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진짜, 투명하다, 투명해.”
나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망할 공작 놈이 손님들을 보냈다더니, 역시나였다.
구 고드윈과 신 고드윈 사이 중립을 취하는 아르투 백작 영애와 노골적으로 신 고드윈 세력의 발닦개를 자처하는 아이반 레토스 자작.
‘처음엔 퍼넬로피 아르투 백작 영애를 통해 해리스의 가이드인 날 건드렸지.’
그리고 이제는 해리스 본인을 자극할 셈인 모양이다.
두 번의 개수작에서 고드윈 공작의 의도가 너무 잘 읽혀 나와 헛웃음이 났다.
‘고드윈 공작, 그 자식은 해리스가 저것들을 죽여 버리길 원하는 거야.’
람서스 제국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식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다.
덕분에 귀족이 평민이나 사용인을 죽이는 것은 큰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귀족, 그것도 대귀족이 비호 하는 자들을 죽이는 건 극형에 달하는 범죄가 된다.
‘이러니까 멸망하지!’
너흰 망해도 싸. 노예제가 허용되는 시점에부터 개그지 같은 나라인 거 알아봤다!
그리고 고드윈 공작의 목적은.
‘귀족 살해라는 죄목으로 해리스의 후계권을 박탈하려는 거구나.’
그렇게 범죄자가 된 해리스를 이전처럼 억제구를 채워, 다시 감옥에 가두고 싶은 거겠지.
과연 고드윈 공작은 해리스가 선대 공작에게 인정받은 후계자라는 걸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뭐 이런 싸패 같은 새끼가…….”
정말이지 기가 찼다. 친아들인 해리스를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짓밟겠다는, 저 소름 끼치는 악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악의 어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멀쩡히 산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바치겠다는 이 음침한 계략은 또 뭐란 말인가.
“인간성 자체가 쓰레기야, 쓰레기.”
원래도 정 같은 건 없었지만 진짜 없던 정마저 떨어진다.
‘황녀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폐기물을 남편으로 삼으신 건지…….’
나는 수십, 수백 번은 한 의문을 떠올리며 카트를 끌었다.
그렇다, 나는 현재 아이반 놈이 판을 짠 서관에 들어와 있었다.
‘뭔 짓을 할지 대충 짐작이 가.’
어떻게든 해리스를 말려야 한다. 진짜 저 의도대로 넘어가면 큰일이야.
진짜 작정하고 해리스를 폭주시킬 생각인지, 나는 하녀로 분장하고 나서야 서관에 들어올 수 있었다.
‘끙, 무겁네.’
애프터 눈 티를 가져다드린다는 핑계로 끌고 있는 3단 양철 카트는 끌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서관의 사용인들은 다 잿밥에나 관심 있는 것들이라서인지 바닥의 융단조차 낡고 미끄러웠다.
‘아, 수상한 곳 발견!’
어느 구석의 방문 앞, 사용인들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심조심 카트를 끌며 슬금슬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살짝 열린 방문에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니, 고드윈 공작님의 명을 받들어 온 제가 말씀을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
진행 중이다!
나는 다급히 카트를 밀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문으로 가까워질수록 목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렸다.
“주제를 알면 곱게 물러나십시오. 추한 꼴 보이지 말고.”
……미친놈인가?
난데없는 어그로에 당황하여 발이 엉켰다. 균형 감각을 잃은 몸은 그대로 카트를 향해 넘어졌다.
“……읏?!”
컥, 손잡이가 배에 정통으로 눌려 아팠다.
상체가 카트에 엎어지다시피 하며 열린 문틈 사이로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공작이 된 후에 잘 보살펴드리지요. 연간 예산으로 최대 50마르크를-”
아니, 저 미친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1년에 50? 연금도 그것보단 많이 받아!
“꽥.”
분노를 성토하기도 전에 허공에 발이 들렸다. 몸이 카트로 완전히 기울어진 탓이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
지금 저 새끼가 개소리 지껄이는 거 막으러 가야 하는데, 켁!
그러나 내 무게까지 더해진 양철 카트는 나의 마음과 정반대로 신나게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바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문 쪽으로.
‘자, 잠깐, 설마 부딪히는 건 아니겠……!’
쾅-!!
튼튼한 양철로 만들어진 3단 카트는 문을 박살 낼 듯 부딪히더니, 이미 작게 열려 있던 문을 부수듯 열어젖혔다.
설마가 또 사람을 잡았다…….
“……?!”
공간 안의 눈동자들이 카트에 매달린 나를 발견하고선 커다래졌다. 다들 자기가 뭘 보고 있는지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끼야아아악!”
그리고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카트에 매달린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둥거리며 외치는 게 다였다.
“다, 다들 비켜어억-!”
그러나 세상엔 상황이 어떻게 되어도 자신에만 취해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부디, 주제를 아신다면 알아서 물러나 주셨으면 합…….”
쿵-!!
카트에 두꺼운 무언가에 부딪히듯 충격이 가해졌다. 내 몸과 시야도 함께 흔들렸다.
“-꾸에엑!”
뒤이어 카트가 벽에 부딪혀 쾅-! 하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이어졌다.
* * *
“…….”
해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제이드를 싣고 온 카트는 아이반이라는 성인 남성의 육신을 치다 못해 그대로 벽으로 날려버렸고.
콰앙-!
벽에 부딪힌 사내는 ‘쿨럭-!’ 하고 피를 토하며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카트의 반작용으로 밀려난, 그리하여 간신히 바닥에 발을 내디딘 제이드에게 시선이 쏠렸다.
“……으.”
쓰러지다시피 카트에서 미끄러진 제이드는 신음했다.
‘뭐, 뭔가 날아가는 게 느껴졌는데.’
카트에 매달려 있던 몸은 그제야 지상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무…… 묵직했어.’
카트로 쳤을 때 느낌이 엄청 묵직했다고!
억지로 눈을 뜨자 쓰러진 사람의 그림자 위로 먼지 연기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꺄아아악-!!”
뒤늦게 요란한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저 하녀 따위가 아이반 님을?!”
“누구, 누구 어서 의사를 불러……!”
“죽은 거야?!”
이어지는 고함과 충격에 제이드의 머리는 백지가 되었다.
‘내,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이럴 수가.
해리스의 가이드가 된 지 어언 몇 달. 드디어 나마저도 공감 능력 결여 싸패 살인마로 거듭났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해진 제이드는 부들부들 떨리는 사지로 피해자를 향해 기어갔다.
“저기, 저기요……?”
요란히 비명을 지르는 사방과 달리 정작 사내에게 다가가는 건 제이드뿐이었다.
‘아직 살아 있다!’
들려오는 신음. 제이드는 얼른 그를 붙들고 눈알을 까뒤집고 숨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멀쩡했다.
안심한 제이드는 사내의 의식을 차리게 하려고 뺨을 여러 번 후려갈겼다.
짝- 짝!
“여, 여보세요? 정신이 드세요? 의식을 놓으시면 안 돼요!”
전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절대 어떠한 사감도 없었다.
‘이 새끼가 해리스 자극해서 폭주 사태 일으키려 했지? 해리스가 폭주하면 사방 다 초토화야! 미친 새끼 뒤질 거면 혼자 뒤지든가!’
-같은 뒤끝은 결코! 없었다.
“으, 으…….”
마침내 아이반이 깨어날 듯 눈을 깜빡이자 제이드는 안도하여 외쳤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
“……??”
당황해서 허겁지겁 말을 꺼냈는데, 괴이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사방에서 찔러왔다.
‘잠깐, 나 방금 엄청 쓰레기처럼 말했잖아?’
원래는 ‘괜찮아요?? 미안해요!!’ 하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엉겁결에 사람을 쳐놓고 도리어 사과를 요구하더니 뻔뻔히 괜찮다고 지껄이는 개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이럴 수가. 노먼 쓰레기 고드윈이나 할 짓을.’
현타가 장난 아니었다. 나 인생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제이드가 극심한 자괴감을 느낄 무렵 반쯤 죽어가고 있던 사내, 아이반이 눈을 떴다.
“너, 쿨럭, 너 이 망할 것이……!”
어쩐지 몹시 빡친 것 같은 얼굴로.
‘아니, ‘어쩐지’가 아니지. 3단 양철 트레이 카트를 전력으로 부딪혀 그를 벽으로 날려 버린 게 바로 나잖아.’
게다가 방금의 개쓰레기 발언까지 더하면 분노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 살았다!”
그러든 말든 제이드는 환호했다. 다행이다, 내가 사람을 죽인 건 (아직) 아니구나!
“네가 안 죽인 게 아니라, 내가 자력으로 살아남은 거다!”
아이반은 버럭 피를 토하는 것처럼 고함쳤다.
기력이 좋군……! 몸 가득 차오르는 안도감에 제이드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다행이네요! 자력으로 살아남으셔서!”
“그게 네가 할 소리냐?!”
“네? 아,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소리 지르시는 거 보니 의식도 말짱하신 모양이에요!”
“너-!”
객관적으로 상태를 진단했을 뿐인데, 사내의 얼굴은 더욱 시뻘게졌다. 분노가 극에 달한 표정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감히, 고드윈 공작 가의 차기 후계자가 될 이 몸에게……!”
“엑, 누구 맘대로.”
제이드는 정색했다. 사는 건 사는 거고 망상은 혼자만 하셔야지.
“이 미친 개XX이!”
그런 제이드의 얼굴에 격노한 아이반이 고함쳤다.
“누구 저 미친년을 당장 죽여! 당장 죽여버리란 말이다-!”
순간 제이드 뒤에서 섬뜩한 음향이 들려왔다. 칼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총이 장전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돌았나.’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두렵진 않았다.
“크아악-!”
“으헉!”
무기가 제대로 겨누어지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될 걸 알았으니까.
제이드 뒤에서 살의를 뿜으며 공격하려던 인영들은 순식간에 검은 촉수와 같은 마력에 휩싸이더니 벽에다 내동댕이쳐졌다.
쿵, 퍽, 으악! 커억-!
‘아이고, 아프겠다.’
하지만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시오. 우리 해리스는 때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익숙…….
“……!”
상념이 끊겼다.
어느덧 다가온 해리스가 뒤에서부터 안아오며, 코끝이 귓바퀴에서 목덜미까지 쓸며 체취를 삼켰기 때문이다.
“제이드.”
귀에다 입 맞추듯 붙어 속삭이는 목소리. 커다란 손아귀는 가볍게 제이드의 작은 얼굴을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빨갛고 투명한, 두렵고도 아름다운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오싹해.
무서울 정도로 미형인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직도 폭주 직전의 상태인 걸까, 던전에서의 눈 돌아간 해리스가 오버랩되면서 심장이 팔딱거렸다.
“넌 정말…….”
나른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핥아오는 듯했다.
사실 제이드는 할 말이 많았다.
내가 일부러 사고 친 게 아니다. 사실 이게 전부 개수작이고, 나는 그걸 미리 알고 막으러 왔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사고 쳐서 미안하다…….
그러나 입이 바싹 마르며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
“웃겨.”
뭣이라.
“진짜 또라이 같아.”
저기요?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