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나는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해리스는 ‘튀다’라는 말에 언짢아하면서도 코웃음 쳤다.
“들 수는 있어?”
“못 들죠…….”
그 엄청난 유산, 보는 데만 일주일 넘겠더라. 보다가 질려서 그만뒀다.
“왜, 왜 저한테…….”
이런 시련을,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해리스의 손이 내 볼을 눌렀다. 그에 내 입술은 오리주둥이처럼 발사됐다.
“꽥.”
“왜일 거 같아? 잘 생각해봐.”
자기도 모르는 걸 나한테 생각하라고?
기가 막힌다. 가장 기가 막힌 건, 이 와중에도 해리스와 접촉해서인지 들뜬 내 기분이었다.
‘뭐야, 덕심에 미쳤나.’
나는 푸다닥 몸부림치며 오리주둥이에서 벗어났다.
“아니, 유산은 제가 받긴 좀 그렇……!”
“안 그래.”
“…….”
단호하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불로소득이 좋아도 이건 아니야! 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튼! 전 직접 돈을 벌고 싶어요. 저 스스로! 제 돈을!!”
그러니까 유산 같은 거 주지 마. 난 그 패륜 감당 못 해!
“왜?”
해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새삼 그의 정체성을 실감했다.
‘감옥에 갇힌 채 사용인들에게 핍박받고 살아왔어도…… 그래도 귀족이구나.’
귀족은 직접 노동해서 돈 벌 생각을 안 한다지.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의 돈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보통 이렇게 말하면, 경제적으로 의지한다는 정도로 이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내겐 말 그대로의 의미다.
나는 시한부 희귀병 환자였고, 말 그대로 나는 가족들의 돈으로 살아 숨 쉬었던 사람이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 언니는 데뷔를 코앞에 둔 연습생 자릴 그만두고 취직했고, 엄마는 20년 넘게 살아온 집을 팔아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게 되었다.
‘괴로워.’
난 내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행복하기도 했고, 즐거운 기억도 많다.
하지만 끔찍했다.
점점 낡아지고 초췌해지는 언니와 엄마를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나만 아니었어도 두 사람에겐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거란 생각이 들 때마다 절망스러웠다.
“차라리…….”
포기하면 나았을 텐데. 더는 가망 없다는 말을 받아들였다면 나았을 텐데.
하지만 두 사람은 날 사랑했다.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어서라도 내 삶을 연명시킬 정도로.
그래서 비참했다.
그런데도 살고 싶은 내가 징그러웠다.
어떻게든 사랑을 구걸하고, 한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 버둥거리던 내가 혐오스러웠다.
죽음을 안식으로 여기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쉬웠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일회용 목숨의 엑스트라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긴가민가하지만, 죽음 자체에는 안도한다.
더는 나라는 짐이 그들 위에 얹혀 있지 않아서. 나의 무게가 두 사람을 짓누르지 않을 거라고.
나는…….
“알았어.”
“……!”
눈이 커졌다.
해리스의 대답 때문이 아니었다.
붉은 홍염의 눈동자. 어둠이 켜켜이 쌓인 듯 까만 머리카락. 신이 손수 깎은 듯 아름다운 얼굴은 흰 유약을 바른 듯 매끈했다.
해리스 고드윈.
숨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그 남자가 말했다.
“알겠으니까, 울지 마.”
커다란 손으로 내 턱관절을 살살 눌러, 지나치게 이를 악물던 턱에서 부드럽게 힘을 빼놓으면서.
“흐, 읏…….”
호흡이 벅찼다. 시야가 물기로 왜곡되었다. 헐떡이는 호흡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 울고 있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운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은 목숨의 위기 앞에서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에 가까웠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해서,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서 속살을 드러내다니.
‘왜 이러지?’
가족들 앞에서도 이러지 않으려 했는데.
고통스러운 치료에 울부짖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갉아먹는 스트레스를 삼키려 죽도록 애썼는데…….
그런데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해리스 앞에서!’
해리스는 본인이 불우한 가정환경을 타고난 터라 가족 일로 질질 짜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한다.
게다가 해리스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 사람이다.
‘정신 나갔다고 생각할 거야…….’
심장이 정신 나간 덕심과 불안으로 헐떡였다.
어쩌면, 폐기처분당할지도 모른다. 흡성대법과 슬롯으로 생긴 불안이 속에서부터 나를 갉아먹었다.
‘해리스는 이미 제 입으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버릴 거라고 했어.’
당장은 아니라도 나를 대체할 가이드를 찾으면 바꿔 끼울 부품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지.
“아, 안 울어요.”
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난 지금도 해리스를 좋아한다. 최애다. 지금도 탈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잘 알았다.
그가 의심이 많고, 인간을 혐오하고, 그게 누구건 쉽게 정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어쩌면, 조금은 친해졌을지도 모르지.’
해리스가 내게 보이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자면 다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니까.
하지만 친분이란, 언제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는 무형의 감정에 불과하다.
“잠, 잠시만요. 금방 그쳐요. 잠시만…….”
킁, 코를 먹으며 젖은 목소리를 몇 번이고 삼킨다.
‘해리스가 내게 몇 번이고 말했듯, 나도 그를 너무 믿어선 안 돼.’
그 하나에게만 올인할 수 없다. 그래서 플랜 B를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든 버텨야 해.’
최소한 내가 이 낯선 세계에서 약간의 기반을 갖추기 전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줘- 꽥!”
갑자기 머리 위로 이불이 덮어왔다. 아니, 머리만이면 차라리 다행이겠는데 몸 전체가 둘둘 이불에 감긴 뒤였다.
‘이건…… 김밥 말이?’
정신 차렸을 때는 돌돌 이불에 말려 얼굴만 뽁, 나온 뒤였다. 황당해진 난 우는 것도 잊고 삑 소리쳤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울길래.”
어느덧 내 옆에 누운 해리스는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말했다.
“더 울어.”
“…….”
보통 이럴 땐 울지 말라고 하지 않나? 나는 기가 막혀 삑 소리쳤다.
“이미 다 그쳤거든요!”
“왜?”
“보면 몰라요? 이 꼴로 어떻게 울어요.”
“몰라. 왜 못 우는데?”
“…….”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 눈물의 소금기로 달아오른 눈가에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렸다.
사람을 집어 던지고 책상을 박살 내며, 뼈를 으스러뜨리던 커다란 손이 젖은 눈물을 살살 쓸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의사소통이 서투른 짐승이 자기 딴엔 선물이랍시고 사냥감을 가져다 발치에 내려놓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
‘이거, 설마 해리스 딴엔 위론가……?’
울지 말라고, 아니, 더 울라고 이불 김밥으로 만든 게.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정말이라면 믿을 수 없이 서툴고 어색했다. 하긴, 해리스가 언제 제대로 위로를 받아봤을까.
“……해리스 님.”
불쑥, 충동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방금 제 말을 믿으세요?”
감정적으로 동요한 순간, 나는 실수로 내 과거의 편린을 내뱉어 버렸다.
다른 세계 속 나의 삶을 어디까지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처음엔 믿지 않는다고 했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라는 걸. 예언자라는 것도.
“안 믿어.”
“…….”
1초도 망설이지 않는 저 단호함! 나는 썩은 얼굴을 이불에 묻었다.
‘눈 안 뜨길 잘했다.’
정면으로 시선 보면서 들었으면 없는 쪽도 팔렸을 거야.
천천히, 옆자리의 무게가 덜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내가 가져온 진정제를 가져가는 것도.
‘그래, 가라 가.’
대체 왜 왔는지, 뭐가 열받았다가 갑자기 가라앉은 건지 모르겠지만, 해리스 말대로 잠이나 자지 뭐.
안 그래도 울어서인지 피곤해서인지 엄청 졸리긴 했…….
“하지만, 최소한 너한테는 진실이겠지.”
“……!”
눈이 커졌다.
어스름한 문가, 나와 시선이 마주친 해리스는 불을 끄며 말했다.
“그건 믿는다.”
잘 자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게 뭐야.”
잠 못 드는 나를 남겨두고서.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보면서 생각했다.
설마, 내가 정신병 말기 망상증 환자라 믿는다는 소린 아니겠지?
* * *
“빌어먹을!”
아르투 백작 영애, 퍼넬로피는 화병을 집어 던졌다.
쨍-!
화병에 정통으로 맞은 귀한 전신 거울에는 쩌저적 금이 갔고, 값비싼 화병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미 사방은 부서지고 망가진 물건들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퍼넬로피가 그럴 때마다 그녀를 에워싸고 얻어맞으며 분을 풀어줘야 할 하녀들은 곁에 없었다.
모두 심문을 위해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깟 하녀가 뭐라고……!”
다른 이의 시선이 부재한 공간, 착하고 어여쁜 귀족 영애의 얼굴이 부서지며 섬뜩한 무표정이 드러났다.
아르투 백작 가문은 비어 있는 고드윈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노리고 퍼넬로피를 보냈다.
그 야심을 지원한 것은 당연하게도 현 공작이었다.
아르투 백작은 딸에게 말했다.
‘후계권을 쟁탈하지 못한다면, 그 후계의 아내라도 되어라.’
그래서 퍼넬로피는 처음부터 해리스 고드윈의 가이드를 노렸다. 죽일 수 없다면 재기 불능한 상태로라도 만들어야 했다.
‘가이드를 잃은 이능력자는 불안정해진다지.’
그때를 기회 삼아 후계권 재심사를 노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 괴물의 아내가 된다고 해도, 그런 천한 미색의 하녀 따위가 남편의 가이드가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가이드 따위, 구하면 그만이잖아.’
저런 얼굴의 가이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건 정해진 결론이었다. 그녀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손님도 제거의 뜻은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이렇게 드러내 놓고 죽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일이 왜 이렇게 틀어진 거지?
‘아르투 백작 가문은 이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이능력자를 비밀리에 들여왔다는 것을 선대 공작에 대한 암살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억울했다. 선대 공작을 노린 것도 아닌데 저런 억지라니!
진짜 죽이기라도 했으면, 최소한 그 잡것의 얼굴을 찢어놓기라도 했으면 분이 풀렸을 텐데.
“한 톨도 다치지 않고 무사한 주제에, 감히 나를 가둬?”
퍼넬로피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보통은 이능력자가 가이드를 알아보지,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데.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간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지.”
그녀는 감옥의 죄수에게나 줄 법한 찬 식기 아래 은밀히 접힌 쪽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잡혀 오기 전 이미 다음 수는 작업해 둔 뒤였다.
‘그 자식이라면 분명 먼저 움직일 거야.’
퍼넬로피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놈이 아니라도, ‘그분’께서 약속하신 건 따로 있었다.
‘대연회.’
그날까지만 버티면 된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