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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44화 (44/119)

44화

그렇게 제이드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던전 부속품들은 이 리스트가 마지막인가?”

[예.]

해리스라고 놀고 있진 않았다.

고드윈 성의 중앙관, 굳게 닫긴 해리스의 집무실에는 서류와 일거리가 가득했다.

해리스는 자신이 처리한 일감들을 옮긴 수족이 새로운 일거리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오랫동안 부재한 고드윈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서 인계받는 건 정말이지 성가신 일이었다.

[또한, 이것은 소공작님을 선포한 연회의 참가자들 목록입니다. 여기서 신 고드윈 세력은…….]

물론 그것만이었다면, 해리스는 제이드를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바쁘진 않았을 것이다.

그를 정말로 바쁘게 만든 것은…….

“크흑, 끄으윽-!”

피로 진창이 된 바닥, 사내가 경련을 일으키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마력이 촉수처럼 질척이며 사내의 모든 얼굴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꿈틀거렸다.

“시끄럽네.”

해리스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집어 든 서류를 응시하는, 석고처럼 하얀 얼굴에는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닥의 시체들을 정리하던 해리스의 수족들은, 주인의 기분이 저조한 것을 깨닫고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해리스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고, 후천적으로 인간 혐오증까지 걸린 상태였다.

자연히 자신 주변의 인간들에 대해 민감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즉각적으로 확인을 들어갔다.

“……그래.”

적색의 안구가 새까매졌다가 훅, 꺼졌다.

“이번에도 공작이군.”

친애하는 아버지께선 아직도 건강하신 모양이지.

조소하던 해리스는 사용인으로 분한 암살자 위로 발을 올렸다.

“……!”

무언의 단말마.

바지춤에 피가 튀어 오르며 해리스는 더러워진 발을 털어냈다.

“참 끈질겨.”

오늘까지 합치면 몇 번째일까.

암살자들은 정말이지 지치지 않고 줄기차게 그를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해리스가 아닌 그의 가이드에게.

역시나 그의 친아버지, 고드윈 공작은 판단력이 빨랐다. 자신이 탈옥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곁에 가이드가 있으리라 짐작하다니.

‘그리고 그 가이드부터 죽여 없애려 들다니.’

해리스는 붉게 웃었다.

역시 지하 감옥에서 뛰쳐나오자마자 그 새끼부터 죽여야 했다.

해리스는 피를 닦은 수건과 더럽혀진 장갑을 바닥에 던지며 명령했다.

“먹어.”

바닥에 깔려 있던 어둠이 이를 드러내더니 우적, 우적- 으드득! 온갖 불쾌한 소리를 내며 피비린내까지 싹 다 삼켜 버렸다.

무엇이든 먹는다. 무엇이든 삼킨다.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주인님.]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시체처럼 창백하지만 공손한, 누가 봐도 귀족 가문의 집사처럼 보이는 사내.

하지만 그건 진짜 인간이 아니라, 집사를 가장해 들어온 암살자였다.

그러나 죽음 이후 해리스의 종복으로 다시 깨어난 암살자는 정말로 그의 집사라도 된 것처럼 충직해졌다.

이 또한 그의 이능, ‘공허’의 능력 중 하나였다.

언노운 던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힘을 쓰던 해리스는 점점 공허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내고 있었다.

“후…….”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은 핏줄에 뒤덮인 해리스의 눈꺼풀이 미친 듯이 부들거리고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웩-”

해리스는 피 섞인 구토를 뱉어내며 수건으로 코와 눈을 닦아냈다.

‘……흑마법 같군.’

기분이 더러웠다.

하긴, ‘공허’ 자체가 흑마법사들이 숭배하는 고대의 재앙이 아니던가.

[제이드 님께서 곧 귀가하실 것 같습니다. 공간을 열어 둘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역겨운 이능이 공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제이드를 향하던 암살자들은 죄다 해리스에게 유도되고 있었다.

단점이라면, 그만큼 제이드의 이동 가능 영역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점이지만…….

“열어둬.”

오랜만에 외출이라, 해리스는 피식 웃었다.

놀랍게도, 제이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방에서 뒹굴거릴 뿐, 굳이 정해진 공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달라는 대로 다 해주라 했다지만.’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나빴다면, 이 끔찍한 몰골을 보게 되었을 텐데.

‘그 애는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최소한 자신에게 걸린 것은 재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걸려 놓고서도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게 안전한 것은, 행운일까.

‘……알 게 뭐야.’

해리스는 허물어진 입매를 굳혔다. 먼저 엉겨든 것은 제이드고, 자신은 몇 번이고 밀어냈다.

멋대로 다가왔으면서 이제 와 운수 떨어진다고 멋대로 떠나기라도 하겠다고?

그렇게 둘까 보냐.

해리스의 입꼬리가 삐딱해졌다.

주인의 기분을 알아차린 듯, 공간을 가득 채우던 어둠이 발치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었다.

“…….”

창밖의 밝은 햇살에 해리스의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오늘도 한숨도 자지 못한 하루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이능은 그에게 큰 신체적 피로를 주지 않았다.

“-윽!”

다른 피로를 주었을 뿐.

해리스는 검은 핏줄이 솟아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주인님!]

[명백한 과로의 신호입니다. 가이딩이 필요합니다. 가이드님을-]

“닥쳐.”

해리스도 알고 있었다. 다만.

‘기절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은 지하 감옥에서, 그다음은 탈옥하다가, 그리고 마지막은 던전에서.

제이드는 늘 자신을 가이딩하고 나면 무리했다는 듯 힘없이 쓰러지곤 했다. 그리고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게 싫었다.

못 박힌 듯 의식 없는 제이드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도 등신 같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굳이 눈을 뜨는 순간 가장 먼저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헛짓거릴…….

“……아니.”

그렇게까지 헛짓거린 아니었다.

“아직은 됐어.”

오랜만에 바깥에서 놀았을 텐데, 하루를 이런 식으로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소공작님!”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이 열리고,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가 들어온 것은.

이어진 보고에서 나온 이름의 면면은 다양했다.

아르투 백작 영애, 보나, 그리고…….

“……용병왕?”

* * *

“후, 오늘 크게 한 건 했다.”

나는 귀가하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다. 결과적으로 오후의 일정이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본래의 대상이 최강의 암살자 듀크 아인델타였는데, 용병왕 알루카스로 바뀌었다는 소소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뭐, 어쨌거나 여러모로 알찬 하루였다. 맛있는 것도 먹고.

“나 진짜 고생했어…….”

비록 타 죽을 뻔하긴 했지만, 아니, 그랬기에 내겐 더욱 휴식이 필요했다.

“덕질해야징!”

어쩌다 3D 덕질로 넘어오게 됐지만, 사실 내 본진은 2D, 그것도 활자 속 인물이란 말이지.

나는 빠르게 이 세계 베셀 소설에 빠져들었다.

‘밖에 비 오는데, 나는 편하게 침대에서 빗소리 들으며 덕질하기? 못 참지.’

이게 바로 이너피스다. 흐뭇해진 나는 더욱 관대한 마음으로 소설에 몰입했다.

‘역시 본진 덕질이 최고다. 이것만큼 힐링 되는 게 없어.’

어둑어둑해지는 밤, 서늘해지는 공기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간만에 마음 편하게 뒹굴며 덕질하던 순간이었다.

“우리 애기- 너무 귀여워! 완전 사랑해……!”

쾅-!!

문이 박살 나듯 열린 것은.

“……?!”

나는 과자를 주워 먹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문을 걷어찬 길쭉한 다리가 내 침실을 밟으며 성큼 들어섰다.

빛을 삼키듯 새까만 머리카락. 서늘하게 뻗은 눈매와 석고상처럼 하얀 피부. 수려한 이목구비에 드리운 음영마저도 아름다운 남자.

“제이드.”

해리스였다.

퇴폐미가 줄줄 흐르는 미남이 붉은 입꼬리를 휘며 내게 물었다.

“너 지금 바람피워?”

툭, 입에 가져가던 과자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나는 순간 말문을 잃고 눈을 깜빡였다.

네?

제가요?

‘그것도 바람??’

일단 전제 조건부터 잘못된 거 아닌가.

‘바람 이전에 사귀는 것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사귀지도 않았는데 바람?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임시 계약직 반려 가이드라고 말한 게 누군데!

그렇게 따지기 직전, 벼락이 밤하늘 가득 울려왔다.

쿠르릉-!

비 쏟아지는 소리 사이를 파고드는 벼락의 흰 빛이 내리찍었다가 어둠에 먹혀들길 반복하며 해리스의 이목구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무, 무서워……!’

이 무슨 공포 영화 악당 같은 연출이야?!

그런 연출 속에서도 해리스는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무서워!’

심장이 마구 쿵쿵거렸다. 상황만 아니면 ‘흔들다리 효과~?’ 하고 플러팅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바, 바람이라니요.”

덕질하며 과자나 주워 먹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정조를 의심받게 되었다니.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그게 무슨 소리…….”

“방금.”

성큼, 해리스의 길쭉한 다리가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도착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내 턱을 쥐어 올렸다.

“사랑한다며?”

“네?”

갑자기 그건 뭔 소리…….

말을 더 잇기도 전에 라즈베리 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둑하게 깔린 눈 밑 그늘의 퇴폐미는 강렬하게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잠시 넋이 가출하고 뺨이 달아올랐…… 아니, 잠깐. 설마 방금 덕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덕질! 덕질 중이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

나는 다급히 책을 꺼내 펼쳐 보이며 해명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뒤집혔다.

털썩, 등 뒤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았고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 하나로 부족해?”

손에 쥐고 있던 책이 빼앗겼다는 걸 깨달은 건, 희고 커다란 손에 두꺼운 가죽 표지가 우드득 짓이겨지고 있음을 깨달은 뒤였다.

아니, 죄 없는 책한테 무슨 짓을?!

“용병왕 새끼도 만나고 말이야.”

……책 주인이 죄가 있었네.

‘반려 가이드로 취직한 이상, 다른 이능력자를 가이딩하는 건 확실히 아웃…… 이지만, 그래도 죽을 순 없잖아!’

송구합니다, 고객님. 하지만 전 의리 같은 거 없어서 언제, 어디서나 제 목숨이 최우선이랍니다.

하지만 우선은 우선이고, 당장 눈앞의 해리스에게 찔리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남에게서 전해 듣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말하기라도 해야 했겠지만…….

“그래, 제이드.”

이미 늦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내 이마를 쓸어주며, 해리스는 물었다.

“다른 새끼 가이딩하니 좋았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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