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저런 말을 웃으며 하는 게 진정 악취미다.
‘S급쯤 되면 공감 능력 결여는 디폴트인가…….’
제이드는 에효,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요.”
“흠?”
알루카스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휘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고?”
“아무렴, 그것만 알까요.”
“또 뭘 아는데?”
키와 몸무게, 성격과 취향, 각성 시기와 그를 각성하게 만든 원인. 그가 황실과 손잡은 이유까지.
모두 안다. 최애까지는 아니지만, 알루카스 또한 호감캐였으니까.
그래서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안다.
“당신이 현재 가이드를 찾고 있다는 걸 알죠.”
“하하, 맞아.”
알루카스는 시원히 웃으며 수긍했다.
다만 눈에는 경시의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이능력자가 가이드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음료값을 가이딩으로 대체해보려고? 사양-”
“그 가이드가 당신의 이복누이며, 당신 혼자의 힘으로 찾을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는 것도 알아요.”
“…….”
알루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볍고 능글맞게 웃던 분위기가 용암처럼 무거워졌다.
“재미있네…….”
하나도 안 재미있어 보이는 얼굴인데.
“그런가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걸 지적해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제이드는 손안의 유리컵을 꽉 쥐었다.
달그락거리던 유리컵의 얼음은 알루카스의 열기 때문인지 순식간에 녹아버린 뒤였다.
미지근하던 아이스티가 서서히 뜨거워지며 핫 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둘 사이의 테이블과 다과가 순식간에 재로 변해 사라지더니, 두꺼운 근육질의 두 팔이 나를 가두었다.
“또 뭘 알지?”
치이익- 등 뒤의 난간이 녹는 소리가 들려온다. 열기에 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190에 육박한, 근육이 꽉 짜인 거구의 사내는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해도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다.
“……글쎄요, 궁금하세요?”
“아주.”
뚝, 뚝- 녹아내린 난간의 쇳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알루카스는 노란 눈을 휘며 웃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날 재미있게 해줄지, 몹시 궁금해.”
날 재미없게 하면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는 뜻이다.
‘……몇 번째야, 이게.’
코앞에서 살해 협박을 듣게 된 제이드는 머리가 차가워졌다. 반절은 공포 때문이었고 남은 반절은…….
‘개자식.’
분노였다.
그래, 겉보기엔 서글서글하고 성격 좋아 보여도, 이렇게 수틀리면 언제든지 사람 하나 죽여 없애는 건 일도 아닌 게 이 빌어먹을 S급 이능력자들의 본성이다.
‘아, 해리스는 예외. 걘 겉으로도 안 성격 좋아 보이니까.’
하지만 그게 해리스의 매력이다. 내 최애는 일관성 있는 성격 파탄자라고!
이상한 부분에서 덕심을 채운 제이드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열기 섞인 공기가 갑갑했다.
‘최소한 내가 해리스의 가이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해리스가 이제 고드윈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직 측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력한 이능 보유자라는 것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알루카스는 상황이 재미없어지면 나를 죽여 버릴 것이다.
설사 해리스의 분노를 산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깟 애송이 새끼, 정도로만 여기고 있을 테니.’
적어도 지금은.
하여간, 듀크도 그렇고 S급 이능력자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잔혹하다.
제이드는 새삼스레 실감했다.
‘이래서 에이드리안이 이능력자들을 싫어했구나.’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젠 피부로 체감된다.
우리의 계략 흑막 주인공, 에이드리안은 정말이지 이능력자들에게 가차 없었다.
자신의 가이딩 능력을 통해 그들을 극한으로 굴리는 것은 물론 필요에 따라 가이딩 능력을 역이용해 살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니까.
‘진짜, 천재긴 천재야. 누가 가이딩 능력을 역이용해 이능력자를 살해할 방법을 알아냈겠냐고.’
어떤 이능력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에이드리안을 원망하기도 했다. 대체 우리에게 이렇게 가혹하냐고.
그에 에이드리안은 왜겠냐며 물었다. 그리고 답하지 못하는 이들을 죽이며 답했다.
「“모르는 것도 죄야.”」
멸망을 앞둔, 잔인하고 냉혹한 세계.
그 세계에 떨어진, 가이드인지 이능력자인지도 모호한 나.
‘살아남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이드는 옷깃 아래로 흘러내린 목걸이의 돌멩이를 의식했다. 심장의 체온으로 따뜻해진, 계속해서 마력을 불어넣은 그를.
줄에 걸린 에이드리안이 짜르르- 미약하게 진동했다.
* * *
‘기대되네.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알루카스는 웃는 낯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구불거리는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 홍조가 깃은 흰 볼. 가만히 있어도 미소 짓는 것 같은 입매와 짙고 도톰한 입술.
복숭아가 떠오르네. 깨물면 과즙이 흘러나올까. 알루카스는 혀로 제 송곳니를 핥았다.
소녀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작고 갸름한 얼굴과 길고 가냘픈 목선에, 뼈대 자체가 가는지 살짝 쥐기만 해도 부러질 듯 호리호리한 몸까지.
하지만 때로는 취향을 넘어서는 매력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육감적이고 섹슈얼한 여성체 가이드를 선호하던 알루카스는 여태껏 인정하지 않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겠군.’
붉은 혀가 알루카스의 입술을 쓸었다.
고드윈 소공작은 무슨 생각일까. 이런 가이드를 이토록 무방비하게 내버려 두다니.
‘잡아 잡수라고 대령한 거나 다름없잖아?’
그리고 알루카스는 차려진 밥상을 걷어찰 생각이 없었다.
주인 손을 떠난 가이드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는 본능에 맡길 생각이었다.
저 몸으로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알루카스가 천천히 자신 몸 아래 갇힌 소녀를 훑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니, 사실 알겠으니까 그만 해요.”
딱, 제이드는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만?”
“네, 그만 그렇게 눈 떠요.”
가이딩 해줄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소녀의 심장부에서 짙은 파장이 뿜어졌다.
“……!”
알루카스는 눈을 홉떴다.
이토록 가까이서, 지나치게 강렬한 가이드의 파장을 불시에 맞닥뜨리게 되어 순간 몸이 휘청일 정도였다.
제이드는 감탄했다.
‘역시 에이드리안……!’
세계 최강 가이드의 파장은 무방비한 상태의 이능력자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오빠충님, 힘을 쓰게 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주석으로 갚겠습니다, 반드시!
퍽!
그 순간, 제이드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알루카스의 무릎을 구두 굽으로 거세게 찼다.
“악!”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미친 S급! 무쇠야 뭐야?!
“후…….”
속으로 눈물 찔끔 흘린 제이드와 달리, 바닥에 무릎을 댄 알루카스의 얼굴엔 고통의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약간 몽롱해 보이는 것이…….
‘가이딩 부족이었구나.’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가이드를 잃은, 사막의 이민족 출신 이능력자가 대륙의 용병왕이 될 때까지 달려왔다.
‘닥치는 대로 가이드와 교접하며 접촉 가이딩을 시도했겠지만, 적합한 가이드가 아닌 이상 제대로 가이딩 받긴 어려웠겠지.’
아예 욕구 불만으로 지내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S급 용병으로 이름 날리면서 접근성도 용이해졌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소까진 못했을 거다.
알루카스는 그 상태로 십수 년을 버티며 용병왕까지 올라온 이능력자다.
세계 최강, 최고의 가이드 에이드리안에겐 불가항력이란 말이다.
‘그래서 <시천귀>에서 두 사람 커플링도 인기 많았지.’
능글맞고 육감적인 육체 미남과 까칠하고 예민한 절세미인의 조합.
그래, 솔직히 어울리긴 해.
‘하지만 서사는 해리스가 압승이거든? 해리스 & 에이드리안이야말로 <찐>이라고!’
서사충인 제이드는 쓸데없이 발끈하며 알루카스에게 손을 뻗었다. 모든 건 이 순간을 위한 빅픽쳐였다.
‘흡성대법.’
제이드는 조심스레 어두운 피부 위로 손가락을 뻗었다.
반쯤 눈이 감긴 상태의 알루카스가 눈을 뜬 건 그때였다.
“……?!”
제이드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지만, 알루카스가 먼저였다.
“……무엇을, 한 거지?”
갈라진 목소리.
천천히 눈을 뜬 알루카스의 얼굴엔 이전 같은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알아차렸나.’
옷소매 채 손목이 잡힌 제이드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 정말 잠깐이었는데 그걸 느꼈다고?
“가이딩이요.”
알루카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몸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제이드는 방금 무릎을 걷어찬 걸 기억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직접 느끼셨잖아요? 지금 몸 상태가…….”
“최상이야.”
알루카스는 씨익 웃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들끓던 공기가 가라앉아, 더욱 소년미 넘치는 미소였다.
“그런데 도중에 이상하게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거든.”
“그, 그것도 가이딩이에요.”
“아닌 거 같은데?”
“사혈 몰라요? 과부하된 이능을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빼는 거죠, 거머리로 피 뽑아서 치료하는 것처럼.”
“흐음…….”
알루카스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안 믿는 기색이네.’
하긴, 사혈은 대체의학이니까. 이 세계의 의학 수준을 모르겠네…….
제이드는 알루카스의 노골적인 불신을 모르쇠 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큼! 가이딩해서 말인데, 제게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요.”
“응, 다단계 안 해.”
“…….”
이 세계에도 다단계의 마수가 있다고? 무서운 것들…….
제이드는 잡힌 손목을 당겨 알루카스를 인도했다.
“아, 일단 따라와 봐요.”
“내가 왜?”
방금 가이딩해 준 거 잊었냐?
제이드는 기가 막혔지만 알루카스는 당당했다.
그래, 저게 S급 이능력자의 본성이지.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당당히 믿는 족속들.
이런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실질적인 이득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재미있게 해줄게요.”
“아, 그럼 못 참지.”
알루카스는 쿡쿡 웃으며 제이드 뒤를 따랐다.
그 순간 폐허가 된 카페테라스가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