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하아, 기운이 안 나.’
기력 채우려고 일부러 19금만 골라서 읽었는데, 킬링 타임조차 안 된다.
‘커뮤가 없어서 그런가.’
도파민 부족이다.
자고로 웹소 덕질은 댓글로 덕심 쏟아내고, 좋아요도 주르륵 누르고, 반대 의견에 대댓글 달면서 싸우기도 하면서 읽어야 제맛인데…….
‘그래서 하녀 언니들을 한둘씩 영업했지.’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언니들의 격렬한 반응을 보니 다시 재미있어졌다가, 다시 식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안 읽은 건 아니지만…….’
다음엔 다른 장르로 읽어야지. 나는 19금의 세계로 인도한 하녀 언니들을 뒤로하며 일어섰다.
‘해리스, 계속 안 보이네.’
사실 이게 내 기분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뭐, 어찌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해리스는 이제 진짜로 고드윈 소공작이 되었고, 선대 공작에게서 여러 가지 일을 인수·인계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 바쁘지. 바쁠 수밖에 없지.’
다행히 본성의 사람들 모두 해리스를 순순히 자신의 작은 주인님으로 받아들였다.
이전에 내가 사전 작업을 잘 펼쳐준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해리스의 공이었다.
‘언노운 던전에서 기사단을 구해 왔으니까.’
파르나를 비롯한 고드윈의 기사단들이 귀환하자, 본성엔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찼다.
아무래도 같은 직장 동료인데다가 인척 관계, 연인 관계로 엮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제 손녀딸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지어 선대 공작의 보좌관, 레디안 백작마저도 해리스에게 감복할 정도였다. 내게도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할 정도니 말 다 했지.
하녀 언니들과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건 덤이다. 덕분에 19금 소설 모으기도 쉬웠고.
“그래, 바쁜 거야. 바빠서 그래.”
자기 일에 프로페셔널한 남자, 그게 바로 해리스잖아? 흑막 공작 꽁으로 된 거 아니잖아?
일하느라 바빠서 못 본 거지, 절대 나를 피하는 게 아니…….
“……긴 개뿔, 나 피하는 거 맞잖아.”
쿵, 나는 벽에 고개를 박았다.
아무리 그래도 숙소가 같은 동관인데, 일주일째 안 보이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마음 같아선 당장 찾아가서 ‘왜요! 뭐가 또 문제야!’ 하고 멱살을 짤짤 흔들고 싶지만…… 사실 나도 좀 난감한 상태였다.
“역시 키스가 문젠가.”
나는 입술에 손을 대며 시무룩해졌다.
그래, 내가 가면서 포션을 먹긴 했지. 그거 뒷맛이 좀 구리더라.
게다가 진정 포션의 재료인 ‘요정의 손톱’도 강제로 먹였으니, 어쩌면 시궁창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시궁창 키스라니.”
눈물이 난다. 내 첫 키스가 시궁창 키스라니? 아, 나는 좋았지. 그래, 해리스만 시궁창…… 이건 더 별로다.
‘진짜 별로였나? 그럼 왜 미친 듯이 달려든 거지?’
그저 가이딩이 필요했어서……?
가이딩, 하자 떠올리고 싶지 않던 사실마저 함께 기억났다.
“흡성대법…….”
이는 보통 무협에서 최종 보스나 주인공이 가졌던 사기 스킬이다.
남의 에너지를 빼앗아 버린다는 점에서 무림인들이 몹시도 적대하던 스킬이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여기서는 이능력자들이 극도로 경계할 스킬이란 말이다.
‘키스에 문제 있는 게 아니라면, 설마 흡성대법 때문인가?’
문제가 뭔지 모르겠다.
다만 어느 쪽이건, 내가 대놓고 해리스에게 물어보기 난감한 이슈인 건 동일했다.
전자는 진짜…… 인간적으로 쪽팔리고, 후자는 목숨이 위태롭단 말이지.
“아아, 미치겠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짜 모르겠네. 나 정말 가이드 아닌 거 아냐?
‘???의 백발백중은 아무래도 내 총쏘기 실력 같은데. 그럼 그건 공격계열이잖아.’
가이드의 주된 능력인 정화, 치유, 진정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죽여서 진정시킨다, 뭐 이런 건 아닐 거 아냐.’
아니, 그럼 해리스가 왜 달려들었겠어. 뭔가 소용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잖아.
게다가 꼭 가이드 or 이능력자라는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난 하이브리드 듀얼 코어 뉴타입 가이드-이능력자일 지도……!
‘끙, <시천귀>에서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안 나온다. 한참 머리를 싸매던 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확인해야겠지.”
나는 사람 눈이 닿지 않는, 조용한 구석을 찾아 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흡성대법이라는 무협 스킬을 얻은바, 무협의 기본이자 베이스인 운기조식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이 세계관에선 마나 순환인가?’
이전에 마력을 써본 적이 있으니, 분명 몸엔 마나 코어가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난 천천히 눈을 감고 마나 코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체내 마나님, 이미 몇 번 사용해 드린 것 같은데 제발 이번에도 반응해 주세요.’
제가 알못이라 버벅대서 그렇지, 하면 잘 순환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영약 같은 것도 잘 찾아 먹을게요. 저 빙의자라 그런 거 속속 잘 빼먹을 자신 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어라?”
잠깐, 이거 뭐지?
* * *
“후…….”
선대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아이들이 어디 다치지 않고 귀환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차후 제이드도 무사히 깨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도 잠시였다.
“여기저기서 참 꾸역꾸역 잘도 밀려오는군.”
뒷 일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선대 공작은 약속을 지키는 사내였다.
친손자가 무리해서 언노운 던전을 해결하고, 심지어 자신이 보냈다가 행방불명되었던 기사단들마저 구출해 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선대 공작은 해리스를 고드윈 공작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랜만에 성을 열었다.
‘연회를 준비하라!’
고드윈의 소공작이 귀환했으며, 던전을 파괴했다는 공로를 널리 사기 위함이었다.
선대 공작의 수족들은 기뻐했다. 진짜 후계자를 부질없이 떠나보내고, 새 공작과 갈등하며 어둡게 가라앉았던 고드윈의 본성에도 활기가 돌았다.
모든 게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계승식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에 불청객이 찾아오기 전까진.
“노먼…….”
[후계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고드윈 공작 가문의 주인으로서 근심이 큽니다.
이에 따른 책임을 제대로 지지 못한 저의 부족함을 인정하는바, 적당한 방계의 아이를 후보로 골라 저의 이름으로 보내드립니다.
부디 후계권을 가지신 선대 공작께선 신중히 결정해 주시길 바라며, 새로운 소공작을 수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선대 공작은 와그작, 그에게 온 편지를 꾸겼다. 한때 철혈 공작이라 불리던 노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 새끼가.”
노먼은 이미 자신이 해리스를 후계자로 올릴 예정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통제해 두었던 소식을 다시 풀어놓았으니까.
후계권을 정하는 건 노먼이 오래전에 포기한, 오롯이 자신만의 권한이다.
그런데 이런 편지에, 손님들까지 보내다니.
모욕적이고 기분 나쁜 것은 둘째 문제였다.
‘무슨 생각이지?’
왜냐하면 선대 공작은 어떤 후보가 와도 해리스가 아닌 이를 후계자로 내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놈 또한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연막이며 다른 수가 또 있다는 말이다.
‘노먼이 노릴 만한 게 뭐가 있지?’
선대 공작은 자신을 버린, 그리고 자신도 버린 아들을 떠올렸다.
황녀의 장례식, 창백해진 얼굴, 그런 와중 지독히도 형형하던 자줏빛 눈동자…….
“……!”
그리고 그 눈동자가 향하던, 황녀를 쏙 빼닮은 어린 소년.
해리스.
선대 공작은 벌떡 일어났다.
“제이드, 해리스의 반려 가이드인 그 소녀는 어디 있느냐!”
일그러진 주인의 얼굴에 보좌관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레디안 소백작, 야니스가 다급히 달려와 외쳤다.
“각하, 소공작님의 가이드께서……!”
* * *
“……어라.”
테라스의 구석, 당황한 듯한 제이드의 목소리에 아미아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하녀들은 불건전한 소설로 방심하게 하고, 자신은 마나 순환을 해?’
자고로 마나 순환에 집중하게 되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취약해질 상황을 대비해 방심을 유도한 거라면 괜찮은 계략이었다.
물론 아미아 자신은 그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목적에 따라, 그녀가 마나 순환에 빠진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야 마땅하지만…….
‘……젠장, 이 노예 자식이 조금만 덜 자랐어도 마나 순환을 어떻게 했을지 제대로 봤을 텐데!’
간신히 눈을 떼어냈을 땐, 제이드가 마나 순환을 끝내고 돌아온 뒤였다.
“외출해야겠어.”
“네? 갑자기요?”
“무슨 일로…….”
“그냥 나가려는 건 아냐. 외출 허락은 누구한테 받으면 되지?”
“레, 레디안 백작님께…….”
“알겠어.”
아미아는 제이드가 진지한 얼굴로 외출을 말하는 와중에도 <내노예>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아, 조금만 더 읽으면 2권인데!’
신경이 분산되어 힘들었다.
‘아냐, 빨리 다 읽고 본론으로 돌아가면 돼.’
이성적이지 못한 생각이지만, 일생 정숙한 숙녀로 살아오다 빨간 딱지의 세계에 처음으로 빠져든 아미아는 이성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밧줄로 지금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
“아, 지금 시간쯤이면 중앙관에 계실 겁니다.”
“그래, 그쪽으로 가자.”
정신이 반쯤 팔린 아미아와 달리 하녀들은 능숙하게 제이드를 중앙관으로 인도했다.
넓은 고드윈 성은 귀환한 기사단과 새 주인님의 환영으로 소란스러웠는데, 거기에 예정 밖의 손님들이 도착해 더욱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좀 소란스럽죠?”
“활기차고 좋지, 뭐.”
주위를 보며 하녀들이 말을 붙였지만, 제이드는 대충 대답했다.
제이드의 창백한 얼굴은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딴생각에 빠져 중앙관 복도에조차 시선이 닿지 않는 듯 보였고.
하녀들이 염려스럽게 그녀를 돌아보던 와중이었다.
“어머, 저게 그 천것인가요?”
사람들이 오가는 중앙관의 복도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시비가 걸려왔다.
‘잠깐, 저 문양은?’
낯설지 않은 얼굴들에 아미아는 재빨리 제이드 뒤에 숨었다.
“주제도 모르고 고드윈 공자를 꾀어냈다는 천박한 계집이.”
아니, 저년이?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