어요. 하지만 저 색기는…….”
“확실히, 외모 하나는 대단하군요.”
“하긴, 저 잘 빠진 얼굴로 수도의 귀부인들을 숱하게 함락시켰다고 하던가~?”
끈적이는 시선이 알루카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불쾌할 법도 한데 도리어 알루카스는 특유의 소년미 넘치는 미소와 함께 윙크를 날렸다.
“……!!”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던 귀부인 하나가 파르르 떨었다.
“수치도 모르는!”
발끈한 귀부인은 부채를 촤륵 편 채 고개를 돌렸다.
뭣 모르는 귀부인들은 천한 이민족 출신 용병이 뭘 알겠냐며 위로했지만, 알루카스는 부채 아래 가려진 뺨과 목덜미 붉어져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걸 보면 내 매력이 죽진 않았는데…….’
힐끗, 알루카스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를 향했다.
제이드, 그 소녀는 이번엔 어떻게 반응하려나.
“진짜 불편해 죽겠습니다.”
그러나 신경을 분산하듯 곁의 보좌, 루켄이 투덜거렸다. 제국 귀족들의 연회복이 불편해 죽겠다는 기색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우리 방금 들어왔다.”
“빨리 벗고 싶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 좀 그만 지껄여.”
“테라스 밖에 벗은 인간들 많다던데, 지금 가서 벗으면 안 됩니까?”
“넌 그냥 지금부터 입을 열지 마라.”
“네? 왜 안 되는 겁니까? 다들 벗고 XX하던데- 읍!”
알루카스는 손수 루켄의 아가리를 닫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
순간, 알루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구석에 처박힌 인영들 사이로 얼핏 지나가는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 * *
“공녀님이 된 것 같아.”
나는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귀족도 뭣도 아니지만 해리스의 가이드 자격으로 참석하게 될 나를 위해, 하녀 언니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 나를 꾸며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정말이지…….
“굉장하다.”
몸에 달라붙지 않아 편안한, 그러면서도 청초한 느낌의 드레스. 꽃과 리본으로 장식한 머리. 기다란 비단 장갑까지.
‘완벽한 코디다.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점에서 가산점까지 붙어!’
거기에 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엄청난 공이 들어간,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화장까지!
‘후…… 안 그래도 초절정 미소년데 이렇게 예뻐지면 어쩌자는 거야.’
혼자 남은 난 전신 거울에 벽치기를 하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겠군. 오늘의 연회는 이 제이드 님께서 접수하는 수밖에!”
나는 거울을 보며 손가락질했다.
그만, 그만둬. 대체 어디까지 예뻐질 생각이지? 하, 미치겠군. 자꾸 이렇게 예뻤다간…….
“예뻤다간, 뭐?”
“위험해지는 수가 있- 크악!”
나는 황급히 자아도취를 멈추고 돌아섰다. 문가에 비스듬히 기댄 해리스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아하하, 언제부터 보셨…….”
“연회 접수.”
“…….”
젠장,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구나.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