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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47화 (47/119)

47화

그의 주인, 알루카스가 그대로 계약금을 지불한 뒤 순순히 물러나기 전까지 말이다.

‘지, 진짜로 계약하신 겁니까?!’

‘그럼 가짜로 계약해?’

‘네!’

‘…….’

‘뭘 그런 표정이십니까? 지금껏 실컷 가짜로 해먹으셨으면서-’

‘닥쳐 좀. 다 들린다고.’

‘엥, 들리면 뭐 어떻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거에 신경을 쓰셨다고, 안 어울리게- 악!!’

루켄은 그대로 반항도 못 하고 알루카스에게 뒷목 잡혀 끌려갔다.

‘저런 조무래기 상단의 비위를 맞춰줘?’

초심을 잃었다.

루켄은 알루카스가 계약에 이어 루도스 상단의 뒤를 봐주라는 명을 내리자 더욱 확신했다.

우리 단장님, 초심을 잃어도 아주 단단히 잃었어!

“진짜, 왜 이러십니까? 뭐라 토 안 달 테니 이유라도 말해주십쇼.”

속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는 건 죽기 직전이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라는데.

설마 알루카스 님이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다는 거……?

“아니다.”

“악!”

깡, 루켄의 대가리를 내려친 알루카스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나한테도 취향이라는 게 있거든? 걘 너무 어려.”

“예에, 저도 잘 알죠…….”

그러니까 더 문제라는 거잖아요.

루켄은 머리의 혹을 누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취향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염병 떠는 거야.

불만 가득한 얼굴에 알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하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 온 보좌로선 그의 행각이 의아할 것이다.

‘나도 기분이 이상한데.’

알루카스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늘 여유롭고 능글맞던 얼굴에 옅은 긴장감이 스쳤다.

사실, 루켄 말대로였다.

가이딩이 잘 맞은 것 때문이라면 그대로 납치하면 그만이었고, 진정제 포션이 마음에 들어서라면 그대로 상단을 먹어버리면 됐다.

그런데도 그답지 않게 착한 척 제이드에게 맞춰주는 것은…….

“……루켄, 내가 마탑에 쳐들어간 적이 있었지. 기억나냐?”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어휴, 난리도 아니었죠. 그 때문에 저희가 마탑하고 척져서 마도구 수급이 곤란해졌잖아요! 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그 새끼들, 아무나 쳐 잡아가서 그렇게 연구한 거면서 생색은 또 오져- 읍!”

“그래, 그래. 기억하나 보군.”

내버려 뒀다간 한도 끝도 없이 떠들 것 같은 루켄을 닥치게 한 뒤 작게 속삭였다.

“그때 본 게 있다.”

“……!”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면으로는 모자라지 않던 알루카스다.

그런 그마저도 견디지 못해 모조리 불태워 죽여줄 정도로, 마탑주의 실험은 잔혹했다.

그 난리 통에서, 그는 기어이 탈출하는 실험체 하나를 보았었다.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신비로운 인상의 깡마른 미인.

‘나를 노려보았지.’

갈비뼈를 찔러오는 적의는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실험을 오래 당해서인지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파괴와 시체의 잔해 속에서 도망치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독특한 첫인상이었다.

평소의 알루카스라면 붙잡았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이가 이곳의 실험체가 되었다는 정보.

그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기어이 쳐들어왔으나, 정작 실험체들을 확인한 알루카스는 차라리 그것이 거짓이길 바랐다.

이런 참혹한 꼴로 발견이 되느니, 차라리 자신이 헛짓거리로 마탑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것이길 바랐다…….

‘없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투성이가 된 알루카스는 마탑에서 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그 누이가 한때나마 실험체로 머물렀다는 서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지금은 그가 닿을 수 없는 곳에 팔려 가고 말았다는 소식도…….

‘아하, 아하하하-!’

이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불행이라 해야 할까.

마탑은 그렇게 S급 화염 이능력자의 힘에 무너졌다.

‘그래봤자 마탑주 새끼가 돌아온 이후 곧장 복구되었지만…….’

알루카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S급이 되었는데도, 마탑주의 존재감은 결코 작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압박 어린 벽으로 자신 앞에 자리했다.

그런 마탑주의 실험체 대다수가 그의 불길에 죽음이라는 자비를 맞이하고, 몇몇이 탈출했다는 것은 알루카스에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 개같은 새끼도 엿을 먹게 되는구나.’

그런 미약한 승리감과 어쩌면 자신의 분풀이가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

그래서 던전에서 제이드를 보았을 때 알루카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실험체를 몹시도 닮은 외형이었기 때문이다.

‘고드윈 소공작의 가이드가 되었다고?’

신기하네. 연이 어떻게 그렇게 흘러갔을까. 마탑주 그 X새끼는 기어이 가이드를 생산해내는 데 성공했나?

그런 생각으로 찾아간 거였지만,

‘……용병왕, 알루카스.’

당황한 듯 커다래진 눈. 그와 동시에 뿜어지는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달큰한 향까지.

그리고…….

‘또 다른 S급 이능력자.’

그들 정도의 급이 되면 서로를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상대는 알루카스가 제대로 인지하기 전에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질 S급 이능력자는 많지 않다.

“……마탑의, 도망친 실험체란 말이군요.”

루켄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그래.”

“지금까지 생존한 걸로 모자라, 무사히 고등급으로 추정되는 고드윈 소공작의 가이드로 들어가고, 거기에 개인적으로 상단을 인수해, 진정제 포션을 만들어냈다……?”

하나하나 헤아리던 루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랑스럽지만 하찮게 보던 가이드가 마냥 조무래기만은 아니었다니.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깐족거리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알루카스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알루카스는 루켄의 추측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론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그 모든 행동이 치밀한 계략의 결과라기엔 당사자와 무언가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똑똑해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치밀하게 계략적이진 못하다.’

그래서일까, 알루카스는 의심했다.

제이드가 단순히 운이 극도로 좋았거나, 아니면 뒤에서 그녀를 조종하는 흑막이 따로 있을 거라고.

‘아니면 둘 다이려나.’

멍청하다면 운이 좋아도 살아남을 수 없다.

제이드처럼 약한, 힘을 조금만 줘도 부스러질 존재는 똑똑하게 행동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그 운은 누가 만들어 준 걸까?

알루카스는 사막 이민족 출신이다. 일찍이 그를 살리고 끝내 용병왕의 자리까지 올려다 준 것은 논리가 아닌 직감이었다.

그러한 직감의 발로로, 알루카스는 확신했다.

무너지는 마탑에서 자신이 목격한 실험체는 저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닮았어. 몹시 닮았지만…….’

그래도 다르다.

알루카스는 실험체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했다.

화염에 아지랑이 치는 연기와 파괴의 현장 속, 먼 거리의 인영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착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머나먼 눈빛 속, 갈비뼈를 찔러올 듯 강렬하던 적의를.

‘넌 누구지?’

흥미와 잔인한 호기심, 그리고 의문의 순간, 테라스의 소녀는 일어섰다.

‘그만 그렇게 눈 떠요. 가이딩해 줄 테니까.’

다소 오만하게 들릴 정도의 말투. 그 뒤로 공기를 타고 무형의 힘이 덮쳐온다.

머리가 후려 갈겨진 것처럼, 통증에 가까운 절대적인 안식.

이러한 파장 가이딩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제 몸이 휘청였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적합한 가이딩을 받은 적이 또 언제였던가. 아니, 적합자였던 누이의 가이딩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압도적인 가이딩 속, 마탑에서의 기억 위로 새로운 기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 똑같은 파괴…… 오직 한 가지만이 달랐다.

도망치는 요정족 혼혈의 미인 곁에. 저 소녀가 있었다.

화염이 닿기 직전, 미인을 숨기던 소녀는 그대로…….

‘……화염에 닿았어.’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싹 마른 시체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분명, 그랬을 텐데.

“-그래서 그런 겁니까?”

알루카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

“그 마탑주 새끼 엿 먹이려고 일부러 돕는 거잖아요. 그래서 연회 초대장에도 참석하겠다 보내신 겁니까?”

알루카스는 언제 과거의 기억에 빠져있었냐는 양 태연히 웃었다.

“그렇다고 보면 되겠지.”

S급인 자신마저도 무릎 꿇릴 정도의 압도적인 가이딩. 그의 누이에게까지 닿은 정보력, 그리고 진정제 포션까지…….

모든 것이 흥미로웠으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마지막이었다.

자신이 죽인 게 분명한 소녀가 다시 제 눈앞에 나타났다.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 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럼 내가 등신이라 이러는 줄 알았냐?”

알루카스는 굳이 루켄의 생각을 고쳐주려 하지 않은 체 어깨를 으쓱였다.

“대단하군요. 저희와 마탑 모두를 빼돌린 것만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판을 키우다니.”

“그렇지.”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궁금하군요.”

루켄은 심각해진 얼굴로 연회장의 문을 보았다.

“글쎄.”

성가시고 짜증 나 죽겠다던 루켄이 닥친 것에 만족한 알루카스는 연회 곳곳에 배치된 술잔을 들었다.

사실 루켄에게 말하지 않은, 제이드가 시킨 일이 하나 있었다.

‘뭐, 그건 닥치면 말해도 되겠지.’

정말로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기대 반 재미 반으로 알루카스는 술잔을 들이켰다.

우리 비밀투성이 아가씨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 * *

‘이,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패륜 넘치는 부를 쥔 채 생각했다.

해리스가 친부모에게 별다른 정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을 이렇게 막, 아무한테나 주면 안 되지 않아?

“제, 제가 들고 튀려면 어쩌려고…….”

“튀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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