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에이드리안은 감옥의 쇠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에이드리안의 손끝에서 무형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보나.”
냉정한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했다.
“……!”
반쯤 돌아가 있던 보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물밀듯 들어오는 파장에 정신 나갈 정도의 행복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허, 억-!”
오랜 갈증과 굶주림이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가득 채워진다.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의 저릿저릿함에 보나의 무릎이 꺾여지고 몸이 주저앉았다.
어느덧 그녀는 자신을 속박하던 힘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보나는 질질 흘리던 침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속설에 의하면, 세상에는 그 어떠한 이능력자들도 치유하고 정화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가이드가 있다고 했다.
‘전설의 가이드.’
그자는 이능력자들에겐 신 같은 존재였다.
그 가이드의 파장을 느끼고,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천지가 개벽하듯 세상이 뒤바뀔 거라고…….
‘그딴 건, 우리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특히 자신처럼 높은 급의 이능력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소용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한 순간, 그녀는 그들만의 신을 받아들였다.
“신이시여…….”
감격한 목소리가 젖어 마구 떨려왔다. 처음 보는 낯선 자에게 보나는 경배하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나는 자신의 위대한 신께서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아는 것 모두 불었다. 이제 와 자신에게 남은 가치란 이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것을 다 듣고 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그 짧은 목소리만으로도 감읍한 보나의 눈이 새빨개졌다.
“잘했다.”
“아아-!”
간단한 칭찬에 극도의 환희를 느낀 보나는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제…….”
그녀의 신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다정한 목소리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
“자살해.”
잔혹한 명령에도 보나는 황홀경에 찬 얼굴로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털썩- 인영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안은 굳이 확인하지 않고 돌아섰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예상보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 자신의 힘도…….
본체를 더는 유지하지 못하며 반쯤 투명해져 가는 손을 보던 에이드리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위로, 위로…… 그리고 마침내 그녀 곁으로.
“……제이.”
보라색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렸다. 거의 형태가 남지 않은 손가락이 새근새근 잠든 제이드의 이목구비를 스쳤다.
“해주석을 구해야 해. 나를…….”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속삭임.
입이라도 맞출 것 같던 그림자가 이마에 가까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 * *
그리고 아침, 뾰로롱- 짹! 새의 지저귐이 햇살과 함께 들어왔다.
“……응?”
잠에서 깨어났어도 일어나지 않고 늘어져 있던 제이드는 흠칫했다. 항상 걸고 다니던 목걸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엑, 에이드리안!”
안 돼, 이렇게 허접하게 잃어버릴 순 없어!
기겁해서 파드득 일어난 제이드는 머리맡에 떨어진 예쁜 진분홍빛 돌멩이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휴, 백 년 감수했네.”
두 손으로 에이드리안(돌멩이)을 움켜쥔 제이드는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끙~”
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마나 회로. 그를 물처럼 시원하게 순환하는 마력은 손쉽게 에이드리안(돌멩이)으로 전해졌다.
“이상하네.”
매일 같이 먹여뒀는데, 이렇게 텅 비어 있다니. 제이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뭐, 일단 되는 대로 먹여두자.’
나도 해리스에게서 많이 먹어뒀으니까.
풀썩, 졸린 눈을 깜빡이던 제이드는 이내 현기증이 나서 침대에 쓰러졌다. 에이드리안(돌멩이)에게 마력을 너무 많이 먹인 까닭이었다.
“힘들다…….”
불만스럽게 돌멩이(에이드리안)를 노려보던 제이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다시 쓰러졌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해리스의 검은 슬롯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 슬롯에서 마력만 따로 추출해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마나 회로도…….
“…….”
호흡으로 들어오는 공기 속 마나가 체내 마나와 합쳐지고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마나의 불순물이 걸러진다.
“끙.”
모든 과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던 제이드는 신음했다.
‘이거, 아무리 봐도 가이드보단 이능력자에 가까운 것 같은데.’
제이드는 머릿속으로 이능력자의 설정을 복기했다.
기계를 계속 돌리면 불량이 생기고 고장이 나듯이, 이능력자들도 제 이능을 계속 쓰다 보면 각종 부작용을 겪게 된다.
‘그리고 대표적인 부작용이 마나 순환 회로가 탁해지며 마력이 오염되는 거였지.’
그렇게 되면 이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설사 발휘한다고 해도 금방 통증을 느끼거나 폭주하는 게 일반적인 루트였다.
그때 필요한 게 가이드고.
‘해리스가 자주 폭주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하지만 저의 마나 회로는 오늘도 깨끗하군요! 제이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내가 정말 이능력자라면, 던전에서 그렇게 스킬을 써대고 흡성대법도 사용했으니 슬슬 가이딩이 필요할 텐데…….’
딱히 그런 느낌도 안 든다.
“뭐야, 이거.”
제이드 리안, 이 몸 주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젠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이브리드 듀얼 코어 뉴 타입?”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리던 제이드는 베개에 코를 박고 웅얼거렸다.
“될 대로 되라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정 알아내려면 던전에 또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도록 고생하고 거지 같은 보상 받는 짓거린 다신 하고 싶지 않아-!
‘……에이드리안이 부활하기만 하면 돼!’
침대 위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제이드는 언제나처럼 같은 종결점에 도달했다.
에이드리안만 구하면, 그럼 이 모든 문제가 풀릴 거야.
사실 내가 해리스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해소될 거고, 제이드 리안의 정체도 알게 될 거야.
“에이드리안만…….”
……이쯤 되면 세뇌 수준인데. 제이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건 셀프 세뇐가.’
뭐, 어느 쪽이건 이 세계의 주인공은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리스는 언제쯤 던전 클리어 보상품을 주려나.”
거듭된 거부에 해리스는 유산 대신 던전 보상품을 넘겨주기로 했다. 알아서 팔든지 가지든지 하라고.
‘역시 모태 재벌은 다르시다,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그렇게 쉽게 턱턱 주다니.’
진짜 멋지다. 최고! 우리 해리스 님은 최고의 S급이시다!
받으면 그걸로라도 시도해봐야지. 알루카스는 제대로 말 전했으려나.
생각에 잠긴 제이드는 돌멩이(에이드리안)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다 돌멩이에 쪽- 입을 맞추었다.
“조금만 기다려, 에이드리안.”
제가 어떻게든 꼭 구해드릴게요, 오빠충님.
“오빠라고도 그때 불러드릴게.”
또 이름만 부르면 등짝이라도 때릴 것 같더라……. 제이드의 손바닥 속에서 돌멩이는 응답하듯 햇살에 반짝였다.
“아, 일어나셨네요!”
“일찍 잘 일어나셨어요. 오늘이 연회의 날인 거 아시죠?”
“오늘이야말로 때 빼고 광낼 준비 하세요!”
그러나 하녀들을 맞이한 제이드는 그를 확인하지 못했고, 돌멩이는 다시 목걸이에 단단히 묶여 옷깃 사이로 사라졌다.
* * *
대연회의 날이 밝았다.
일찌감치 초대받은(정확히는 사죄를 구걸하러 미리 찾아온) 아르투 백작은 빠른 발걸음으로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참석자들의 면면이 화려하군.”
서관에서 중앙관으로 가는 길목, 물밀듯이 들어오는 초대객들을 확인한 아르투 백작의 기분은 몹시도 저조했다.
“그렇게 요란하게 사태를 벌였으면서, 다시 소공작의 자리가 패륜아의 자식에게 다시 돌아간다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르투 백작의 아들, 소백작이 이를 갈았다.
“늙은이가 노망이 든 게 틀림없어요!”
“쉿, 언성을 낮추거라.”
심정적으로 공감했지만 아르투 백작은 조심했다.
이곳은 고드윈 공작의 본성이고, 딸이 걸려 있었으니까.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딸은 선대 공작 살인 미수죄로 감금되어 있었고, 딸과 함께 도착했다는 레토스 자작도 후계자 시해 죄로 감옥에 갇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빨리 발각될 리가 없는데!’
증거가 명백했지만 아르투 백작은 믿지 않았다. 사태가 일어난 건 고드윈의 본성이었으니까.
‘후계자 자리조차 넘겨줄 정도로 제 손주에게 눈먼 선대 공작이 상황을 어떻게 조작했을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하녀 하나가 이능력자라고? 웃기는 소리였다.
‘제대로 된 최신 탐지 기계도 없을 늙은이가 어떻게 알아채?’
그러나 이미 사태는 벌어졌다. 아르투 백작은 광산 하나를 바치고 나서야 제 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분명, 그 가이드 때문일 거야.’
노먼 고드윈에게서 버려진 친자, 해리스 고드윈이 유폐되었던 진짜 이유는 이능 발현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제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그가 본성에 입성한 순간, 비천한 가이드 계집을 동행시켰다는 것도.
‘아무리 첫 계집과의 정을 못 뗀다고 해도 그렇지, 때와 상황을 가리지 못하고……!’
이래서 천하게 자란 것들은!
귀한 혈통이 아까웠다.
“쯧.”
아르투 백작은 혀를 찼다.
퍼넬로피는 후계권을 얻어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안주인의 자리라도 노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위 될 놈이 그렇게 정신이 빠졌다니! 정말이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친모도 죽고, 아비도 없는 거나 다름없이 컸으니 어쩔 수 없겠다만…….’
부모 없는 것이 뭘 알겠는가? 정말로 그놈이 후계자가 된다면 단단히 교육해야겠지.
‘뭐, 그래도 새로운 고드윈 공작의 아버지 노릇을 하는 건 나쁘진 않겠군.’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