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51화 (51/119)

51화

제가 방금 님한테 막말하는 새끼 대신 날려 보낸 건 잊으셨는지?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대리 복수잖아! 분기탱천한 제이드의 눈엔 어느덧 힘이 빡 들어갔다.

“웃겨 죽겠네…….”

맑아진 눈으로 보니 해리스의 눈은 살짝 휘어져 있었다.

죽는다니. 일단, <시천귀> 내에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할 뻔한 건 둘째 치자.

“제가 왜 또ㄹ-”

“누가 사람 닥치게 만든다고 카트로 밀어버려?”

“…….”

아니, 알고 있었던 거야? 제이드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고의는…… 아니었…….”

“그래? 그럼 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저 새끼 안 닥치게 만들었을 거야?”

그럴 수는 없지.

괜히 해리스 빡치게 만드는 저 사특한 입은 어떻게든 다물게 해야 했다.

‘비록 폭력적이었다 해도,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서라면……!’

제이드가 말문을 잃자 해리스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것이 필요했다.

이것을 원했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마구 들끓던 뇌가 진정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어가고, 사람 하나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게 명백했다.

그런데도.

‘기분 좋아.’

닿아오는 체향은 지독히도 달큰했다. 도무지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거부하고 싶은 마음마저도 들지 않았다.

‘넌, 언제나 기적같이 나타나지.’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운데,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해리스는 가냘픈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한참을 키득거렸다.

“정말이지, 제이드. 세상에 너보다 이상한 애는 없을 거야.”

“…….”

웃으면서 욕하지 마, 개자식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랐으나 제이드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진짜 다른 세계 사람이라 그런가.”

웃고 있는 해리스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대로 간도 쓸개도 빼어다 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라.

그의 웃음을 꺼뜨리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평생이라도.

‘아, 너는 이렇게 웃는구나.’

휘어진 눈가 주변의 인디언 보조개. 멍하니 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던 제이드는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뒤로 몸을 물렸다.

“……!”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해리스의 몸 위로 안겨 있었다. 물러나려는 몸은 해리스에게 꽉 틀어 잡힌 상태였다.

“왜.”

순식간에 사라진 웃음.

멈칫하던 제이드는 해리스가 손목을 잡자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신음했다.

“다쳤군.”

“……네?”

멍해진 정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해리스의 커다란 손이 떨리는 손목을 쥐고 꽉 다물린 주먹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폈다.

“……!”

패닉하여 카트를 강하게 틀어쥐고 있던 손바닥이 온통 쓸린 듯 시뻘겠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홀로 미쳐 질주하는 카트에 전신의 무게를 싣고, 거기에 성인 남성의 육체와 부딪혔으니 영향이 없을 수는 없었다.

‘복부도 욱신거리네.’

하지만 그렇다 카트에 부딪혀 벽에 날아간 사람이 있는데, 내가 들을 말은 아닌 거 같다…….

“많이 다쳤네.”

“…….”

아닌 거 같은데.

쯧, 해리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가만있는 카트를 몸으로 치지만 않았어도, 네 손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텐데.”

가만있지 않았다.

친 것도 나다.

하지만 해리스의 얼굴은 진지했고 목소리에도 언짢은 기색이 가득했다.

아니, 저 신기한 책임 전가 방식은 뭐지? 고드윈 공작도 아니고…….

‘이건 다 노먼 고드윈 때문이다.’

제이드는 새삼 원한을 태웠다.

그 새끼가 우리 해리스한테 안 좋은 유전자를 물려줬어. 이 악의 축!

“해, 해리스 님! 방금 저 하녀가 저를 폭행……!”

뒤늦게 아이반이 반발하듯 입을 열었으나,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

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이 튀어 올랐다. 무언가 불길한,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쉬- 다독이는 목소리가 제이드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눌렀다.

해리스의 어깨에 갇혀 시야가 막히며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삐이이-

무언가 섬찟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을 뿐.

어느 순간, 정적이 사라졌다. 그리고…….

“커헉-!”

아이반은 척추가 뒤틀린 듯 고통스럽게 피를 토했다.

물론 그 혼자만은 아니었다.

제이드에게 칼을 꽂으려 한 사내는 반대로 자신의 칼에 꽂히고, 총을 쏘려 한 사내는 그 총에 당한 건지 피 흘리는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감히 고드윈 공작 성에 흉수를 반입해 나를 공격하려 했다니.”

아니, 누가 봐도 날 공격하려 한 거 같은데. 언제 바꿔치기 됐지?

제이드는 일어나는 해리스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였다.

“배후가 의심스럽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

그제야 제이드는 공간 안에 기사단이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가, 각하!”

선대 공작도.

* * *

‘와, 할아버지 공작님 표정 장난 아니네.’

아무래도 내가 서관에 오기 전부터 보내둔 아미아가 순조롭게 레디안 백작에게 상황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성에서, 자신의 허락 없이 들인 무력 인사들.

“아르투고 레토스고, 하여간……. 나를 뒷방 늙은이로 보나 보군.”

선대 공작은 이를 드러내듯 입꼬리를 휘며 말했다.

“모두 포박하라.”

“……?!”

“각하, 아닙니다!”

“저흰 그저 지나가다가……!”

호랑이와 같은 불호령에 사람들 모두 애원했지만.

“전부 끌고 가.”

“각하-!”

복도에 모여 구경하던 사용인들까지 모두 잡혀갔다.

‘상황이…… 엄청 신속하게 정리되었네?’

나 혼자만 아직도 얼떨떨하다.

아니, 뭐, 큰 문제 안 생겨서 다행이긴 한데…….

‘해리스, 분명 폭주 증상 있어 보였는데……? 어떻게 가이딩된 건가.’

진짜 내가 웃겨 죽겠어서 진정된 건 아닐 테고.

나는 방을 굴러다니던 진정제 포션과 내 목걸이에 매달린 에이드리안(돌멩이)을 보았다.

흠, 일단 둘 중 하나가 활약한 게 확실한데.

‘제발 포션이어라.’

내 살림 밑천……. 가이드 불감증인 해리스에게마저 통했다면 진짜 대박 나는 건데.

물론 네이트가 합류한 이상 성공은 확정된 일이지만, 그래도 더 큰 성공을 바라는 게 인지상정.

싹쓸이된 공간을 둘러보던 선대 공작은 굳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해리스가 말했다.

“집안 관리 좀 하시죠. 이게 뭡니까?”

싸늘해진 그의 얼굴이 들어 올린 건 빨개진 내 손바닥이었다.

‘아니…… 이거 진짜 별거 아닌데.’

이런 걸로 따지다니 민망해 죽겠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점점 붉은 기가 가라앉고 있어서 더!

“…….”

아니, 근데 선대 공작님의 얼굴은 또 왜 저래. 무슨 내가 던전에 갔다 왔을 때처럼 심각하다.

‘말없이 불쑥 찾아오더니 왜 이렇게 늦게 깨어났냐며 억지로 맛없는 보양식들을 먹이셨지.’

다 먹을 때까진 보좌관들이 곁에서 채근해도 안 가시더니, 가고 나신 뒤에도 한가득 보내셨다…….

“읏.”

그때의 지독히도 맛없는 보양식의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자동적으로 찡그려졌다.

“……!”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선대 공작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많이…… 아프냐?”

심지어 조심스럽게 묻기까지 한다.

“여기, 얼음이라도 쥐고 있어. 부었네.”

그리고 해리스 넌 또 뭐 해!

“그걸 또 그냥 주면 어떻게 하냐. 수건에라도 감싸야지.”

할아버님은 왜 또 조언해요!

“아. 답지 않게 제법 섬세하시군요.”

넌 그게 뭐라고 또 진지하게 고개 끄덕이는 건데!

“그래, 내가 한 섬세한다. 자기 가이드에게 대충 얼음이나 건네는 누구완 다르지.”

“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전엔 이렇게 손이 벌게진 것도 못 알아보는 분과는 당연히 다르겠지요.”

둘 다 쓸데없는 기 싸움 그만해!

그렇게 완성된 차가운 수건 찜질을 손에 쥐며 나는 눈을 끔뻑였다.

‘진짜 이 사람들이 미쳤나.’

내 시선을 받은 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너무 차가워도 계속해. 냉찜질해야지.”

“…….”

아니, 지금 여기서 제일 경미하게 다친 사람이 나 같은데.

나는 해리스의 품에 안긴 채 동관으로 들려가면서 살짝 걱정했다.

우리 해리스…… 진짜 웃다가 살짝 돌아버린 건 아니겠지……?

* * *

그리고 밤.

제이드가 잠든 사이, 옷깃 밖으로 늘어진 짙은 분홍빛 돌멩이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천연 보석과도 같은 투명한 돌멩이의 내부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어둠 가득히 연기가 피어났다.

그리고.

“후…….”

천천히 연기가 가라앉는 사이, 하나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진한 분홍빛의 기다란 머리카락.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수려하고도 중성적인 미인에게선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이 풍겼다.

“……이제야 실체화를 해내다니.”

에이드리안은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너무 오래 걸렸다.

심지어 제대로 된 것도 아니요, 얼마 유지하지도 못하는 처지.

‘해주석.’

역시 그게 필요하다. 에이드리안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으응.”

도롱거리는 작은 코골이에 에이드리안은 잠시 침대 머리맡에 서서 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던 에이드리안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제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은 오싹할 정도로 무표정해 암흑과도 같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기어, 도리어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게 된.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오래 제이드를 응시하지 않았다. 돌아선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고드윈의 본성. 이곳은 그의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돌아다녔던 곳.

에이드리안은 사용인들의 경로는 물론 경비의 순찰 루트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었다.

새벽의 밤, 그렇게 누구의 시선을 끌지도 않고 에이드리안은 감옥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크, 흐…….”

검고 불길한 힘에 뒤덮여, 의식을 잃고 침을 질질 흘리는 보나에게.

‘해리스 고드윈의 짓이군.’

객관적으로 몹시도 가엾은 모습이었으나, 에이드리안은 냉정했다. 그녀가 어쩌다 이곳에 처박히게 되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당장 죽이지 않고, 오래 고통받도록 고문하는 건 해리스의 특기였다.

그 본인이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라 그런 걸까.

‘어리석어.’

그보다도 오래 복수귀로 살아왔던 에이드리안은 냉정히 평가했다.

자고로 거슬리는 요소가 있으면 감정적으로 보복할 생각 말고 곧장 제거해야 했다.

지금처럼.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