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달가닥.
유리컵을 쥔 손의 열기에 얼음 녹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아네?”
잘생긴 용병왕은 씨익 웃었다. 그러곤 합석하겠다는 말도 없이 커다란 손으로 내 앞의 의자를 슥, 당겨 마주 앉았다.
불꽃처럼 구불거리는 기다란 적발.
헐벗은 상반신은 윤기 나는 구릿빛 덕분에 탐스러운 근육질 몸매가 더욱 도드라졌다.
그 위, 사막 민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각종 문신과 커다란 원석과 황금의 장신구가 번질거렸다.
“…….”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미남이었다. 알루카스는 내 표정을 보며 하하 웃었다.
“침 떨어지겠다.”
“아, 안 떨어져요.”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가를 닦았다.
당연히 묻어나오는 건 없었지만, 내 행동이 웃긴 지 알루카스는 쿡쿡 웃었다.
“귀엽네.”
커다란 입. 매끈한 이마와 콧대의 T존은 뚜렷하고, 붉은 기가 도는 노란 눈동자는 매처럼 강렬했다.
강인한 눈매가 휘어지며 나타난 미소는 섹시하다기보다는 특이하게도 소년미가 느껴졌다.
‘진짜…… 장난 아니네. 생긴 건 진짜 미쳤어.’
정말이지 해리스와 정반대 느낌의 사내였다. 미친 양기 미남 파워에 난 멍하니 중얼거렸다.
“가만히 있는데도 비타민 D가 섭취되는 기분…….”
“뭐?”
알루카스의 커다란 손이 웃어대던 입매를 감쌌다.
나는 새삼 비웃는 표정도 잘생긴 이 남자가 <시천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기 캐릭터라는 걸 실감했다.
‘바람둥이가 될 만해.’
잘생긴, 화염 속성의 S급 이능력자. 용병왕.
그런 알루카스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엄청난 바람둥이라는 점이었다.
자기 취향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대단한 스펙트럼! 능글능글하고 자상한 태도! 조금의 지조도 찾아볼 수 없는 절륜한 하반신까지!
‘이건 바람둥이 하라고 작정하고 만든 캐릭터다.’
정말이지 XY 염색체라는 것 말고는 해리스와 공통점이 없었, 아니, 둘 다 S급이지.
아무튼 그 두 개 빼고는 정말이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해리스는 음이지.’
반면에 알루카스는 나란히 마주 앉았을 뿐인데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진한 양기의 미남이다.
취향은 아니라도 눈이 즐거울 인물이지만, 난 지금 즐거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자식은 어떻게, 왜 나를 찾아온 거야?’
다행히 저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알루카스는 S급 이능력자야, 그가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어.’
……근데 왜 나를?!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했는데, 용병왕 알루카스라는 폭탄까지 투하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숨을 쉬네, 왜지?”
웃음을 그친 알루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 같은 미남을 보고 한숨 쉬는 여자는 거의 없는데, 하고 말하듯이.
두툼한 팔뚝으로 팔짱을 끼자 커다란 가슴 근육이 눌리며 강조되는 것이…….
‘밤의 연회에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침을 질질 흘리고 달려든다는 게 진짜였구나.’
진짜 장난 아니다. 얼마나 장난 아니냐면, 진짜 장난 아니야.
‘나보다 큰 거 같은데.’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폭 쉬었다.
“……세상이 불합리하게 느껴져서요.”
“뭐? 세상?”
“네.”
저 알루카스마저도 안 입는 브라를 나는 입어야 한다니. 왜지?
“억울하다…….”
나는 하녀들이 코디해 준 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돈된 차림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솔직히 갑갑하단 말이지.’
병실 생활에서 노예 생활까지 계속 느슨한 복장 차림이었는데, 해리스가 소공작으로 인정받으며 그의 가이드인 나 또한 귀족 영애 못지않게 차려입게 된 것이다.
거울로 볼 때는 ‘와, 내가 드디어 로판 영애가 되었어!’ 하고 좋아했는데 실상 입고 돌아다니니 엄청나게 성가셨다. 처음 입은 시녀복이 더 편했어…….
“……큽.”
입매를 가리던 알루카스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었다.
널찍한 어깨가 잘게 떨리더니, 한참이 지나서 고개를 든 알루카스는 왜인지 입매를 꾹 누른 채였다.
“그래, 우리 억울한 아가씨. 그거나 마셔봐.”
덜 갑갑할 거야.
그 말대로 나는 순순히 알루카스가 건넨 아이스티를 마셨다.
쪽, 빨대로 들이켠 시원한 홍차에선 생복숭아의 상큼한 향과 달달한 과즙 맛까지 느껴졌다.
“……!”
“입에 맞나 봐?”
그냥 입에 맞는 정도가 아니었다. 순간 경계심이 무너질 정도로 맛있는 아이스티였다.
나는 다시 쪼록- 아이스티를 마시며 진지하게 말했다.
“알루카스 님, 이래서 인기가 많으시군요.”
“……그 정도야?”
“네, 엄청 맛있어요.”
고드윈 성의 식사는 물론 좋았지만, 솔직히 주인의 식성을 고려해서인지 좀 심심했다.
“감동적이야…….”
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오늘 여러 일이 있었지. 심지어 죽을 뻔도 했다. 그래, 그 모든 게 이 아이스티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거야!
“…….”
알루카스는 이제 반쯤 엎드린 상태였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들썩이는 매끈한 등허리를 보며 아이스티의 빨대를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무슨 날인가?’
* * *
오늘 오전, 내가 마나 순환을 시도한 건 이 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판무 빙의물에서 주로 쓰는 방법이지.’
빙의한 몸의 마나 코어나 마력 회로를 확인해서 그 몸의 스탯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몸인지 확인하는 방법!
‘주로 빙의 영혼이 천마처럼 만렙이고, 몸은 개허접인 편이고.’
그러나 만렙 영혼은 허접한 몸에서도 장점을 발견해내 성장시킨다.
물론 난 영혼도 쪼렙이니 그렇게는 못 하겠지만, 일단 판무 빙의니까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일단 마나 코어부터 확인하자.’
이전부터 마력을 써보았으니 마나 코어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어라, 마나 코어가 심장에 있잖아?’
보통 마나 코어와 심장은 같은 중요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
위험하니까.
‘리스크는 분산하는 게 일반적이지.’
마나 코어 하나만 박살 나도 반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니, 실질적으로 폐인이 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다치면 즉사하는 심장에서 마나 코어가 느껴지다니.
‘의외인데.’
뭐, 특이하긴 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처럼 심장과 마나 코어가 동일시되는 케이스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계속 그러려니 할 수만은 없었다.
“……엥?”
당혹스러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혈맥처럼 섬세하게 이어진 마나 회로는…….
“깨끗하잖아……?”
무슨 아스팔트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일반적인 클리셰 설정처럼 곳곳이 막혀 있거나, 탁하고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개허접 영혼에 그렇지 못한 몸?!’
더욱 당혹스러운 건 그다음이었다.
보통 마나 순환은 처음 시도할 때 몹시도 어렵고 진땀을 빼며 잠시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엿된다는데.
‘난 왜 이렇게 쉽지?’
쉽다 못해 집중하지도 않는데, 혈맥처럼 섬세하게 뻗어진 마나 회로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마력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
뭐지, 보통 여기서 주인공들은 ‘흠, 이곳의 마나가 탁하다니……! 어쩌고저쩌고해서 문제가 생긴 게야. 이 몸은 원래 이러쿵저러쿵한 상태였군!’ 하고 추리하던데.
‘난 뭐, 할 게 없네.’
심지어 체내 마력의 순도도 엄청 높았다. 그런 걸 어떻게 아나 싶긴 한데 그냥 느껴졌다.
‘뭐야, 제이드 마력 천재였어?’
이게 인간한테 가능한 일인가? 여러모로 당혹스러운 전개였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라?”
더 큰 고민거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나 순환에 집중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내 몸 안에 이건 또 뭐야.’
슬롯?
* * *
제이드는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응시했다.
주인의 의사를 읽은 듯, 희고 투명한 피부 아래 무언가 고여왔다. 하나는 새까맣고, 다른 하나는 희미했다.
‘망했다…….’
마나 순환 도중, 제이드는 체내 슬롯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슬롯 안에 담긴 것은…….
‘새까만 이능의 힘.’
그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해리스.’
흡성대법으로 빨아들인 게 단순히 마력만은 아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제이드가 떠올린 것은 하나였다.
‘튀어야 해!’
들키면 살해당한다. 반드시 죽는다.
굳이 해리스가 아니라도 자신의 스킬은 존재만으로도 모든 이능력자의 적이었다.
타인의 힘을 빼앗아 쓸 수 있는 능력이라니!
‘이젠 내가 가이드인지, 이능력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목숨이 문제다.
물론 당장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플랜 B에 집중하여 착착 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장 지금은 고드윈 성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패닉하여 움직이던 제이드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아르투 백작 영애였다.
‘……이능력자?’
마나 순환을 해서인지, 예민해진 감이 낯선 이능을 감지했다.
그리고…….
‘보나가 확인 사살시켜 줬지.’
제이드는 손가락을 웅크려 손바닥 피부 아래 무늬를 가렸다.
하나는 해리스의 것을 담아서인지 새까맣고 크다면, 보나의 것은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을 듯 희뿌옇고 작았다.
‘이능의 급에 따라 다른 건가? 아니면 마력?’
모르겠다. 스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면 다시 던전 안으로 들어가 시스템에 접속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아, 웃겨.”
직접 몸으로 실험해봐야 하겠지.
알루카스의 들썩이던 어깨가 멈춘 건 테이블에 다과의 세팅이 끝난 뒤였다.
“내 용모보다 음료에 더 반응한 여자는 또 처음이네.”
능글맞게 웃는 얼굴은 마주 미소 지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제이드는 속지 않았다.
‘상대는 S급 화염 속성 이능력자야.’
수틀리면 눈 깜빡할 사이에 나를 숯덩이로 만들어버리겠지.
슬쩍 옆눈으로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보이는 건 테라스 주위를 엄호하는 알루카스의 용병 단원들뿐이었다.
“와- 처음. 멋지네요.”
포위됐다.
‘하긴, 이능력자 집단을 일반 기사단 호위가 어떻게 막아.’
제이드는 체념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스티에 집중했다. 그래, 너라도 달아서 다행이다…….
쪼로록-
“이런, 이 와중에 너무 잘 마시는 거 아냐?”
“이 와중에 이거라도 맛있어서요.”
“하긴, 내가 직접 복숭아즙을 짜긴 했어.”
“노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알루카스는 윙크하며 말했다.
“내가 독이라도 넣었으면 어쩌려고.”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