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분 말씀대로라면, 자신이 아니라도 해리스 고드윈은 소공작이 될 수 없다.
‘난, 절대 혼자 안 죽어.’
퍼넬로피는 입꼬리를 올리며 쪽지를 태웠다.
* * *
“등신 새끼.”
해리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꺼풀이 티딕 튀어 오르며 꾹꾹 누르는 손끝이 떨렸다.
진정제 포션들을 모조리 삼켰음에도 이 정도였다. 이마저도 먹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게 가장 기분 더러웠다.
‘가이딩을 받아야 했어.’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
분명 처음에 제이드를 찾아갔을 땐 가이딩을 취하려 했다.
던전에서, 기억에 없는 자신이 지나치게 밀어붙여 제이드를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때문에 참았지만, 외간 새끼를 가이딩했다는 소리에 눈이 돌아가서.
아니라는 말과 해명을 듣고 가라앉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가이딩을 받아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했잖아.’
처음은 파장으로, 다음은 가벼운 접촉이었으며 마지막엔 꽤 짙은 가이딩으로 이어졌었겠지.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가이드고, 이는 업무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상관없었을 텐데.
‘아, 안 울어요.’
억지로 눈물을 그치려는 듯, 부릅뜬 커다랗고 투명한 눈동자.
젖은 눈매에서 눈물이 구슬처럼 계속 쏟아졌다. 황급히 닦아내는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왜 갑자기 우는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고백이 진실인지도.
돌돌 말린 이불 사이 뽁 하고 나온 작은 얼굴. 빨개진 코와 눈매. 그리고…….
‘뜨거웠어.’
해리스는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작고 여린 것을, 다치지 않게 만지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가이딩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접촉한다. 울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믿는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사실 객관적으로 그리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제이드의 이야기가, 그녀가 주장하는 삶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녀가 나를 고의로 기만하지 않을 사람이라 인정했을 뿐이야.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은 관계인데도?’
순간 치솟는 생각을 억누르듯 해리스는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윽……!”
과도하게 집중한 신경 때문인지, 안구의 안쪽에서부터 꾹꾹 바늘이 쑤셔오듯 통증이 느껴졌다.
만성적인 통증이었다.
어느덧 익숙해졌다고 여기고 있던 고통. 버틸 수 있다고 여겼던 아픔이 서서히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가이딩을 받았어야 해.’
지금이라도 끌고 와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자, 잠시만요. 금방 그쳐요. 잠시만…….’
“……빌어먹을.”
됐다. 원래도 가이드 없이 산 몸이다. 이제 와 중독자도 아니고 못 버텨낼 이유가 없다.
해리스는 자신에게 내재한 힘에 집중하며 그를 어떻게든 스스로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흐-”
감긴 눈이 떨리고 신경이 예민해졌다가 아예 무감각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해리스 님, 여기 계셨군요.”
거세게 닫혔던 문이 일방적으로 열려온 것은.
“찾았습니다.”
그리고 달칵, 다시 문이 닫혔다.
* * *
“아, 진짜 왜 그랬지…….”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해리스 앞에서 갑자기 울어버렸단 말인가.
지금껏 최선을 다해 이 망할 빙의 라이프를 살아왔다.
해리스, 에이드리안, 선대 공작과 알루카스…… 온갖 위기 속에서 최선의 방향을 궁리했고, 최대한 생존 확률이 높은 선택지로 나아갔다.
한마디로 어떠한 상황이 오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이해타산적으로 움직였단 말이다.
‘해리스는 ‘퍽이나’ 하고 코웃음을 치겠지만.’
물론, 진심 없이 순수하게 이해타산적으로 군 것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감정적으로 이끌리는 선택을 고르기도 했다.
‘하지만 어제처럼 아예 아무런 생각도 계산도 없이 감정적으로 반응한 건 처음이라고……!’
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대체로 사람이 답지 않게 굴 때는 주로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내가 해리스를 좋아하나?’
아, 물론 좋아한다.
말도 안 나오게 아름다운 용모에 늘씬하고 커다란 키. 큼지막한 뼈대에 기계처럼 꽉 채워진 근육질까지.
‘이상적인 인간을 신이 뽑아 모델링한 것 같은 미남을 좋아하지 않는 게 어렵지.’
심지어 해리스는 최애, 그러니까 덕질 대상이기까지 하다.
비록 시작은 2D 활자 속 인물이긴 했지만……. 3D 실물로 만난 뒤에도 덕심이 식진 않았다.
즉, 나의 ‘좋아한다’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호감 섞인 덕심에 가까웠다. 심지어 키스를 하고 나서도 그랬다.
‘뭐, 솔직히 정신 로그아웃할 정도로 좋긴 했지만.’
일생에 그런 끈적한 스킨쉽과 연이 없었던지라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건…….
‘아니, 객관적으로 별일 아니잖아. 뭐 대단한 게 있던 것도 아니고.’
분명히 별일 아닌데, 이상하게 키스했던 것보다 더 신경 쓰였다.
“……난 왜 또 하필이면 거기서 울어서!”
심지어 돈 버는 일로 울다니 말이야. 진짜 미친년 같잖아!
‘쉽게 살려고 주인공 밑천도 턴 주제에 이게 무슨 꼴값인지.’
에효,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하녀 언니들의 인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제이드 님!”
고드윈 공작 성에 들어선 이후부터, 나는 공작 가의 사용인들과 열심히 인맥을 쌓았다.
‘특히 바로 곁의 하녀 언니들에게 공을 들였지.’
나를 죽이지 않을 평범한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게 즐거운 것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전 작업을 쳐놓는 의미가 컸다.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눈과 귀를 심어 놔야 해.’
<시천귀>의 초반 파트는 지하 감옥에서 선대 공작이 지배하는 고드윈 공작 성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즉, 원작의 사건, 사고가 내게도 찾아올 수 있단 말이야.’
그리고 정말 찾아와 버렸다.
“큰일 났습니다! 해리스 님께서……!”
* * *
“기가 막혀서.”
뚝, 해리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이미 자격을 잃어 내쫓긴 것이 어딜 다시 기어들어 와?”
감긴 해리스의 눈꺼풀은 불규칙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주제를 안다면 알아서 꺼져줘야지, 어딜 감히 다시 그 고개를 들이미냐고-”
멋대로 들어온 사내는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리는 해리스를 어떻게 본 건지, 주절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공작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사내, 아이반은 교묘히 웃었다.
“저의 사견이 아니니, 유감스러워하지 마시길.”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 위대한 고드윈의 방계로 태어나 그대로 죽을 줄 알았던 아이반이다.
그런데 고드윈 공작이 미쳤는지 자기 친자를 유폐하고, 후계자를 정할 권리마저 포기했다.
고드윈의 새로운 주인을 뽑을 자격이 선대 공작에게 쥐어졌다.
그 이후, 방계의 가문들이 들썩였다.
어쩌면 내가, 내 자식이, 우리 가문이……!
‘하지만, 기회는 내 것이지.’
많고 많은 방계 중, 고드윈 공작은 아이반을 골랐다.
아, 물론 아르투 백작 영애 퍼넬로피도 함께 뽑히긴 했다.
하지만 계집이 뭘 알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분란을 일으켰지.’
쯧, 아이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얼마나 멍청하면 오자마자 사달을 내는지.
그러나 얼굴은 제법 반반하고 집안이 나쁘지 않으니, 납작 긴다면 공작부인으로 삼아줄 생각은 있었다.
‘제법 꾀도 있고.’
은밀히 보내온 쪽지에서, 퍼넬로피는 최대한 빨리 ‘일’을 시행하라 충고했다.
자신의 사태로 선대 공작은 당분간 그들이 자중하리라 예상할 거고, 그 틈을 타 움직이라며.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게다가 사용인들에게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보나의 일을 전해 들은 해리스 고드윈이 분노하여 가이드를 찾아갔다고 했다.
‘채신머리없이 돌아다닌 것을 질책한 거겠지.’
그리고 가이드의 침실에선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얼마 뒤 나온 해리스 고드윈은 제대로 가이딩도 받지 못했다고.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물론 위대하신 공작 각하의 뜻이 어디 틀리겠습니까?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앞으론 제가 잘 챙겨드릴 테니.”
아이반은 해리스 앞에서 공작새가 깃털을 부풀리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의로 그를 자극하고 부추기기 위함이었다.
‘공격하겠지.’
해리스가 어느 정도 급의 이능력자인지 모르는 아이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디 람서스 제국의 3대 가문, 고드윈의 후계자가 말 몇 마디 들었다고 귀족을 폭행하다니!
‘역시 야만적인 이능력자는 안 돼.’
‘그치들을 쓸 수 있는 것은 던전이나 균열과 같은 폭력적인 장소들뿐이다!’
고드윈 공작이 늘 하던 주장이 아이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제를 아신다면 이제 알아서 물러나십시오. 굳이 일을 추하게 만들 것은 없겠지요.”
아이반이 무어라 하건, 정작 해리스는 고요했다.
자의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들끓던, 폭주의 징조가 그의 머리부터 장악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이면, 안 돼.’
그나마 남은 한줄기의 이성이 경고했다.
최소한 당장은 안 된다. 해리스도 이게 어떤 개수작인지 알았다.
심지어 저 새끼 하나만도 아니었다.
그가 줄줄이 데려온, 고드윈 공작이 더했을 게 뻔한 수행원들이 해리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가 공격하길 기다리듯이.
‘참아야 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해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수도의 고드윈 공작저.
자신을 경계하고 혐오하는 얼굴들. 괴물을 보는 듯한 눈동자.
당장에라도 목줄을 채워 감옥에 처넣고 싶어 하던 공작…….
‘괴물 새끼!’
그들의 얼굴이, 목소리가 겹쳐졌다. 흰 주먹에 검은 핏줄이 불거졌다.
부르르-
검은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마력이 해리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림자에서 넘실거렸다.
익숙한 폭주의 전조였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해리스 님!”
뒤흔들리는 의식 속, 누군가의 당황한 비명이 들려왔다. 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폭주하는 그 앞에, 모두가 기피하고 도망치려던 순간에 유일하게 다가온 소녀.
“제이드……?”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리고, 자그마한 몸체가 전력으로 부딪혀 온다…….
“모두 비켜-!”
……자신이 아닌, 아이반이라는 사내에게로.
“……?!”
해리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리고 부딪힌 것도 제이드가 아닌 3단 양철 트레이 카트……. 잠깐, 카트?
‘그게 왜 여기서 나와?’
해리스가 되묻기도 전에 커다란 타격음이 공간을 울려왔다.
쿵-!!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